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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12 - 말씀 위에 선 신앙 (5) - 묵상하기

시편 1:1-2, 에베소서 3: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8-06

말씀내용
말씀 위에 선 신앙05 묵상하기 (시 1:1~2; 엡 3:4)



왜 성경읽기에서 유익을 얻지 못하는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이 말씀은 150편의 기도로 이루어진 시편의 첫번째 진술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처럼 부자, 권력자, 성공한 자가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이 누구냐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먼저 부정적으로 진술됩니다. 그는 악인들, 죄인들, 그리고 오만한 자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꾀, 그들의 길, 그들의 자리가 불편한 사람입니다. 이어서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적극적 진술이 나옵니다. 그것은 정말 의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이 진술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맛봄, 형제와 사람을 사랑함,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 최고로 행복한 삶이 들어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성경을 주야로 읽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그는 성경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밤낮 그 말씀을 묵상합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성경의 진술입니다.
이 잣대에 따르면,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사실 이 진술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묘사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너희가 율법을 사랑해야 하며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가 복 있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라면, 너희의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언제나 그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지는 못할 수 있습니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이 실로 최고의 기쁨이라는 사실도 아는 사람입니다.
시편은 복 있는 사람의 고백으로 넘쳐납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시 63:5?6).” 다윗이 성경을 맛보는 영혼의 만족을 표현한 말입니다. 유다 광야에서 사울을 피하여 도망하는 처지에서 그는 이런 은혜를 맛보고 표현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은혜를 누리는 것이 복 있는 사람 곧 신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신앙과 성숙]이라는 대주제에서 [말씀 위에 선 신앙]이라는 소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하며 그 유익을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를 상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4).” 이것이 사도가 이 서신을 읽는 에베소 성도들이 누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런 은혜를 누리기를 성령님은 바라십니다. 그런데 늘 이런 은혜를 누리고 살아갑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왜 우리는 성경에서 혹은 성경읽기에서 이런 유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상고할 주제입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은 우리의 노력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성령의 조명하심이 풍성하면 인간의 노력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아주 위험한 오해입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은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무효화하거나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조명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해도 말씀의 은혜, 말씀의 맛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유익을 누리지 못한다면, 먼저 이 부분을 점검해야 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총명을 열어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셔야 우리는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적극적 읽기와 수동적 읽기
그러나 또한 우리가 성경에서 유익을 얻으려면, 성경을 잘 읽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책을 읽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적극적 읽기와 수동적 읽기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저자들이 가르치고자 의도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교육이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원어에 대한 지식의 결핍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런 지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핵심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가장 큰 원인은 수동적 읽기 태도에 있습니다. 수동적 읽기는 텔레비전 프로를 보듯이 읽는 태도입니다. 많은 생각이 필요하지 않고 그냥 따라가면 됩니다. 멍하다 웃기면 웃으면 됩니다. 우리는 주의 깊게 텔레비전을 보지 않습니다. 제작자의 의도와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는대로 받고 느끼고 반응합니다. 때로 미디어 비평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저렇게 깊게 볼 수 있구나”하는 탄성이 나옵니다. 물론 우리가 텔레비전까지 그렇게 봐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책 읽기는 다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은 더더욱 다릅니다. 생각을 요구합니다.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인간 저자가 어떤 상황에서 이것을 어떤 의도로 말하려는지도 파악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적극적 읽기입니다.

묵상: 보고 보고 또 보기
적극적 읽기는 묵상과 깊이 연관됩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이 구절을 [우리말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주께서 모든 일에 네게 총명을 주실 것이다.” 사도는 말씀을 읽을 때, 생각하면서 주의 깊게 읽으라고 말합니다. 생각하면서 읽는 적극적 읽기는 묵상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제임스 패커의 말입니다. “묵상은 오늘날 잃어버린 기술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몰라서 통탄할 만큼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우리가 묵상을 몰라서 복 있는 사람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통탄한 일이 아닙니까?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묵상이 없어서 불행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묵상이 없는 신앙 생활은 내용 없는 껍데기이거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형식이기 쉽습니다. 교회 안에서 제자훈련을 받고 각종 프로그램을 이수하지만 삶의 천박함을 벗지 못한다면, 그것은 묵상의 결핍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묵상은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이, 이미 읽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재차 삼차 깊이 생각하는 거룩한 사고 활동입니다. 묵상은 진리가 자신의 삶에 깊이 영향을 미치게 하는 수로를 열어줍니다. 토마스 왓슨은 금광을 발견하고 금을 캐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은 묵상을 하지 않는 신자라고 지적했습니다.
묵상은 동양의 명상과는 아주 다릅니다. 영어로는 동일하게 meditation 이지만, 동양의 명상이 마음을 비우는 활동이라면, 성경의 묵상은 말씀으로 내 생각을 채우는 활동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비운다고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욕(慾)을 비워서 무욕(無慾)의 자리에 이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질 때, 그는 거룩하신 성령의 역사로 거룩해져가는 은혜를 입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묵상의 자세로 읽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냥 얼른 읽어치우는게 아닙니다. 생각하며 주의를 기울여 보고 또 보고 또 보려면 천천히 보는 자세 뿐 아니라 특별한 끈기가 요구됩니다.

루이 아가시
루이 아가시(Louis Agassiz, 1807~1873)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그는 19세기 중반 하버드 대학의 지질학과 동물학과의 교수였습니다.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은, 연구 대상을 오래도록 골똘히 바라보는 습관과 끈기를 아가시 교수로부터 어떻게 배웠는지를 기록했습니다.
곤충을 연구하고 싶다는 제자에게 아가시 교수가 요구한 것은, 연구실에 있는 하스돔이라는 물고기 표본을 지켜보라는 것이었습니다. 10분 후에 다 보았다고 생각한 제자는 아가시 교수를 찾았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30분, 1시간, 또 1시간을 물고기를 뒤집어 보고 돌려보고 얼굴을 보고 뒤에서 아래서 위에서 옆에서 보면서 보냈습니다. 그래도 교수가 나타나지 않자, 그는 손가락을 물고기 입에 넣어 이빨을 만져보고 비늘이 한 줄에 몇 개인지를 세어보는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교수는 나타나지 않자, 그는 물고기를 그려보기로 생각했습니다. 한참이 지나 드디어 아가시 교수가 나타나서 본 것을 설명해달라고 했습니다. 제자의 설명을 들은 아가시 교수는 하스돔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보지 못했다는 실망감을 표현하면서 내일 아침에는 정확한 설명을 해달라고 하고는 다시 떠났습니다. 그는 밤새 하스돔만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3일 동안을 하스돔만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보고 보고 또 본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8개월 동안 하스돔의 모든 종류를 보았고 그 이후에 그가 원하던 곤충학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가시 교수의 제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보고 또 보고 또 보는 것은 헛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연구의 최고의 유익이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한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학문은 첫째가 보는 것이며, 둘째도 보는 것, 셋째도 보는 것이며 거듭해서 다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동물학의 이야기가 신학의 이야기입니다. 이점에서는 같습니다.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빨리 보고 부주의하게 봄으로써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칩니다. 그렇게 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합니다. 아가시 교수의 교훈은 묵상에 대한 좋은 도전입니다.

질문하기
보고 보고 또 보는 것은 생각과 주의를 요합니다. 멍때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려면 생각이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 생각이 자극되지 않으면 모든 것은 그냥 습관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묵상을 하려면 좋은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질문이 생각을 자극하고 우리의 봄을 효과적으로 만듭니다. 여기서 말하는 질문은 단지 우리의 지적 자만을 채우려는 질문이 아닙니다. 겸손한 질문이 필요합니다. 겸손한 질문이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마음으로 던지는 질문입니다.
아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귀납법적 성경공부]라 불리는 성경공부 방법이 있습니다. 귀납법적 성경공부는 결론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접근이 아니라, 성경 본문과 본문을 봄으로써 결론에 이르는 성경공부 방법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에 의해 좌우됩니다.
질문의 종류는 보통 관찰 질문, 해석 질문, 적용 질문이 있고 상관 질문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일단 관찰 질문과 상관 질문만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관찰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또는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오직 본문이 말씀하는 것만을 보아야 합니다. 관찰 질문은 육하원칙에 따른 질문들을 포함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가? 하는 질문의 형식입니다. 특히 이야기체에서 이것은 중요합니다.
상관 질문도 묵상에는 중요합니다. 상관 질문은 특정 진리들이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읽고 묵상하는 본문 안에서뿐 아니라, 다른 본문들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우선 이런 질문들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하신 사실은 당신을 돌보시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아심은 당신을 창조하신 것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그의 가족의 일원으로 삼으신 것은 그가 당신을 돌보신다는 사실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존 파이퍼가 주는 상관질문의 예들은 더 깊고 어렵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6)”고 말하면서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가 날마다 자기를 짓누른다(고후 11:28)고 말할 수 있을까? 바울은 어떻게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고 하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말할 수 있을까? 바울은 어떻게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엡 5:20)”고 말하고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롬 9:2)”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돌려대라고 하시고(마 5:39), 또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 10:23)”고 말씀하셨을까?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언제 피해야 하고 언제 고난을 견디며 다른 뺨을 돌려대야 할까?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하심(출 34:6)”도 사실이고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시 2:12)는 것도 사실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그럴 수 있을까?
이것 뿐이 아닙니다. 존 파이퍼가 제시하는 질문들을 좀 더 소개하겠습니다.
? “죄인들”과 “악인들”은 별개의 다른 집단을 말하는 것인가? 죄와 악함은 다른 것인가? (이것은 오늘 본문 시편 1편에서 유효한 질문입니다.)
?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죄인들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인들 안에 포함되지 않는가?
?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에 어떤 변화가 생겨나서 하나님이 오늘날에는 악인들을 미워하시지 않지만 그때는 미워하셨던 것일까?
? 하나님의 미움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 하나님이 악인들을 미워하신다 했으니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실 가능성은 아예 배제되는 것일까?
? 하나님의 미워하심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 하나님의 미워하심에는 누군가의 악한 마음을 강렬히 혐오하는 감정도 들어있을까?
? 하나님의 미움에는 파괴하려는 뜻도 있을까?
? 파괴하려는 뜻 없이 혐오가 존재할 수 있을까?
?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혐오하는 자들을 그들의 혐오스러운 상태와 하나님께 미움 받는 상태에서 구출하는 것을 목표로 사랑하실 수 있을까?
? 이런 질문들에 답하는 데 도움을 받으려면 어떤 성경 본문을 찾아봐야 할까?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가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들이고 이런 질문들은 본문을 더 선명하게 깊게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줍니다.

공부하기
좋은 질문은 우리의 묵상을 깊게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공부하기입니다. 우리는 보통 ‘공부’하면 부담을 가집니다. 입시 공부에 질렸고 가방 끈의 길이로 사람을 재단하는 문화에 질린 까닭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아니, 예수 믿는데도 공부해야 합니까?” 네, 공부해야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잘 믿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단지 세상의 지혜나 IQ만 높으면 되는게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잠 1:7).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들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고전 2:9~16). 여기에는 영적 지혜가 요구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경외와 겸손한 마음을 다루고 있으며 지적인 예리함보다 경건한 기도가 따르는 연구를 통해 더 깊이 간파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지성만을 의지하고 마치 돼지처럼 더러운 발로 성경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상하지 않게 하고 그들이 가르치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부할 때마다 새겨야 할 말입니다.
물론 공부하는 것이 모두에게 익숙하거나 용이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힘든 분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을 주의 깊게 들어 배울 수 있고, 어려운 것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물어보고 배울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일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스스로 책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공부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가 주관적 해석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주관성은 언제나 객관성의 도움을 입어야 합니다. 물고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물고기의 해부학을 공부할 때, 비로소 오래도록 끈기있게 바라보았던 것들이 “아하!”하는 감격의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공부에 필요한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좋은 성경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많은 번역본이 있지만 크게 둘로 나뉩니다. 원어를 직역한 성경과 의역한 성경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려면 직역한 성경이 우선입니다. [개역개정역]은 직역을 한 성경입니다. 의역 성경으로는 [현대인의성경], [현대어성경], [우리말성경] 등이 있습니다. 영어로 의역한 [메시지]도 우리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의역 성경들은 참고용으로 유익하고 권장할 만 합니다.
영어를 읽을 수 있는 분이면, 영어성경을 병행하여 참고해도 좋습니다. 영어성경 중 직역한 것은, NASB(New American Standard Bible)나 ESV(English Standard Version)를 추천합니다. 의역은 NLT(New Living Translation) 등이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본문을 해석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단어의 의미, 구절이 의미하는 것, 문맥을 살피는 것이 기본입니다. 더 나아가 성경이 기록된 시대의 지리, 문화, 풍습, 저자의 신학 등을 이해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래서 참고 도서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모르는 단어의 의미를 찾을 때는 성경사전이나 성경색인사전(Concordance)이 필요하고, 지리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지도도 필요합니다. 저자의 신학이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석을 읽을 필요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묵상이 객관성을 벗어나서 주관성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단번에 도와주는 스터디 성경도 유익합니다.
언제나 이단이나 사이비의 특성은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역사상 아무도 풀지 못한 새로운 해석이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읽고 묵상한다면, 이런 모든 헛된 기만에 속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너무 큰 부담을 가지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방식으로 점점 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깊이 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졸업이 없는 평생의 과업입니다. 천천히 가십시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50세였던 1533년에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나는 수년 동안 성경을 일년에 두 번씩 읽어왔다. 성경을 크고 강한 나무, 성경 안에 기록된 말씀들을 작은 가지들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가지들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 그리고 그 가지들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열망에 불타올라 모든 가지들을 두드렸다.” 루터는 자신이 말한대로, “많이 길어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마르게 하는 이상한 샘물인 성경”을 끈질기게 두드렸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이 되는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에 반응하는 인격
오늘 우리가 생각한 이 모든 것의 목적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성경을 맛보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대로,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라는 고백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진정성 있는 참된 고백일까요? 그렇다면, 이 고백을 하는 시인의 경험은 동일하게 우리의 경험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이런 욕심은 정말 건강하고 거룩한 욕심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욕심이 아닙니까? 우리도 시인과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우리말성경]은 시편 19:10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는 금보다, 순금보다 더 귀하고 벌집에서 뚝뚝 떨어지는 꿀보다 더 답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고, 감사와 찬송으로, 소망과 기쁨으로, 만족과 사랑으로, 그리고 하나님 경외함으로 채워지고 충만해지는 은혜를 누린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1,5b~6).”
청교도 목사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1620~1686)은 [묵상의 산에 오르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묵상은 일종의 거룩한 고리대금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묵상을 일년 이상 하게 되면 결코 적지 않은 유익을 가져다줄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