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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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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9 - 말씀 위에 선 신앙 (2) - 성경과 성령님

고린도후서 4:3-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7-09

말씀내용
성경과 성령님(고후 4:3~6)


성경의 궁극적 목적: 하나님의 영광
지난 주일, 우리는 성경이 우리 신앙 성장의 토대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식과 집과 모든 것을 다 앗아가실지라도 성경만은 제발 거두어가시지 말라고 탄원한 존 로저스 목사님의 설교를 기억하십니까? 그만큼 성경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신앙과 교회와 목회에서 제가 가장 강조해 온 것이 성경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경 없이 신앙 없고, 신앙 성장도 없습니다. 성경 없이 교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낳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끌어갑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신앙과 교회의 토대입니다. 이 성경은 어떤 특별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철학이나 사상이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정확무오하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할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성경의 궁극적 목적, 용도가 과연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왜 성경을 읽으십니까? 설교를 전하고 듣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성장을 위한 것입니까? 성경적 교회로 성장해가기 위함입니까? 우리가 매일 맥체인 성경 읽기표를 따라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궁극적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냥 1독하고 2독하는 신앙 경력 증명이 목적입니까? 아니면 신앙의 원리들을 터득하는 것입니까? 교회의 일꾼과 지도자가 되기 위함입니까?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 입니까? 무엇이 성경의 궁극적 목적이고 용도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과 구별하여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는 어떤 목적을 상정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당신의 언약 백성에게 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알리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자신을 알리심으로써 무엇을 기대하시는 것입니까? 그 궁극적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견할 다른 궁극적 목적은 없습니다. 성경의 궁극적 목적, 궁극적 용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
그러면 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말해보겠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십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말은 어떤 분들에게는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이런 표현을 유난히 많이 사용했던 사람 중에 18세기의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 독립 이전, 현재의 미국 동부 보스턴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그곳은 매우 종교적이고 종교에 친숙한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표현은 당시 많은 교인에게 당혹감 내지는 심지어 반감까지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몰랐기 때문이고 그것을 스스로 경험한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4절은 불신자들의 영적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신인 사탄이 불신자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그들 심령 속에 비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어디에 드러납니까? 복음 안에 드러납니다. 복음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는 곧 성경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까닭은 사탄이 심령을 혼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는 그 얼굴에 수건이 덮여있기 때문이라고 표현됩니다(고후 3:14~16). 수건이 덮여 있으니 아무리 빛나는 광채도 볼 수 없고, 그 광채가 그들의 심령에 비출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6절에서 사도는, 그렇게 심령이 가려졌던 불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지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그 마음에 비추신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이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 하나님은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하시니 빛이 생겼던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능력의 말씀으로, 혼미한 자를 향하여 “빛이 비추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때 그를 덮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고, 그를 혼미하게 하던 사탄의 역사가 물러가고 그가 드디어 복음 안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영광, 즉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일어난 일인지 5절이 부연합니다.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심과 예수를 위하여 자신이 종이 된 것을 전파했다고 말합니다. 영적 눈이 가리어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없던 불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데 사도의 복음 전파가 그 수단이고 도구가 된 것입니다. 사도는 복음을 전했고 그때 복음을 듣는 자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고 하셨으며 그 순간 영적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영적 맹인이 눈을 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물론 불신자는 전파되는 복음을 듣거나 설교를 듣거나 혹 성경을 읽을 때, 그 자체가 말하는 내용을 이성으로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선하심 그리고 위엄과 탁월한 영광을 보거나 맛보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구원얻는 믿음은 그저 복음과 성경이 묘사하는 내용의 사실성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과 영광과 매력을 지각하게 될 때 발생합니다. 이것을 영의 눈으로 보고 경험한 사람은 결코 이전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는 완전히 새로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신비로와서 말로 다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머리로 알던 하나님을 가슴으로 만나고 가슴으로 만난 하나님을 한 없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죄인이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리고 독단적으로 행하시는 은혜로운 역사입니다. 중생은 성령님의 선물입니다. 영적 이해의 눈이 열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도덕적 아름다움과 선하심, 영광과 지고한 탁월함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
여러분,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 둘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고 사도라 불렸습니다(마 10:2~4). 주님께서는 유다가 당신을 팔 것을 아셨습니다(요 6:64). 유다는 여러 제자의 신임을 받았고 스마트한 사람이기에 돈궤를 맡은 회계가 되었을 것입니다(요 12:6). 그러나 성경은 그가 돈을 사랑했고(마 26:15) 거짓말장이이며(눅 22:48), 맡은 돈궤에서 돈을 훔치는 도둑이고(요 12:6) 배신자라고 말합니다(막 14:10). 그는 베드로와 같이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눈먼 자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눈을 열어 보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 영광에 매혹되어 세상의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유다는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눈이 떠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중생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하는 사기꾼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중생을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을 수 있지만, 성경은 그가 탐심에 눈이 멀었으며 자신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존 파이퍼의 표현대로, 유다는 베드로와 똑같이 예수님을 보았으나 그가 본 예수님은 불가항력적으로 영광스럽고 아름다우시며 모든 만족을 주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눈이 멀어 하나님의 영광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도리어 빛을 미워했습니다(요 3:19~20).
이것이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입니다. 한 사람은 눈이 열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고, 한 사람은 눈이 멀어 돈 밖에는 보이는게 없었습니다. 그들이 동일하게 예수님을 보았듯이, 우리는 동일하게 성경을 보고 성경을 듣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가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두렵고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내적 증언, 조명(illumination)
자, 그렇다면 중생한 사람은 언제나 성경을 열면 거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선하심 그리고 그 탁월하신 영광을 보는 것일까요?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삶은 매일이 천국일 것이고, 그들은 매일 성경을 애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언제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감당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은혜를 받지만 어느 순간에는 정말 무미건조하게 그 말씀을 대하는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왜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성경을 보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어떤 조건이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요? 그 조건은 인간이 가지고 조성하는 조건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과 관련된 조건일까요?
눈에서 수건이 벗겨진 중생한 신자라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은 자동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은혜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성령님의 조명, 또는 성령님의 내적 증언이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것은, 중생한 성도가 자동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것을 영감(inspiration)과 구별하여 조명(illumination)이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의 조명은 성경에 무언가를 추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명은 성경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그 마음을 밝게 비추어 말씀을 마음 깊이 수용하게 하는 성령님의 은혜로운 역사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점에서 뭔가 부족해서 성령님의 조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조명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거나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미 자체로 완전하고 충족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보인 반응 여하에 상관없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과 부족함 때문에 성령님의 조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존 머레이가 “조명은 인지적 측면의 중생”이라고 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거듭났어도 성령님이 조명하실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없던 새로운 인식의 능력으로 성경을 보게 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의 몇 구절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시편 119:18입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또 고린도전서 2:12~14을 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 성경의 진리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한 구절 더 보면, 에베소서 1:17~19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의 마음 눈을 밝혀 주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알도록,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과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도록 말입니다. 왜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까? 성령님의 조명이 없이 우리가 스스로의 이성과 지적 능력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식에서 확신으로!
성령님의 조명이 없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단 1%의 확신에도 이를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지만,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고 그 영광을 알지 못했습니다(요 5:39; 마 2:4~6). 성령님의 조명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 하나님의 확실한 자기 계시라는 것을 확신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의 조명이 없어도 성경을 공부하고 지식으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학 논문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조명이 있을 때, 그 지식이 하나님을 향한 확신있는 신뢰가 됩니다. 인간은 자연적 능력으로 성경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확신에 이르며 기쁨이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지식이 무용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의 조명은 성경을 연구하는 우리의 열심과 지식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이 지식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원천이 됩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되고, 하나님을 향한 확신있는 신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님의 내적 증언, 즉 조명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설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목사가 훌륭하고 바른 설교를 하는 것은 목사 자신의 능력으로 되는 일일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목사 자신에게만이 아닙니다. 설교를 듣는 회중에게도 성령님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될 때, 설교를 하는 목사와 듣는 회중 모두가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충만한 설교와 예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은혜를 늘 구하셔야 합니다.
이점에서 사도 바울이 서신서에 쓴 구절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5~6입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정말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성령님의 조명이 가져오는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2:4~5도 보지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성령님의 조명하심은 확고한 확신에 이르게 합니다.

교훈적 적용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보십니까?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보기를 원하십니까? 이것은 어떻게 하면 커피를 잘 만들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하면 주식 투자를 잘 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보는 것,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보는 것은 우리 인생에 가장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일은 우리가 영원을 보내게 될 곳을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교회에서 평생의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선하심과 영광을 보는가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것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은혜요 특권이며, 거듭난 자녀에게만 주시는 성령님의 조명하시는 은혜로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시편 기자처럼, 눈을 열어 성경에서 놀라운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시 119:18). 또 바울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듯이, 마음 눈을 밝혀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기를 구하고 또 구하십시오(엡 1:17). 우리 인생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성령님께서 복음의 말씀을 조명해주신 1세기의 성도들은 고난 속에서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하나님께서 이런 충만한 은혜와 기쁨과 영광을 허락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이를 위해 부정적인 것 하나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탐욕을 피하십시오. 탐욕은 피조물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고 우상숭배입니다(골 3:5). 유다가 보여준 것이 그것입니다. 다른 사도들과 같이 예수님을 따랐던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탐욕이었습니다. 빛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고 탐욕이 마음에 가득한 그는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도덕적 완전하심과 선하심과 영광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벧샬롬의 지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중생의 확실한 은혜와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허락하셔서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선하심과 그 탁월한 영광을 보게 하시고 그 영광에 우리를 취하게 하시고 만족하게 하시며 그 아름답고 선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복된 역사를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