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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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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11 - 말씀 위에 선 신앙 (4) - 성경읽기

베드로전서 2: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7-23

말씀내용
말씀 위에 선 신앙04: 성경 읽기 (벧전 2:1~3)


우리는 [신앙과 성숙]이라는 큰 주제 안에서, [말씀 위에 선 신앙]이라는 작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신앙의 토대라고 할 때, 그 어떤 것도 성경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 그 탁월하심을 보고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이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이 성경을 열심히 보겠다고 작정하고 보기만 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심으로써 사탄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우리 마음을 덮은 수건을 벗겨 주셔야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설령 거듭난 신자라고 할지라도, 성령님께서 조명하여 주심으로써 진리를 드러내 주셔야 사람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난 3주 동안에 상고한 말씀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조금 더 들어가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이런 유익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심정으로 성경을 대하고 읽어야 하는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본다고 다 보는게 아닙니다.
본다고 다 보는게 아닙니다. 보는 것과 즐기는 것은 다릅니다. 누구나 눈으로 미술작품을 볼 수는 있지만 모두가 다 그 작품을 즐기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을 나이애가라 폭포로 데려갈 수는 있지만, 폭포의 장관이 아니라 자기 발 밑에 돌아다니는 다람쥐들에 눈을 빼앗기는 아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누구나 음악회에 앉아 소리를 들을 수는 있지만, 모두가 다 소리 이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와 갈릴리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뵈었지만, 모두가 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거나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본 것은 아닙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육성 설교를 들었지만, 모두가 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종종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원하면 성경을 읽을 수 있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영광을 보고 은혜를 받고 그 말씀을 즐거워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맛본 사람만 가지는 욕구 (시 1:1~2; 119:162; 34:8)
이점을 고려할 때,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한 말씀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시편 기자와 함께,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시 119:162)”라고 고백하십니까? 복 있는 사람은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를 덮고 있던 수건이 벗겨져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정금 보다 귀하고 송이꿀 보다 단 것도 맛보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전제한 권면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산 소망의 은혜를 나눕니다. 이 은혜 때문에, 비록 세상에서 많은 고난과 불시험을 당하고 있음에도 성도들은 예수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를 믿음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이것은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으로 거듭나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그 말씀은 세세토록 변함없이 영존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이전의 모든 악독과 기만, 외식과 시기 그리고 모든 비방하는 말을 하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구습들을 벗어버릴 뿐 아니라, 이제는 갓난 아기가 엄마의 젖을 찾고 또 찾는 것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전에는 세상의 성공과 영광에 눈이 멀어 악독하고 속이고 시기하고 비방하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고 살아가게 된 까닭에, 그런 구습들을 행할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3절에서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권면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경험한 자들에게 주는 권면임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시편 34편에서 다윗이 “너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했던 말을 그대로 가지고 온 말씀입니다(시 34:8).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권면합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입니다. 그 젖을 먹으면서 사람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랍니다. 그 젖은, 앞에서 말해온 대로,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세세토록 있는 주의 말씀입니다(벧전 1:23,25). 이 말씀으로 거듭났고 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면, 이제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는 일에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갓난 아기에게 엄마 젖을 먹고 싶어하는 욕구 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게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의무와 복을 누림 사이
이 권면은 단순히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무 이상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듭난 사람에게 주신 욕구는 갓난 아기가 엄마 젖을 찾는 것 같은 욕구입니다. 죽은 아기는 욕구가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영적으로 살았다면 그 욕구로써 너희 살아있음을 보이고 그것을 즐기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의무로써가 아니라 복을 누리는 차원에서 주는 권면입니다. “여러분이 말씀 안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면, 계속해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는 복된 인생을 사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듭난 성도에게 저절로 되는 일이라면, 사도가 이런 권면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말귀를 알아듣지도 못하는 갓난 아기에게 엄마 젖을 사모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능적으로 저절로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거룩한 본능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일이 모든 점에서 정확하게 갓난 아이에게 적용되는 것처럼 적용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 문제: 우리의 죄성과 사탄의 미혹(요일 2:15~17)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성도 안에 내재하는 이유이고, 또 하나는 외부의 적 때문입니다.
먼저 성도 안에 내재하는 이유는 거듭난 성도 안에 남아있는 죄성의 문제입니다. 비록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겨주셨지만, 성도 안에는 여전히 죄성의 요소가 남아 있습니다. 신자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지만, 은혜로 죄를 다스리고 죽이는 삶을 살도록 씨름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게으름과 싸워야 하고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욕구와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남아있는 마음의 완고함?이것은 종종 하나님을 적대하려는 태도로 나타납니다?과 패역함 그리고 냉담함과도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이 싸움을 감당하지 않고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맛보는 일이 저절로 매일 아침과 밤마다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외부의 적인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도록 미혹하는 노력을 쉬지 않습니다. 사탄은 세상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 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보다 세상 영광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요일 2:15~17). 세상에 있는 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거짓된 가치들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한,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려는 욕구가 우리 안에 끓어오를 수 없습니다.

두 가지 방법: 성령님의 도우심과 말씀의 거함(엡 1:17~18; 요일 2:14)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 안의 죄성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 자신의 무능함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본다고 다 보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치고 오늘 읽어야 할 본문을 찾을 때, “내가 성경을 읽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여”라는 말을 들을 만큼, 우리는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눅 24:25). 주님께서 제자들의 눈을 열어 주시자 비로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과 자신들이 만난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기도한 것은 결코 가벼운 기도가 아닙니다(엡 1:17~18). 우리가 이것을 구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았던 시편 기자도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반복적으로 구해야 했습니다. 조금 길지만, 존 라일의 말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렇다면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성령의 도움과 가르침을 구하며 열렬히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파선을 경험하는 암초가 있다. 그들은 성령의 지혜와 가르침을 구하지 않기에 성경을 봐도 깜깜할 뿐이고 그 안에서 어떤 것도 얻지 못한다. 성령께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총명을 열어 주셨던 것처럼 “총명을 열어 달라고” 간청해야 한다. 사람들을 감동하여 성경을 쓰게 하신 주 하나님이 그 책의 열쇠를 쥐고 계시고, 그분만이 그것을 유익하게 이해할 수 있는 힘을 주실 수 있다. 시편의 어느 시에서 다윗은 아홉 번이나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부르짖는다. 같은 시에서 그는 다섯 번이나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한다. 존 오웬이 잘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신성한 빛이 있다. 그러나 인간들의 눈은 덮개와 수건으로 가려져 있어서 그 빛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수건을 벗기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이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다룰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 문제, 사탄의 미혹의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일서 2:14 하반절입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순환논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결국 세상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사탄의 거짓말은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만 대적하고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축적되고 충만하게 거하게 될 때, 여러분은 마귀가 주는 세상의 유혹 앞에서 더 잘 이기고, 흔들리지 않는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고 어린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게 해야 하는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성경을 읽지마십시오(요5:42,44;눅11:43;막11:39;눅16:14)
이 두 가지 문제에 공히 넘어졌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비교가 안 되게 성경 읽기에 삶을 바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잘못 읽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성경 원어에 대한 지식, 성경해석을 위한 신학과 기타 주변 지식의 결핍이 이들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죄를 사랑하는 잘못된 욕구, 즉 죄성이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되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을 보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영적 결함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대신 그들은 자기들의 영광을 사랑하고 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보다 사탄이 제시하는 세상의 영광이 더 커보였고 거기에 그들은 굴복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하시면서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고 질책하셨습니다(요 5:42,44). 그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사람들의 문안 받는 것을 기뻐했고(눅 11:43; 막 11:39), 돈을 좋아했습니다(눅 16:14). 바로 이런 것이 늘 성경을 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바리새인의 성경읽기를 따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느낌 보다 바른 이해를 추구하십시오(벧전 1:10~11; 시 119:18).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고 말할 때, 자칫 오해할 수 있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위험하고도 치명적 것인데,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 느끼기만 하려는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잘 읽기 위해서는 좋은 주석과 사전을 구비하여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뿐 아니라 설교를 들을 때에도, 감정만으로 접근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아들어야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감정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어떤 수고도 없이 성령님의 조명하심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던 선지자들도, 자기들이 받은 말씀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상고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합니다(벧전 1:10~11).
시편 기자는 분명히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구했지만(시 119:18), 이것이 그 말씀의 의미를 살피고 연구하는 수고를 무용하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도가 주의 깊은 연구와 해석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바른 해석은 성령님의 조명하시는 은혜와 함께, 우리의 수고를 요구합니다. 존 오웬의 말입니다. “빛이 감정을 앞서는 곳에서 그 빛은 결국 형식주의나 무신론으로 끝난다. 감정이 빛 보다 앞서 나가면 미신의 수렁에 빠지고 이미지와 그림 등에 매이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지성주의와 감정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잘 견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맛보았던 영혼의 큰 기쁨과 환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알고 싶어하십시오.
또 하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바른 이해를 추구할 때 주의할 것은, 말씀 한 구절, 한 단어의 의미를 알려는 욕구에, 하나님 자신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묻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슨 교훈을 얻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본문을 통해서, 또 이 본문의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게 어떤 하나님으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고 알리시기를 바라시는가를 생각하고 궁구해야 합니다. 단지, 교훈적 내용이나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내용만을 얻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알리시고 당신의 영광과 선하심과 탁월하심을 자녀들에게 보이시는 책입니다. 이것을 놓친 채, 우리의 성경읽기와 묵상이 윤리적 교훈과 적용거리들을 찾는 방식이 되는 것은 심히 위험한 일이고 성경을 오용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주님을 더 알기를 원합니다”라고 은혜를 간구하면서 그 말씀을 풀어 그 뜻을 밝혀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 그 선하심과 영광을 맛 보아 아는 것이 신앙의 열쇠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알 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만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성령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이점에서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는 권면을 이해해야 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보는 것, 이것이 우리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할 때, 주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적용: "이 갈망, 이 욕구를 주시옵소서."
오늘 말씀을 적용적 차원에서 정리하자면, 우리는 세 가지 선택을 마주하게 됩니다.
첫째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과 탁월하심을 맛보는 길입니다. 이 길은 참된 은혜를 누리고 최고의 만족과 행복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둘째는 바리새인들처럼 성경을 읽는 길입니다. 이것은 나름 어느 정도의 성취감을 주기는 하겠지만 결국 교만함과 자기의로 충만해지는 길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길은 계속해서 성경을 읽지 않고 살아가는 길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하면서도 오래 교회를 다닐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순간 순간 육신의 편안함을 주겠지만, 아버지의 사랑이 아닌 세상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고 겸손함 대신 영적 무지와 비참함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이 지혜롭게 선택만 하시면 됩니다”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과 결정을 잘 내린다고 해도, 우리는 그 선택과 결정을 따라 살 능력이 없기 때문이고, 심지어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는 이 선택과 결정 조차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으로는 어느 길이 옳은지,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 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욕구는 성령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지 않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성경을 읽고 싶은 생각 조차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 주님! 제게 성경을 읽고 싶은 욕구,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맛보고 싶어하는 갈망을 주옵소서. 어린 아기들이 엄마 젖을 사모하듯이 그렇게 주의 말씀을 사모하도록 제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말씀을 펴서 읽으십시오. 매일, 매순간 우리 안의 죄성을 거부하고 세상 영광에 빠지게 하는 마귀의 유혹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펼치십시오. 이 길 위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