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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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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6 - 관계와 공동체 (5) - 서로 격려하기

히브리서 10:24-2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6-18

말씀내용
서로 격려하기 (히 10:24~25)


우리는 신앙과 성숙이라는 큰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비전트립을 전후하여 최근 3주 동안 이 주제를 잠시 떠났다가 오늘 다시 이 주제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큰 주제 아래서 우리는 ‘관계와 공동체’라는 작은 주제를 4차례 다루면서,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어떤 방식으로 공동체의 결속을 저해하는지를 분석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죄와 죄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렇게 하실 때, 우리는 “아,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형상으로 빚어가려고 하시는구나”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합니다. 오늘 우리는 관계와 공동체의 관점에서 어떻게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신앙 성장의 5요소
먼저 공동체라는 주제의 중요성과 이 주제가 다루는 큰 그림을 먼저 설명드리겠습니다. ‘신앙과 성숙’이라는 대주제는 믿음이란 무엇이고 믿음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 인생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습니다. 만일 인생이 살다 죽는 게 전부라면 이보다 중요한 문제는 많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목을 매고 살아가는 문제들이 다 중요할 것입니다. 때로는 신자들도 이런 문제들에 휘둘려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일 인생이 살다 죽는 게 다가 아니고, 인간이 영원을 위해서 창조된 존재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정말 그렇다면 영원히 가치있고 중요한 것이 인생에서도 중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영원을 얼마나 잘 준비하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그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고 그 신뢰가 더 깊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앙과 성장의 문제는 직장, 결혼, 자녀, 건강 등 그 어떤 문제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이 점에서 ‘아멘’하고 동의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순간 순간 넘어질 때가 많을지라도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떻게 발생하고 자라갑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인생을 사는 동안, 이 신앙을 가질 수 있고 이 신앙이 점점 더 자라게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마르틴 루터가 말했던 세 가지 요소에 두 가지 요소를 덧붙여 모두 다섯 가지 요소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고 강조하고 있는 요소들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신학자의 조건을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여기서 신학자라고 하면,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길 수 있겠으나, 어떤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신학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자의 세 가지 조건이라는 말은 좋은 성도의 세 가지 조건이기도 합니다. 루터가 말한 세 가지 조건은 기도, 말씀(묵상), 고난입니다. 기도와 말씀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말씀 없는 기도나 기도 없는 말씀은 절름발이 신학자, 절름발이 성도를 만들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 기도와 말씀은 우리 신앙의 유지와 성장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지식이 더 깊은 가슴의 지식이 되게하시려고 사랑하는 자녀들의 삶에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고백한 것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71).”
그리고 이 세 가지 요소에 제가 더하려고 하는 두 가지는 공동체와 세월(시간)입니다. 기도와 말씀과 고난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교회라는 공동체의 맥락에서 일어납니다. 공동체라는 요소는 있으면 좋고 없으면 할 수 없는게 아닙니다. 공동체는 신앙이 주어지고 성장하는데 필수불가결의 환경적 요소입니다. 공동체의 요소를 환경이라고 이해할 때, 우리는 루터가 말한 세 가지 요소를 ‘함께 기도하기’, ‘함께 말씀묵상하기’, ‘함께 고난받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요소는 세월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은 신학교에 들어가서 집중적으로 몇 년 투자한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세월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더 알아가게 하시고 그렇게 우리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가게 하십니다. 우리의 성화는 죽기 전 어느 순간에 완성되지 않고 죽는 순간에 완성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는 그 순간까지의 세월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게 하시고 믿게 하십니다. 세월과 관련해서 우리 편에서 가져야 하는 태도는 기다림과 인내입니다. ‘빨리 빨리’라는 말은 한국 사람이 제일 많이 쓰는 말이라고 하는데, 신앙의 영역에서는 그런게 없습니다. 우린 평생 기다리고 인내하면서 세월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깊이를 가지게 됩니다.
정리하면 우리 신앙이 자라게 되는 필수 요소 다섯 가지가 무엇입니까? 기도, 말씀, 고난 그리고 공동체와 세월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신앙과 성장’이라는 대주제를 다룰 때, 이 다섯 요소를 중심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 중 공동체의 요소를 ‘신앙과 성장’이라는 큰 주제에서 우리는 제일 먼저 다루고 있습니다. 이 주제를 하나 하나 다루어가는 과정에서 신앙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가 교정되고 신앙의 성장을 경험하는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공동체성은 신앙의 본질이다.
그럼 성경이 우리 신앙과 교회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이 가르치는 공동체성은 어떤 특정한 본문들이 강조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성경 말씀 전체가 공동체를 전제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신앙은 공동체와 별개로 논의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쇠퇴는 사실상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케네스 보아의 지적입니다. “서구 세계에서 공동체는 쇠퇴해왔다…우리는 늘어가는 익명성과 자기 결정권을 추구하는 현상을 보아왔다. 우리 문화는 자립, 자기 보호, 통제, 사유화, 책임의 회피, 피상적인 인간관계 그리고 자기 소외에 대한 의문들을 그 특징으로 갖고 있다. 사람들은 유례없이 바쁘고 그 어느 때보다 더 외로워보인다…바쁜 일과 목표 달성에 중독된 우리는 내면의 부름보다 외적인 부름에 따라 움직인다.”(기독교 영성, 그 열두 스펙트럼, p.466~467) 이런 세상의 문화적 경향은 그 문화로 세례를 받은 개인들에 의해 교회로 유입되었고, 결국 교회의 공동체성은 점점 그 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케네스 보아가 지적한 서구의 문화적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가 고속 경제성장을 경험하면서 이런 현상은 교회로 더 빠른 속도로 파고 들어와서 배금사상, 물량주의, 성공주의, 실용주의로 교회를 물들였습니다. 특별히 전세계의 복음주의와 우리나라의 보수주의 교회는 개인 구원의 요소를 강조하면서 유난히 신앙의 공동체성을 간과해온 경향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인 삶은 정말 개인적인 것이기만 할까요?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집단이나 공동체로 구원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인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개인은 즉각적으로 그리고 자연히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성장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삶은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입니다. 개인적인 거룩은 반드시 사회적, 공동체적 거룩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 공동체성은 본질입니다.

신자의 삼중 헌신(눅 6:12~19)
신앙의 균형은 중요합니다. 미성숙한 신자일수록 균형이 없고 신앙이 성숙해가면서 균형을 가지게 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은 열심을 드러내지만, 균형잡힌 신앙은 영향력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한 가지 균형잡힌 신앙의 패턴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6:12~19을 보겠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서 성부 하나님과 밤을 보내십니다. 이것이 첫번째입니다. 날이 밝자 예수님은 내려와 12제자를 부르십니다. 이것이 두번째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평지에 내려와 많은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병도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쫓아주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신앙의 어떤 패턴을 발견합니까?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헌신하여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홀로 있기 곧 개인의 차원입니다. 두번째는 제자들을 불러 공동체를 만드시고 공동체에 헌신하십니다. 이것은 함께 하는 공동체적 차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복음사역으로 나아가십니다. 이것은 역시 개인의 차원이라기 보다, 함께 섬기는 차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패턴은 우리의 영적 힘이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분주하고 피곤한 일정 속에서도 언제나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셨고 그 시간을 양보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모든 영적 힘은 여기서 나옵니다. 여기서 신자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자기 부인이 온전해집니다. 이런 지체들이 많아지면 그들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힘을 발휘합니다. 교회는 목사나 장로에 의해서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그리스도께 깊이 헌신된 교회의 지체들이 교회를 세웁니다. 신자들이 주님과의 친밀한 고독 속에서 성장할 때,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수용 능력도 증가하게 됩니다. 교회는 외롭고 소외된 개인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자신이 주님께 용납되고 사랑받은 것을 아는 사람들이 모여 가족이 된 것이 교회입니다.
주님의 패턴과 우리의 신앙 패턴을 비교해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을 말하지만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생략하고 바로 사역에로 뛰어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나가서 전하자”는 식입니다. 이런 사역은 힘도 영향력도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과 개인들의 도덕적 타락도, 공동체가 무너진 자리에서 이런 독버섯들이 더 빠르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인들의 모습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거의 이사회의 멤버와 다르지 않지 않습니다. 많이 내고(헌금), 많이 참석하고(모든 모임에), 목사나 교회 지도자들이 원하는 것을 지지해주고, 개인의 죄를 부끄럽지 않은 수준에서 나누는 것이면 훌륭한 교인이 아닙니까? 여기서 공동체는 세워질 수 없습니다. 공동체는 조직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헌신함으로 세워집니다.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은 사람에게 헌신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사람에게 헌신한다고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정확히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몰아붙이는’ 공동체
본문 두 절에서 강조점은 ‘격려하며’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24절은 어떻게 하면 더 사랑하고, 선행을 더 잘 하도록 격려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격려하며’라는 단어는 본문을 포함해 신약성경에서 단 두 번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쓰여진 다른 곳은 사도행전 15:39인데, 거기서는 부정적 의미로 ‘심히 다투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단어는 아주 강력한 것을 전달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본문에서는 ‘격려하며’라고 긍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려면, ‘분발시키다’ 혹은 ‘박차를 가하다’는 말이 더 적합합니다. 그러니까, 24절은 “서로서로 사랑과 선행을 더 잘 하도록 몰아붙일지 연구하라”, 이런 뜻입니다. ‘돌아본다’는 단어도 사실 ‘골똘이 생각하다’ 혹은 ‘연구하다’는 의미입니다. 신자들이 무엇을 생각하라는 말입니까? “어떻게 하면 아무개 형제와 아무개 집사가 좀 더 잘 사랑하고 선행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부추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건한 삶으로 어떻게 서로를 더 자극하여 사랑과 선행을 하게 할지 생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자의 마땅한 바입니다. 이것은 매우 실천적인 명령입니다.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나 느낌을 넘어 선행으로써 표현되는 것입니다. 선행은 신자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합니다. 그래서 사랑과 선행은 교회 안에 흘러넘쳐야 하고 그렇게 교회 밖의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신앙은 온전하게 성장해갑니다. 이것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의 지체들이 함께 하는 일입니다.
1세기의 교회에는 차별과 핍박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두려움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었고 모이는 것에 장애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임을 최소화하려고 했고 모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을 따르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참된 신자들은 더욱 서로를 격려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 말씀은 공동체를 허무는 모든 시도, 모든 사상, 모든 방해를 무릅쓰고 공동체를 세워가라는 명령입니다.
신앙의 박해가 있고 신앙으로 말미암아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1세기의 정황에서 이 명령은 매우 적실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1세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신앙의 온갖 대적들을 직면하고 살아갑니다. 혼자서 버티고 견디는 것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대적들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문화와 현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이 말씀대로, 사랑과 선행을 더 잘 하도록 서로 몰아붙여야 합니다. 몰아붙여야 합니다!

교훈과 적용
공동체의 요소가 빠지면 신앙은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 깊다고 모두가 알아주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실제로 사람에게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 헌신과 신앙은 점검받아야 합니다. 또 그런 상태에서 어떤 사역에 헌신한다고 해도, 그는 좌충우돌하면서 자기 영역 구축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고, 결국 교회를 허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교회를 공동체라고 여겨왔습니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면 형제 자매들이 사랑과 선행을 더 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그렇게 격려해왔습니까? 우리의 만남과 교제에 격려는 얼마나 됩니까? 우리는 형제들을 자극하고 몰아붙였습니까?
교회의 본질이 사귐이라는 것을 저는 처음부터 강조해왔습니다. 요한일서는 특별히 그것을 강조하는 성경이었습니다. 교회는 주일에 예배하러 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주일 오전에 예배당에 와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생활에서 사귐은 본질입니다. 교회의 사이즈가 어떠하든지, 우리가 깊은 사귐 안에서 서로 돌보고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한 숫자입니다. 한편 그것은 코이노니아라는 소그룹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를 원하신다면, 최소한 주일 하루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서 떼어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율법에 안식일을 정하신 하나님의 의도 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공동체는 세워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이기를 폐하는 세상의 풍조와 싸우면서,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참된 공동체를 물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청년 세대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공동체를 물려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람에게 헌신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에게 헌신하라고 명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모든 자를 주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