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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14 - 말씀 위에 선 신앙 (7) - 성경에서 영생을 얻고 누리기

요한복음 5:39-4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8-20

말씀내용
말씀 위에 선 신앙(7) 성경에서 영생을 얻고 누리기 (요 5:39~40)


우리는 권위 아래서 태어나서 권위를 배우며 성장합니다. 부모의 권위, 지도자의 권위, 정부의 권위 등이 우리가 살면서 배우는 권위들입니다. 만일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면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성경을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떠난 신자의 삶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신자의 삶은 철저하게 성경의 권위 아래 사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선다”는 유명한 칼빈의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여 한 말입니다.

성경의 권위가 회복되어야 신앙이 세워진다.
성경이 우리 신앙의 유일한 기초라는 말에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다.” 이 명제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3문의 답입니다. 신자에게 성경 외에 다른 권위는 없다는 말입니다. 신자는 성경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으며 순종하여 움직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성경의 4항도 인용하겠습니다. “성경에는 권위가 있다. 그 권위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믿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저자이시요,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신자의 신앙과 삶에서 무오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집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의 증거나, 교회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어떤 위대한 지도자나 교회의 권위도 성경의 권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과학이 성경의 진리를 뒷받침해준다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우쭐하고 좋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좀 우스운 일입니다. 성경이 과학으로 증명되고, 위대한 사람에 의해서 증거되지 않더라도, 성경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자체로 권위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최대 위기는 성경이 그 권위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권위가 없어지지는 않지만 이 권위가 상실되면 우리 신앙이나 삶이 다 무너진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설교해도, 성경이 더 이상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상실하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성경, 주님께서 인정하신 권위
본문에서 주님은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시기 위해 성경의 권위를 사용하십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이 성경이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성경의 권위 아래서 당신 자신을 증거하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실제로 우리가 성경을 우리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며, 무오한 절대 권위라고 인정하는가 하는 말입니다.

성경을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우선 성경의 권위를 바르게 인정하지 않는 태도 몇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그것은 먼저 “성경의 메시지와 교훈을 전반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입니다. 인도의 간디는 산상수훈은 좋아했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동성애나 기타 민감한 이슈들을 다룰 때는, 성경이 구시대적 접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또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내 상황과 마음에 와 닿는 말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는 태도도 있습니다. ‘레마’와 ‘로고스’를 구별하기도 합니다. 둘 다 말씀을 의미하는 헬라어인데, 어원적으로나 문법적으로 크게 차이가 있지는 않아서, 신약성경에서 상호 혼용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의 차이를 강조하여 레마는 나에게 체험된 말씀이고, 로고스는 그냥 쓰여진 말씀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은혜롭게 들릴지라도 근거는 미약합니다. 이런 태도는 성경의 권위를 중시하는 것 같지만, 느껴지고 체험되는 말씀만 편향적으로 중시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주관적 태도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로서의 성경을 무시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 삶에서 분명한 태도의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성이 자신의 삶과 행동의 절대 기준이 아니라, 성경의 교훈과 원리를 따라서 결정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교회는 모든 결정에서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언제나 살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의견이 달라도 모두가 그 말씀을 청종할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하지만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면,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적 행위는 사상누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절대 복종하는 삶이 없다면, 우리 신앙은 허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성경에 대한 편견이 제거되어야 신앙이 세워진다.
"내가 만약 악마라면.."
제임스 패커는 “내가 악마라면..”이라는 가정을 해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가 악마라고 가정한다면, 자기의 첫번째 목적은 사람들로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성경이 제대로 설교되지 못하여 그리스도와 복음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고, 사람들은 성경을 탐탁지 않게 여기므로 성경을 읽지 않게 만들 것이고, 교회에서는 성경공부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고 지루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만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목사의 눈을 가려서 성경에서 복음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문제: 성경은 가지되 성경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본문에서 책망하는 유대인들의 문제가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졌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고 늘 율법을 읽고 연구했으며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를 보는데는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이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영생을 원했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리어 성경을 이용하여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죽였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은 실로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가진 편견과 잘못된 전제들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 가리키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요소들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고 누리려고 한다면, 우리는 이런 편견들을 인식하고 무너뜨려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전제와 편견들
성경에 관한 잘못된 전제들 중에서 “성경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 편견은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를 제공합니다.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7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가 똑같이 명백한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똑같이 분명한 것도 아니지만,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은 성경의 이곳 저곳에 분명히 제시되고 펼쳐져 있기 때문에 배운 자들뿐 아니라 배우지 못한 자들도 일반적 수단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중세의 로마카톨릭교회는 성경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기 때문에 사제들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은 이런 중세 로마교회에 맞서 “성경은 누구나 읽고 충분히 그 참된 의미를 발견하기에 분명한 책”이라고 강조하면서 성경을 모든 신자들의 손에 돌려주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읽어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책입니다.
성경에 관한 또 하나의 편견은 “성경은 진부하고 지루한 옛날 책”이라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많은 드라마, 감정의 표현들, 인간의 욕망, 죄, 헌신 그리고 인간 삶의 매우 다양한 국면들을 다룬 스토리로 가득합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이 오늘날 우리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물론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차이는 다소 지루할 수 있고, 족보나 숫자들도 지루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런 본문들을 포함시킨 것은 분명히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어느 한 부분도 쓸데 없이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성경에 대한 무지입니다. 무지는 또 다른 무지를 낳고 지루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도그마는 드라마다>라는 책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설교자가 교리를 너무 강조해서 교회가 텅 비게 되었다는 소리를 쉴 새 없이 듣곤 한다. 교리에다 ‘지겨운 도그마’라는 별명까지 붙이면서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 정반대다. 오히려 도그마를 무시하기 때문에 지겨움이 생기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역사상 인간의 상상력을 가장 크게 뒤흔든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그리고 그 도그마가 바로 그 드라마다.” 제가 여기 한 마디만 더 붙인다면, “그리고 그 드라마는 바로 성경이다.”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대하는 잘못된 태도가 제거되어야 신앙이 세워진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성경의 유익과 영생을 준다는 것을 알았고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거기서 주님을 만나지 못한 이유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된 태도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 잘못된 태도 중에는 먼저 지식주의적 접근 태도가 있습니다. 성경을 지식을 얻기 위한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하나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자기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계시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이 참된 지식이 영생입니다(요 17:3). 단순히 성경 지식을 얻고 더하기 위해 성경에 접근하는 태도는 좋지 유익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한 또 하나의 잘못된 태도는 실용주의적 접근 태도입니다. 이것은 실천적이고 당장에 유용한 교훈을 얻으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인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근시안적으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가령, 경영의 방법, 돈 버는 법, 부부 관계 잘 하는 법, 자녀 양육법 등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참된 삶의 지혜가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건강한 삶의 세부 지침서나 자기계발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본성을 새롭게 하고(중생),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여 그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가시는(성화)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입니다.
세번째 잘못된 접근법은 감각주의적 태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보다 감정을 선호하는 태도로,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을 추구합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팽배한 경향입니다. 감각주의적 태도는 “나는 그리스도를 알고 싶지 교리와 신학을 알려는게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일면 좋게 들리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라는 질문 자체가 이미 신학이고 교리를 포함하는 질문입니다. 교회 역사에는 교리를 간과하고 경건한 감정을 중시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건과 체험을 중시하던 경건주의 전통에서 신학적 자유주의가 나왔다는 사실은 유감스런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육체적 부활이냐는 중요하지 않고, 그 부활신앙으로 고난과 위기를 극복하며 사는가가 중요하다고 여긴 사람들 중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태동한 것입니다. 감각주의는 위험한 태도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어떻게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들으면 거기서 최고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믿음으로 접근하라.
성경은 믿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떤 열의와 어떤 진심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한다고 해도 영생을 얻고 누리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것은 믿음의 눈입니다. 38절에서 주님은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인격적 신뢰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 신뢰와 그 관계의 토대에서 성경을 대할 때, 성경에서 영생을 얻게 되고 또 누리게 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이기에 성경을 통해서 그 믿음은 더욱 강화되고 견고해집니다. 믿음은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하고, 이것은 다시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사람은 기계적으로, 혹은 의무적으로 성경을 읽고 공부할 수 있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영생을 얻지도 누리지도 못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주님께 나아가기를 거절했습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40).” 히브리서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2).” 늘 배워도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마침내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딤후 3:7).
이것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성경에서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42절에서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성경을 열어주는 열쇠다.” 수없이 많은 성경 구절들이 이것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 신뢰와 사랑이 없이는 우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고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 주님, 저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제게 믿음을 더하사 성경을 열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기서 영생을 얻고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을 생각하지 말라.
또 한 가지 주님께서 그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지 못함을 지적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이 아니라 사람의 칭찬과 인정에 매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4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자신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중심, 자기 연민, 자기 사랑, 자기 존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령에 역사할 자리가 없습니다. 신앙은 자기 부인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셔야 하고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셔야 한다는 것이 자기 부인의 내용입니다. 41절에 주님은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인정을 하거나 말거나 그것이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족시키는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이, 칭찬은 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칭찬이 어디서 오는 칭찬이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도 말씀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믿음은 이렇게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믿음으로 더욱 나아가게 합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말씀대로 입니다(마 13:12). 만일 사람에게서 오는 칭찬과 인정에 이끌려 산다면 여러분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고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안에 충만하게 있는 것은 여러분의 자아입니까 아니면 주님이십니까?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영생을 얻고 누린 사람
성경과 관련해서 정말 큰 유익을 누렸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2000년의 교회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신학자의 한 사람인 어거스틴입니다. 꺽을 수 없는 정욕의 포로로 살던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점차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조금씩 이끌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불타오르는 정욕과의 싸움은 늘 치열했고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내일은 이겨야지’하면서 패배감을 달래는 수준의 삶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내적인 깊은 은혜를 경험합니다. 참회록에 있는 그의 고백입니다.
“나는 무화과 나무 아래 벌렁 드러누웠습니다. 눈물이 솟구쳐올라 흘러내리더니 이내 강물처럼 쏟아졌습니다……슬픔 속에서 나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내일 내일’이라고 계속 말했습니까? 지금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 흉한 죄를 한 순간에 끝장낼 수 없는 것입니까?.....갑자기 옆집에서 흘러나오는 어린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남자 아이의 소린지 여자 아이의 소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져가서 읽으세요, 가져가서 읽으세요’라는 후렴구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그런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어떤 놀이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며 위를 올려다 보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흐르던 눈물을 닦고 일어서면서 나는 그 말을 성경을 펼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내 눈에 처음 들어오는 성경의 첫 구절을 보는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펼쳐서 내 눈이 닿는 첫 구절을 조용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나는 더 읽고 싶지 않았고 더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문장이 끝났을 때 마치 확신의 빛이 갑자기 내 마음속을 비추어 내게 있는 모든 의심의 어두음을 걷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하고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는 복된 역사를 누리게 하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