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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8 - 말씀 위에 선 신앙 (1) - 신앙의 토대, 성경

디모데후서 3:13-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7-02

말씀내용
신앙의 토대, 성경 (딤후 3:13~17)
지난 주일까지 우리는 [신앙과 성숙]이라는 대주제 아래서 <관계와 공동체>라는 소주제로 말씀을 상고해왔는데, 오늘부터는 [말씀 위에 선 신앙]이라는 소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우리 신앙과 성숙이 말씀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가를 살피고, 말씀으로부터 최고의 유익을 얻는 길을 생각해볼 것입니다. 이런 소주제를 다룰 때, 우리가 숲 전체를 놓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신앙과 성숙]이라는 주제의 전체 그림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앙은 저절로 생기고 자라지 않습니다. 특별히 신앙이 성장하는데는 다섯 가지 핵심 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 고난 그리고 공동체와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다섯 가지 핵심 요인을 고려하면서 [신앙과 성숙]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전체 그림을 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대상과 내용은 계시에 의존한다(14)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이것은 믿음의 대상을 지시하는 말입니다. 이 말로는 기독교 신앙이 온전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과 함께 믿음의 내용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는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떤 속성을 가지시며 무엇을 하셨고 하시며 하실 것인가 하는 내용을 포함합니다. 이런 내용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허언에 불과할 것입니다. 신앙의 내용은 오직 성경에서만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을 계시, 하나님의 특별 계시라고 부릅니다. 계시라는 말은 ‘열어 보인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기 위해서 열어 보여주신 책입니다. 자연 만물에도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솜씨가 명백히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계시입니다(롬 1:20). 이것을 일반 계시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일반 계시로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지식을 얻을 수 없고 더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에 관한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자연 만물은 하나님을 부인한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 날에 핑계를 댈 수 없게 하는 근거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아는 지식은 오직 특별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충분하게 알 수 있도록 풍성하게 당신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하고 절대적으로 그 계시에 의존해야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전적으로 성경의 계시에 의존해야 하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어떤 체험이나 은사, 그 어떤 탁월함도 성경 계시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신앙은 절대적으로 성경에서 시작하고 성경으로 나아가며 성경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이며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이런 권면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사도는 3장에서 말세의 징조를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런 속임수가 많아지고 심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차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제까지 배운 것 그리고 확실하게 믿는 믿음 안에 늘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사도는 단순히 “믿음 안에 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왜 배운 것과 확신하는 것 안에 거해야 합니까? 신앙이 배울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 신앙이 배워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믿음을 주실 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써 믿음을 주십니다. 야고보서 1:18과 베드로전서 1:23을 차례로 보지요.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10:17도 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성경은 분명하게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의 기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도는 계시의 모든 말씀을 배움으로써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가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해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신앙도 자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 지식의 양이 신앙의 질을 보장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식 없는 신앙은 불안하기 그지 없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악한 자들의 속임에서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여길 근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계속해서 머물러야 할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오늘날 신천지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이단들이 창궐하는 것은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무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피상성에 머무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피상적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히 우리 자신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보게 되고, 자기 영혼의 깊은 곳에 숨겨진 죄를 보게 됩니다. 이전에는 자기가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여기던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자기의라는 죄라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신자는 피상적인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참으로 신앙이 성숙한 신자는 삶에 대해서, 자신과 타인들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서 나오는 지식입니다. 말씀과 기도, 고난 그리고 공동체와 세월이라는 복합적 요소들과 함께 말입니다.

성화: 신앙의 성장(요 17:17)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그 밤에 기도하신 내용을 요한복음 17장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주님은 이렇게 제자들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 곧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진리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성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주요한 도구가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의 말씀도 동일합니다. 성경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줍니다(17).

성경 지식의 축적(15a)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15절에 “또 여러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는 부분입니다. 디모데에게는 좋은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그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에 의해 신앙의 내용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하셨고 하시는지, 인간은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언급했습니다.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물론 사도 바울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도 바울을 만나기 전, 이미 가정에서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서 신앙을 배워왔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축적된 신앙의 지식이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처럼 대단한 신앙의 체험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겠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놀랍도록 신실하게 감당한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린 시절부터 축적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세상의 무가치한 지식들이 어린 아이들의 생각 속에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들이 축적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부모들에게 명하십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어린 시절에 말씀을 제대로 배우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찬송가 199장의 가사를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자식들로 하여금 세상에 그 어떤 호사보다 이것을 누리게 할 수 있다면, 그 부모는 성공한 부모가 아니겠습니까? 현재의 부모님들, 그리고 장래의 부모가 되실 모든 분들, 이것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신앙은 이 말씀과 무관하게 형성되고 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본문 15절 하반절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부모가 자녀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르쳐 자녀들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도록 준비시킬 수는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 세대가 성장해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축적되는 은혜를 경험하는 것보다 복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생각에 머물어 사상이 되고, 그 사상이 그들의 행동과 태도를 낳고 그것이 습관을 그리고 그 습관이 다시 인격을 낳게 될 때, 그들을 통해서 부요함을 경험하게 될 교회와 세상은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말씀의 지식이 축적되는 것은 신앙의 형성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성경의 4가지 기능: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함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신자의 신앙과 관련하여 말씀의 기능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교훈’은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교회에서 강단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형성하고 결정하는 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일 뿐 아니라 또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가르침은 탁월한 목사의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강단의 타락의 조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대신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중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에 열광하고 그 말에 아멘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곧 교회 타락의 징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축적되어 있는 사람들은 분별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았고 읽는 사람이라면 분별할 것입니다. 말씀이 없는 자들만이 사람의 말에 열광하고 거짓 교사, 거짓 목사들을 추종하게 됩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 입니다. 가르침은 중요합니다. 그 가르침은 모두 성경에서 나와야 합니다. 종교 영역과 생활 영역 중 종교 영역에서만 성경이 유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경은 유익합니다.
두번째로 ‘책망’입니다. ‘책망’은 개인적으로나 공개적으로 죄를 드러내 회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라는 말씀이 이것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의 책망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회개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사용하셔서 성령님께서 죄를 죄로 인식하게 하실 때, 우리는 회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두번째 기능, 책망입니다.
세번째는 ‘바르게 함’입니다. 이 말의 원의미는 ‘똑바로 선다’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똑바로 서기 위해서 말씀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원리에 서서 바르게 행동하지 않을 때, 책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르게 서도록 교정해주는 것이 따라야 합니다. 말씀으로 책망을 받은 뒤에 어떻게 해야 바르게 서는 것인지 도와주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은 우리를 책망하고 바르게 서게 하는데 유익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의로 교육하기’에도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던 사람이 잘못된 길을 걷게 되므로 책망을 받고 교정 즉 바르게 함도 받았습니다. 이제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이제 바른 궤도에 서서 옳은 길을 가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교육한다는 말은 앞에서 말한 교훈과는 좀 다릅니다. 이것은 가르침을 포함하지만 그보다 더 포괄적 개념입니다. ‘교육한다’는 말은 본래 자녀양육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가 그저 가르침만 주지는 않습니다. 징계도 하고 훈련도 시킵니다. 이것이 교육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십니까? 그 말씀이 사람을 훈련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냅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고 그 의로움 안에서 살아가도록 그를 길러냅니다. 성경이 그 일을 합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그리고 모든 성경(Tota Scriptura)!
이런 방식으로 성경은 죄인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도록 하고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의 길을 걷도록 훈련을 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성경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15). 세상에 어떤 책도 성경처럼 절대적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 수 있는 책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은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의 사상이나 전반적인 내용이 하나님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던 저자들의 사상에 영감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전하시려는 메시지를 쓰게 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신 것은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사상 보다도, 성경의 모든 본문, 모든 기록, 모든 글자가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바울 사도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말씀할 때, 의미한 것이 이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구분해보려는 모든 어리석은 시도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이 결정한다는 교만함으로 성경을 조각내는 결과만 초래할 뿐입니다. 고리타분한 성경으로 부족해서 좀 더 새로운 사상이나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성경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겸비하게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의 모토를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말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성경!’ 혹은 ‘전체 성경!’입니다. 자기가 선호하는 어떤 성경의 부분이나 성경구절 몇 개가 아니라,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하고 성경 전체의 진리에 붙잡혀야 하고, 성경 전체의 진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여러분에게 교리를 가르침과 동시에 성경을 1년에 최소한 한 번 이상 읽으실 수 있도록 맥체인 성경읽기표를 사용해서 성경을 읽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 강해도 가능하면 주일과 수요일에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교차적으로 하는 것도 여러분이 성경을 전체적으로 알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회에서 맥체인 읽기표를 따라 간단하지만 성경 한 장씩 상고하고, 참석하지 못한 모든 교우들이 그 말씀을 묵상하도록 돕기 위해서 카톡으로 매일 나눕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정상적인 위치를 가지게 된다면, 교단, 교파, 또는 어느 목사로부터 가르침을 받는가에 따라서 그토록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토록 치우치고 균형을 잃어버린 천박한 신자들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런 교인들이 그토록 많은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성경이 그들의 믿음을 형성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말을 무분별하게 따라가는 신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목사가 여러분의 신앙을 자라게 하고 신앙을 지켜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헤어지는 자리에서 장로들에게 한 말은 참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20:27~32을 읽겠습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장로들을 교회의 감독자로 세우셨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나운 이리가 교회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말씀은 ‘여러분 중에서도’ 사나운 이리처럼 양떼를 헤치는 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비록 장로와 감독으로 세우셨으나 그들은 사람이었고 그들 중에는 어그러지는 자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는 마귀였고,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하나는 이단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장로들에게 교회를 맡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32절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는 교회를, 심지어 장로들도 주님과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맡긴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이 장로들을, 그리고 교회를 능히 든든히 세우고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실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사랑하는 영적 아들이고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남기고 싶은 유언의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듭니다. 그리고 성경이 교회를 세웁니다.

“제발 성경만은 거두어가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다면 성경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면에서 역사상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우리보다 더 이 말씀을 믿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빼앗아가면 기독교는 고사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소련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북한에서 공산정권 지도자들은 신자들로부터 성경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성경을 얻기 위해서 생명을 걸곤 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성경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소중함을 모르는 것일까요? 우리 집에 쌓여있는 성경책이 우리 신앙을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여러분에게 정말 소중합니까?
한 가지 인상적인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고 마치겠습니다. 17세기 영국의 탁월한 청교도 설교가였던 존 로저스(John Rogers)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는 성경을 주제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인들이 성경을 등한시하는 것을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의 1인칭 화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너희에게 나의 성경을 맡겨 주었다.그러나 너희는 성경을 경시하였다. 성경은 먼지와 거미줄에 덮여 있고 너희는 성경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왔다. 나의 성경을 그렇게 사용한단 말이냐? 그렇다면 내 성경을 더 이상 갖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로저스 목사는 성경책을 들고 퇴장하려는 듯 하더니 갑자기 돌아서서 회중이 하나님께 탄원하는 듯이 무릎을 꿇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셔도 좋으니 성경만은 가져가지 마십시오. 우리의 자녀들을 죽이십시오. 우리의 집을 불태우십시오. 우리의 재산을 몰수하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성경만은 남겨 두십시오. 제발 성경만은 거두어가지 말아주십시오.”
로저스 목사는 다시 하나님의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정말 그러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조금 더 기회를 주마. 여기 너희를 위한 나의 성경이 있다. 나는 너희가 내 성경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볼 것이다. 너희가 과연 성경을 더 사랑하고 그 말씀에 따라 더욱 더 순종하여 살 것인지 지켜보겠노라.”
그날 하나님께서는 그 회중 가운데 큰 은혜를 베푸셨다고 전해집니다. 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우리 벧샬롬의 회중 가운데 그런 은혜, 성경을 사랑하는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 성경을 사랑하는 교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