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신앙과 성숙 13 - 말씀 위에 선 신앙 (6) - 교리 묵상하기

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신앙과 성숙 13 - 말씀 위에 선 신앙 (6) - 교리 묵상하기

베드로후서 1:12-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8-13

말씀내용
교리 묵상하기 (벧후 1:12~15)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후서를 쓴 이유
오늘날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의 문제는 우리 시대만의 특별한 고민은 아닙니다. 베드로후서를 쓰는 사도 베드로의 고민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네로 황제가 다스리던 주후 68년 이전에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65~68년 어간에 쓰여졌다고 볼 때, 사도 베드로가 죽기 전에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실제로 1:14에서 사도는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서신을 쓰는 사도의 마음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을 분별하여 내쫓게 하고 그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무너진 삶의 문제를 교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이것을 위해서 어떤 새로운 가르침이나 처방을 내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된 표현을 주목하셨습니까? 12절에서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절에서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5절에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고 썼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도가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하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 가르친 바, 복음의 진리를 다시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12절은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고 말합니다.” ‘알고 이미 있는 진리’입니다. 아시다시피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풍성했던 교회였습니다. 찰스 브리지스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거룩한 설교로 배부르기 전에는 흩어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교회도 거짓 교사들로 인해 어려움을 많이 겪은 것을 보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신천지 같은 이단에 흔들리고 있고, 또 정상적으로 안수받은 목사들이기는 하나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선포하지 않는 거짓 교사들에 의해서 흔들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베드로후서를 쓰는 사도 베드로의 심정으로, 오늘 우리가 이미 배우고 아는 진리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 우리 신앙에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통해 최대한의 유익을 얻지 못하는 이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수단들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배운대로, 말씀과 성례와 기도입니다. 특별히 말씀과 관련해서 보자면, 예배 뿐 아니라 우리 교회의 모든 공적 모임에는 말씀이 있고 말씀이 그 중심입니다. 성도의 개인생활에서도 맥체인 성경읽기표를 사용하여 매일 말씀을 읽도록 권할 뿐 아니라, 그 한 부분은 좀 더 깊은 묵상을 위해 새벽기도회에서 그리고 매일 아침 카톡에 [매일말씀묵상]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주일 오후에는 교리공부를 합니다. 이것도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적어도 은혜의 수단인 말씀과 관련해서는 충분히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은혜를 충만히 받고 있습니까?
그러나 만일 이 모든 것에 묵상이 빠진다면, 그 많은 풍성한 말씀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묵상이 없이, 우리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감격하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얼마나 기대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은혜의 수단으로 주신 말씀을 통해서 최대한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묵상입니다.

가슴에 불을 붙이는 것은 묵상이다.
에드먼드 칼라미의 말입니다. “참된 묵상은 묵상할 때 그리스도에 대해 묵상해서 마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묵상해서 마음이 그 진리에 따라 변화되게 하며, 죄에 대해 묵상해서 마음이 죄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참으로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를 맛보아 안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는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머리에만 있고 가슴에서 불붙지 못하는 자신을 볼 때, 참된 성도의 마음은 힘들고 불편하고 답답하고 심지어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가슴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를 수 있습니까? 기도원에 가서 부르짖거나 금식기도를 하면 됩니까? 답은 특정장소에서의 특정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답입니다. 문제는 그 말씀을 묵상하지 않은 채, 듣고 읽고 배우고 우리의 머리 속에 쌓아가는 것입니다. “묵상이 없으면 모든 것을 잃고 만다”고 한 토마스 왓슨의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그는 계속 말합니다. “연구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고 묵상은 진리를 영적으로 진보시키는 것이다. 전자는 금맥을 찾는 것이고 후자는 금을 캐내는 것이다. 연구는 따스함과 영향력이 거의 없는 겨울의 태양과 같다. 반면에 묵상은 마음이 얼어붙어 있을 때 녹이고, 마음이 사랑의 눈물을 떨어뜨리도록 한다.” 성경을 연구하는 일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연구가 묵상과 병행할 때, 말씀 안에서 최대한의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토마스 왓슨의 말을 좀 더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묵상은 감정의 불길을 일으키는 풀무와 같다.” 시편 기자도 이것을 입증합니다. 시편 39:3~4을 보지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다윗은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라고 말합니다. ‘읊조린다’는 말은 묵상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자 심령에 불이 붙었다는 말입니다. 4절 이하는, 다윗이 묵상한 것이 인생이 별게 아닌 연약한 것이라는 주제였음을 암시합니다. 이런 것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이런 은혜를 맛보고 싶으신가요?
이것이 묵상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시편 119:97도 비슷한 고백입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시인은 말씀을 묵상할 때, 그 말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묵상의 기술
이 사실을 알아도, 우리는 어떻게 묵상을 해야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묵상이 그냥 “하자”하면 되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묵상을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기술이라고 한 제임스 패커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묵상의 기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합당할런지는 모르겠습니다는, 교회의 전통 속에서 믿음의 선배들이 했던 경건의 훈련으로서의 묵상을 잠깐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묵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임시적 혹은 즉흥적 묵상이 있고, 또 하나는 계획적 혹은 의도적 묵상이 있습니다.
임시적 묵상이란 정해진 시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하는 묵상이라기 보다 돌발적이고 짧고 일시적으로 하는 묵상입니다. 가령, 하늘과 달과 별들을 보고 하나님을 묵상하는 시편 8편이 임시적 묵상의 예입니다. 우리도 어떤 일들,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이나 하시는 일을 생각하게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장례식에 참석해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묵상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묵상은 유익하기는 하나 위험요소도 따릅니다. 사람의 상상력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를 받고 그 말씀에 적셔져야먄 거룩한 상상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계획적 묵상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바, 말씀에 기초한 묵상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사람들에게서 떨어진 조용한 곳에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여러분은 성경 본문을 직접 묵상하는 것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소 상이한 접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교리 묵상입니다.

교리 묵상: 묵상의 주제들
교리 묵상은 오늘 읽은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가 의도한 것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가 “생각나게 하려고”한 것은 특정 성경 구절이라기 보다, 12절에서 언급한대로, ‘알고 이미 있는 진리’를 가리킵니다. 이것을 우리는 ‘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리는 진리의 체계, 혹은 체계적인 진리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만일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는다면 교리 묵상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워 교리를 알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얼마든지 교리를 묵상하실 수 있습니다.
교리 묵상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들을 생각해보지요. 제일 먼저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19세기의 위대한 선교사 헨리 마틴(1781~1812)은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은 바가 있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면서 보낸 시간보다 더 낭비되지 않은 시간은 없었다.” 31살에 생을 마감한 이 젊은 선교사의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존재와 지혜와 권능, 거룩과 공의와 인자 그리고 진실하심이 무한, 영원,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배워서 압니다. 하나님의 속성 하나 하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묵상한다면 어떻게 쉽게 죄를 짓겠습니까? 또 하나님의 지혜를 묵상한다면 우리는 곤경과 시련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머리로는 답이 안 나오지만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로 최상의 것이 되게 하실 것을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묵상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세력과 사람 앞에서 좀 더 담대함을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속성을 묵상하는 데서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묵상하는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묵상한다고 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정하여 놓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으로 그것을 이루어 가십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닥쳤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를 묵상하면, “아, 이 일도 하나님의 전능하고 선하신 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나의 유익을 위해서 이 일을 사용하실거야”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암 캐리 (1761~1834)는 자신이 번역해 놓은 성경 원고가 있던 인쇄소가 화재로 불타 버렸을 때, 친구 앤드류 풀러에게 쓴 편지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렇게 교리 묵상을 통해서 위로를 얻습니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시 119:92).”
우리는 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묵상할 때, 우리 마음은 뜨거워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힘도 얻습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떠나시지 않고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묵상함으로써,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인 자기 육체에 거룩하지 않은 것들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인간에 대한 교리를 묵상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 뿐 아니라, 우리의 부패성과 죄성에 관한 교리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죄의 더러움과 죄가 가져오는 비참한 결과를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더러운 죄악들과 싸울 의지를 가지게 되고, 이기는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인생의 짧고 덧없음을 묵상할 때, 우리는 세상의 영광에서 눈을 떼게 되고 영원한 영광을 바랄 소망을 얻게 됩니다.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은혜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한한 은혜를 그리스도 안에서 아낌 없이 베푸셨고 베푸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묵상함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장래의 은혜를 묵상함으로, 장래를 향한 우리의 두려움은 기대감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 마지막 순간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테오도르 베자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주님,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저를 붙들어 주소서. 경주가 끝나면 면류관을 주실 줄 아옵니다. 끝까지 경주를 마치고 그 면류관을 얻게 하소서.” 인생의 마지막을 바르게 묵상한다면 우리도 다 그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 인생의 성패를 가늠하는 잣대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교만의 싹을 잘라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 뿐이 아니라, 천국을 묵상하는 것도 우리 신앙 생활에 크나 큰 유익을 줍니다. 18세기 미국 인디언의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1718~1747)가 일기에 적은 말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기도를 드리면서 달콤한 순간을 흠뻑 누렸다. 이 때문에 하루 종일 하나님을 향한 다함이 없는 갈망을 느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쌍한 영혼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나 자신이 무력함을 발견한다. 하지만 나는 복되신 하나님께 갈 수 있지 않은가?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서 그분의 영광을 뵈옵는 것이다. 오, 나의 약하고 지친 영혼이 내 아버지 집에 도착할 날을 갈망하나이다!” 1742년 6월 12일, 그가 24살에 쓴 일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영원과 지옥에 대헤사더 묵상할 수 있습니다. 일일이 그 유익을 다 말할 수 없지만, 한 가지만 더 나눈다면, 그것은 교회의 영광에 대한 주제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한 대목 더 소개합니다.
“나의 생각은 오랫동안 친숙해진 주제, 곧 이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가 번영해야 한다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눈물로 기도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십사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시키는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위해 그렇게 많은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이는 내가 참으로 간절히 갈망해온 기도제목이었다. 나는 전부터 성령 부어주시기를 갈망해왔다. 교회의 영광스러운 때가 오기를 소망해왔다.” 그가 29세에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기 2주일 전인 1747년 9월 27일의 일기입니다. 그의 경험에서 보듯이, 교회의 영광을 묵상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 기도할 소망과 힘을 줍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소망과 힘을 잃은 채 교회의 현실에만 가슴 아파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묵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영광에 대한 주의 말씀을 묵상해보십시오. 기도할 힘과 섬길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배우는 모든 기독교 교리는 성도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교리의 모든 주제가 다 교리 묵상의 주제가 될 수 있고, 성도는 거기서 무한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교리 묵상의 열쇠: 풍성한 말씀
우리가 교리의 중심 주제들을 묵상함으로써, 위로와 소망, 평안과 기쁨, 확신과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훈련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훈련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윌리암 베이츠는 말했습니다. “묵상은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이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연기가 나지만, 결국 거룩한 감정의 불길이 치솟아 하나님을 향해 올라갈 것이다.” 젖은 나무에 불 붙이기가 어디 쉽습니까? 연기만 나고 불이 좀체 붙지 않지만, 결국에는 불길이 치솟아 하나님을 향해 올라갈 것입니다.
교리 묵상의 유익을 결정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풍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지만 도무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중단해야 할까요? 그래도 하십시오. 거룩한 말씀이 여러분 안에 충만해지기까지, 계속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면서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게 한 해, 두 해, 세 해 계속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풍성하게 하십시오.
교회에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 설교를 귀히 여기고 놓치지 마십시오. 주일 오후 교리 공부는 성도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므로 충성스럽게 배우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매 주일 듣고 배운 말씀과 교리를 묵상의 주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교리 묵상의 열쇠는 말씀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풍성해질 때, 교리 묵상은 상상할 수 없이 강력해 집니다.

풍성한 말씀이 위험할 때!
그러나 여기 위험 요소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묵상이 없는 배움, 묵상이 없는 들음이 될 때 위험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왓슨은 “다섯 편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 한 편의 설교를 묵상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배움의 열의가 많은 것은 칭찬할 일입니다. 그러나 배움이 묵상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 건조한 신앙은 이상한 방식으로 교만의 고개를 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배우고, 많이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은 좋은 밭과 같이 되는 대신 강퍅한 마음 밭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묵상이 없으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묵상이 깊어지면 교제도 깊어진다.
이 거룩한 묵상은 우리 신앙이 건조해지는 것을 막는 윤활제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깊고 뜨겁게 만들어 줍니다. 이것망니 아닙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여러분 개개인의 묵상이 깊어질 때 교회적으로 일어나게 될 변화 한 가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누겠습니다. 여러분의 묵상이 깊어질 때, 교회 안에서 성도의 참된 사귐도 깊어질 것입니다. 다소 인위적인 사귐의 부자연스러움은, 여러분의 묵상이 깊어지면서, 형제들을 향한 더 깊은 사랑과 함께, 더 깊은 은혜를 나눔으로 바뀔 것입니다. 형식이 아니라, 진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크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드러낼 용기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리 묵상은 단지 우리 자신의 믿음이 개인적으로 성장해가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로 세워가는 거룩한 방편입니다. 오, 주님께서 이런 거룩한 묵상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점점 더 깊고 풍성하게 하여 주사, 교회를 복되게 하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