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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7 - 관계와 공동체 (6) - 서로 지켜주기

히브리서 12:14-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6-25

말씀내용
서로 지켜주기(히 12:14~16)
우리는 지난 주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라는 성경의 권면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격려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저 형제, 저 자매가 사랑과 선행을 잘 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연구하여 격려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심히 다투는 사람들이 서로 물러서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물러서지 말고 열심히 몰아붙이는 심정으로 격려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라는 말씀이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물론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나는 격려한다고 했는데, 도리어 무리수를 둠으로써 사람을 낙심케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모이는 것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따라 행하지 말고 열심히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대적이 있다 (엡 6:10~20; 벧전 5:8~9; 마 6:9)
오늘은 이어서 히브리서의 한 말씀을 더 상고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신자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돌보고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맨땅에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존재를 말하고 있고, 모든 신자는 사탄의 타깃이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사탄이 신자에게서 하고자 하는 것은 그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를 허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의 결론부에서 마귀와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것을 권면했습니다(엡 6:10이하). 또 사도 베드로도 성도들을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벧전 5:8~9).” 신앙은 그저 열심히 말씀읽고 기도하면 된다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늘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약자를 물어 삼키려고 두루 다니고 살피고 있으므로, 정신을 차리고 그를 대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구하라고 하셨습니다(마 6:13). 왜 우리가 이것을 매일 구해야 합니까? 우리의 기도에서 왜 이것이 빠지지 않고 구해야 할 중요한 기도의 제목입니까? 그만큼 우리가 매일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유혹에 직면하여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드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모두 경험한 바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늘 구해야 합니다.
신앙성장의 영역에는 대적이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해도, 우리가 자는 사이에, 우리가 한눈 파는 사이에 가만히 와서 우리가 수고하여 쌓아놓은 것을 무너뜨리는 존재가 있습니다. 성경 특별히 신약의 서신서에 나오는 많은 권면은 이런 전제를 안고 주어지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게 장로가 되라.
이것이 성도들이 서로를 돌보고 지켜주어야 할 이유입니다. 16절 맨 뒤에 ‘살피라’는 단어를 보십시오. 이 단어는 원어성경에는 15절 첫 단어로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 말과 헬라어의 문장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데, 헬라어에서는 성경 기자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처음부터 분명합니다. 살펴야 합니다. 살핀다는 이 단어의 원의미는 ‘돌보다, 지키다, 감독하다’는 의미입니다. 신약성경에 장로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감독의 직분을 언급할 때, 감독이라는 단어가 이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즉, ‘살피라’는 말은 성도가 서로에게 감독 직분, 즉 장로 직분의 책임을 지라는 말입니다. 물론 모두가 다 장로 직분을 가진 자라는 말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성도라면 서로에게 돌보고 살피고 지켜주고 감독하는 책임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창 4:9).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뒤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가인이 대답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가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것이 죄인의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죄를 진 인류는 기본적으로 이런 죄성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로 거듭난 성도들은 비로소 이 죄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서로를 돌보고 지키는 책임을 얻게 됩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라.
성도가 서로에게 장로가 된다고 할 때, 무엇을 살피고 지켜보아야 합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요소이고, 하나는 부정적 요소입니다. 먼저 14절에서 긍정적 요소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가 추구해야 하는 것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입니다. 화평함은 특별히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고 거룩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와 좋은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자기 성을 쌓는 일에 집중하는 삶, 자기 횃불을 밝혀 인생의 어둠을 밝혀보려는 사람, 자신의 모든 약함을 회칠함으로써 위장하는 사람, 하나님이 아닌 터진 웅덩이를 파는 인생은 결국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참된 결속의 관계 속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화평함 뿐 아니라, 성도는 거룩함을 추구하라는 권고를 듣습니다. 이 단어는 거룩함 자체라기 보다 거룩하게 되는 것 즉 성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마 5:8). 구원받은 성도가 거룩함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싸우는 삶을 사는 것은 그가 늘 하나님을 뵈옵는 은혜를 누리는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 여러분이 얻고자 힘쓰고 애쓰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하십시오.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뵙는 은혜를 누립니다.
14절에 사용된 ‘따르라’는 말은 우리 말에서는 약간 수동적인 어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가장 많은 경우에 ‘박해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령, 사도행전 22:4에서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할 때 ‘박해하여’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지난 주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격려하다’라는 단어처럼 아주 격렬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해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에 비하면 절반 정도의 용례가 ‘추구하다, 따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도 그 의미는 ‘싸운다, 싸우듯이 힘쓴다’는 의미가 깔려있습니다. 14절은 한가하게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라서 살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가 성도답게 살려면, 아니 너희가 주님을 보고 살려면, 더 나아가서 너희가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일이 없으려면 화평함과 거룩함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15절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라고 표현할 때, 그 의미는 에서와 같이 결국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성도에게 취사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자라면, 화평함과 거룩함을 얻기 위해서 힘써 싸우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화평의 공동체를 이루어가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공동체를 떠난 신앙의 성장은 없습니다.

쓴 뿌리를 살피라.
또 하나 히브리서 기자가 살피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적인 면입니다. 15~16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고 합니다. 에서같은 사람이 공동체 안에 나오지 않도록 살피고 서로를 지켜주라는 말입니다. 에서는 육신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린 사람입니다. 히브리서가 쓰여지던 당시 교회 특별히 히브리 출신의 그리스도인은 유대사회에서 큰 박해를 받았고 이로 말미암아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버리는 배교자들이 적잖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쓰여진 배경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에서와 같은 자가 없도록 살피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듣고 알았다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간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팥죽 한 그릇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장자권을 팔아버린 망령된 에서와 다르지 않은 자들입니다. 여기서 ‘망령되다’고 표현한 말의 원의미는 ‘불경하다, 세속적/세상적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세상 것을 사랑해서 영적인 것을 버리는 태도와 행위입니다. 야고보서는 이 구절과 맥을 같이 하여 이렇게 경고합니다.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b).” 그래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15절에서 기자는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도록 살피라고 합니다. 쓴 뿌리는 말 그대로 자라기 시작하면 교회 공동체 안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로 말미암아 넘어지고 더럽혀지게 될 것입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이 쓴 뿌리를 만드는 독초를 교회 공동체 안에 심어놓는 일입니다. 아마 ‘쓴 뿌리’라는 말은 구약 신명기 29장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29:18~19을 보지요.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면서 한 말입니다. 독초와 쑥의 뿌리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우상을 섬기면서도 자기들은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교회라는 언약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 쓴 뿌리가 생깁니까? 은혜를 받지 못할 때 생깁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우리의 심령은 무뎌지고 잡초와 독초가 무성하고 심령 속으로는 쓴 뿌리가 자라나게 됩니다. 그런데도 신명기에서 모세가 말씀한대로 “나는 괜찮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쓴 뿌리가 자라나게 되면 많은 사람에게 악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많은 사람이 그 영향을 받지 않도록 서로를 지켜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가 공동체에 가득하게 하고 많은 사람을 배도로 이끌어 부정하게 할 쓴 뿌리가 자라지 못하도록 늘 살펴보고 서로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쓴 뿌리를 살펴야 합니다. 쓴 뿌리가 내 심령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제일 먼저 살펴야 하고, 내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의 심령 속에서 쓴 뿌리가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고 그들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주를 보는 공동체
히브리서 기자는 12장을 시작하면서 모든 성도를 경주자에 비유하여 말했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b).” 우리는 이런 경주자의 마음으로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마치 경찰차가 범인의 차를 추격하듯이, 그렇게 화평함과 거룩함을 잡기 위해서 따라붙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공동체라는 환경에서 주어진 권면입니다. 그래서 이 격렬한 추구는 혹시 형제들 중에 은혜 받지 못하는 자가 있고 또 그중에는 쓴 뿌리가 나서 나중에 공동체에 큰 악영향을 미칠 요소가 있는지, 에서처럼 불경하게 하나님의 은헤에서 떨어져나가는 자가 없도록 서로를 살피고 돌보고 지켜주는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서로를 지켜보고 지켜주는 가운데,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서로를 지켜주는 일이 없이는 화평함과 거룩함도 없을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14절 하반절에 말씀한대로, ‘주를 보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자는 이와 같이 더 큰 은혜를 받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은혜를 받지 못할 때 그나마 있는 은혜도 빼앗기게 됩니다(마 13:12). 주를 본다는 것도 개인적 차원으로 주를 보고 은혜를 누린다는 차원의 이야기를 넘어, 더불어 함께 주를 보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는 공동체, 그런 공동체는 그 지체들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싸우듯이 추구하는 공동체입니다. 오, 주여! 저희에게 그런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