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신앙과 성숙 5 - 관계와 공동체 (4) - 터진 웅덩이 파기

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신앙과 성숙 5 - 관계와 공동체 (4) - 터진 웅덩이 파기

예레미야 2: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5-14

말씀내용
<터진 웅덩이 파기> 렘 2:13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우리의 성향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성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여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어디서 그 만족을 얻고자 하느냐이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추구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우리 안에 있는 자기 만족의 성향과 얼마나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지 모릅니다. 가령, 신앙 생활에서 갈망은 중요합니다. 갈망이 없이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갈망을 먼저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 갈망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채워질 수 없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 나오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모두 갈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배부른 자에게 진수성찬은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에 굶주리고 무엇으로 배부름을 얻고자 하는가입니다.
사람들은 다 외롭습니다. 그래서 돈 벌어서 돈 쓰는데서 만족을 얻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뭔가 멋진 옷을 걸치고, 그럴듯한 집을 소유하고, 좋은 차를 타는데서 만족을 누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애들 잘 키우는데서 만족을 얻는 것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은 외로운 곳이란 생각이 듭니다. 물론 게중에는 자녀분들이 자주 찾아오는 분들도 계시지만 전반적으로 외로운 곳입니다. 집도 크면 집 안에서도 가족들이 만날 기회가 없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먹을 기회도 별로 없습니다. 다들 바쁩니다. 텔레비전이든 볼 것이 방 마다 개인 마다 있어서 다 자기 보고 싶은 것을 봅니다. 더 이상 채널을 놓고 싸우는 일이 그립습니다. 무슨 기계를 사도 다 각자가 소유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퍼스날입니다. 퍼스날 컴퓨터, 퍼스날 TV, 퍼스날 카, 퍼스날 아이팟…. 사회가 점점 부유해지고 선택의 자유가 많아지면서 인간은 점점 더 행복해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가난에 지쳐서 사셨던 분들은 이게 그래도 낫다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결속을 모르고 살아가며,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 오는 행복을 알지 못하고 원하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모습이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결속을 통해서 행복과 만족을 누리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첫번째는 하나님과의 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셔서 하나님은 첫 사람이자 유일한 사람이었던 아담을 위해서 하와를 만들어주셨고 그녀와 깊은 결속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많은 후손을 낳으라고 하심으로써 사람은 사람과 결속을 이루어 함께 살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죄가 결속을 깨뜨리고 소외를 가져오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가 가져온 직접적인 결과는 소외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더 이상 전과 같은 결속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외가 만들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형제와 형제 사이에 소외가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다 이런 결과를 안고 태어났고 이런 성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바쁘지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면서 바쁜 것이 아니라, 혼자 바쁩니다. 심지어 목회 조차 컴퓨터 앞에서 바쁜 것이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이고 우리가 가진 죄의 성향입니다. 우리는 외롭지만 결속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결코 채울 수 없고 만족을 줄 수 없는 우물을 파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두 가지 악을 행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둘째는 스스로 다른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담아놓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죄: 1)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죄
먼저,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생수의 근원이고 우물물에 비유하고 계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물물은 당시 양을 치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에게 생명과 같은 것이었고 게다가 생수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업의 큰 자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우물이 아니라, 생수의 근원이라고 스스로를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자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그 물 근원에서 먹고 모든 육축을 먹일 것이고 모든 논에 물을 댈 것입니다. 그들의 만족은 그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여기서 버렸다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종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개종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여전히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우물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생수의 근원은 물이 다함이 없이 흘러나온다는 개념입니다. 물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솟아나올 것입니다. 그들은 또 다른 우물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고 또 그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두번째 죄악으로 이어졌습니다.

두 가지 죄: 2)자기의 터진 웅덩이를 판 죄
그들은 물을 담아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보다는 이 터진 웅덩이가 더 완벽해보였고 괜찮아 보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바보같은 짓이 가능할까요?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 영적으로 무감각한 자들, 육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아니라, 육신의 소욕이 우리를 끌고 가는 곳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샘 근원과 우물도 아닌 웅덩이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웅덩이는 빗물을 받아서 쓰는 기능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기껏 빗물이나 받아둘 수 있었고 그 빗물 조차도 조금씩 조금씩 새나가서 결국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그런 웅덩이를 그들은 팠고 그것으로 자기들의 만족을 삼았다는 것입니다.

부차적인 쾌락이 최우선적인 만족추구가 될 때
부차적일 수 밖에 없는 쾌락이 우리의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만족 추구가 될 때, 이것이 바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파는 행위입니다. C.S.Lewis는 이것을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우리는 냉담한 피조물이라서 무한한 기쁨을 받았는데도 빈민가에서 진흙놀이를 하고 싶어할 뿐 바다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식한 아이처럼, 술과 섹스와 야망에 팔려 시간을 낭비한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즐거워한다.”

터진 웅덩이를 파는교회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문화가 이런 문화입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파고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교회 조차도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추구하기 보다, 자기가 원하는 때에 얻을 수 있는 웅덩이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부추겨 왔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게 하고 하나님과 더 깊이 사귀게 하는 방향 보다 ‘더 나은 느낌’을 주는 예배와 프로그램으로 많은 교인들이 부차적인 만족에 휩쓸리도록 인도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고 이 말씀이 정확히 지적하는 바입니다. 교회는 마켓팅의 요소를 가지고 고객 만족의 관점에서 목회를 이끌어온 것이 벌써 수십년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안락감을 주고 느낌이 좋은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잘못된 판단에 기준하여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성향은 적어도 지난 세기 말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의 교회를 거기에 적응시켜 놓는데 성공해왔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알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경험의 잣대로 기독교를 판단하고 가르치려고 하게 되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하나님 보다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만족할 수 있는 편이 낫다.”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렵다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웬만한 것은 다 자기 노력과 의지로 성취하거나 도달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만은 자기 노력과 의지로 성취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어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삶에서는 위로가 필요할 때, 즐거움이 필요할 때, 만족이 필요할 때, 자기가 원하는 때 원하면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주어지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이든 자기 힘 아래 복종시키고 조종하기를 원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떠나서 인간이 창조주로부터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소명을 받을 때 받은 속성입니다. 그러나 죄와 타락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가진 힘을 바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힘,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 조종하고 지배하려는 욕구는 만족할 수 없도록 우리를 계속 부추깁니다. 이것이 어디까지 나타나는가 하면 종교의 영역, 신앙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힘을 사용해서 하나님도 조종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내가 콘트롤할 수 있는 영역 속에 다 가두어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조종당하시거나 지배당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보다 더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비판적인 사람들은 설명할 수 없으면 다 하나님의 주권 운운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당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다루실 것을 압니다. 신앙은 통제하고 조종하며 지배하려고 하는 그 힘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 사람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배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 아닌 종교적 영역 속에 있는 다른 우물, 터진 웅덩이를 파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좋기는 한데,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우리의 손 안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콘트롤할 수 있는, 아무 때나 원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을 찾게 됩니다. 그것이 비록 빗물을 받아놓은 웅덩이이며, 터진 웅덩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이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 하느냐(렘 2:31).” 그들은 자기들이 통제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광야라고 생각했고 캄캄한 땅이라고 여겼습니다. 광야에서는 자기들이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고 자기들의 경험과 지식을 다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을 쌓을 이유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데가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싫습니다. 캄캄한 땅이란 의미도 그렇습니다.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지식과 경험의 횃불을 들어 불을 밝히고 싶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캄캄한 땅이 싫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이유입니다. 그리고 비록 터진 웅덩이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콘트롤할 수 있는 자기 소유의 웅덩이를 파놓으면 자기가 원할 때, 자기 방식으로 만족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불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인데, 불신앙은 자기 의지 안에 모든 것을,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터진 웅덩이를 파는 태도가 맺는 악한 열매
웅덩이를 파는 삶의 태도, 즉 부차적인 만족과 쾌락을 즉각적으로 얻기 위해서 본질적이고 가장 중요한 만족을 뒤로 제쳐놓는 태도는 바로 죄의 성향에서 흘러나오는 열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그리고 하나님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나 이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것이지 결코 궁극적 만족을 줄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개념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원하는 것을 채웠는가? 만족이 되었는가?’입니다. 이들이 가지는 만족은 결코 참된 결속에서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그러시지만, 자기의 통제 속에 들어올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터진 웅덩이를 파는 사람은 누군가가 자기 통제 속에 들어올 때에만 만족할 수 있는데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배우자도 자식도 그렇습니다. 반면 개나 애완동물은 통제 속에 들어오기가 훨씬 쉽습니다. 이런 식으로 터진 웅덩이를 파게 되면 외로움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 웅덩이의 물은 사람의 내면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결속되고 사람과 결속됨으로써 만족을 누리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만족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통증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이 통증은 외로움이고 심해지면 우울증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과 같이 우울증이 많고 다양한 우울증 치료제가 개발되며 그들을 다루는 전문적인 상담가들이 많았던 시대가 언제 있었습니까? 세상은 점점 부유해지고 문명의 이기를 통해서 편안해지는 것 같지만, 정말 인간이 깊은 만족을 누리고 살아가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정직하게 부정적인 답변 밖에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통증을 이기지 못해서, 인간이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방식으로 출구를 찾으려고 합니다. 자기의 채워지지 않는 만족에 대한 분노가 다른 사람들을 향한 폭력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개의치 않는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교회가 터진 웅덩이가 되는 경우
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무엇을 얻기를 기대하십니까? 교회에서 여러분의 외로움의 깊은 실체가 만족을 얻고 해결이 됩니까? 제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만일 여러분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만족을 얻기를 원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것을 추구하기 전에, 교회에서 그것을 얻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파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결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영혼은 결코 어느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 섬길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없이 행하는 섬김은 결코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섬김이 아닌,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또 다른 형태의 추구일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터진 웅덩이를 파듯이, 하나님이 아닌 교회에서, 주변 사람들에게서 우리의 본질적인 만족을 얻으려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여러분에게 온 것은 참된 만족이었습니까? 아니면 실망이었습니까? 물론 잠시 잠깐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다리느니 교회 친구와 만나서 밥먹고 이야기함으로써 내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식으로 그 만족이 얻어진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만족이 지속적이며 진정한 만족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느끼게 되어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거의 보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3개월 개런티라고 할까요? 혹 길면 6개월이나 1년? 이것이 좋은 교회라고 평가하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웅덩이를 파는 사람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는 고통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만족을 얻기 전까지는 결코 자기 중심의 만족 추구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 어느 것도 자기의 만족 추구를 온전하게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만족을 계속해서 이 웅덩이, 저 웅덩이를 전전하면서 채워야 할 것입니다. 결코 그는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결속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사람과도 진정한 결속, 영적인 결속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룰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소극적인 표현입니다. 자기의 터진 웅덩이를 파서 만족을 추구하는 양태는 결국 다른 사람들을 전혀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자리로 가게 됩니다. 나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용할만한 사람을 찾아서 이용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완벽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채워줄 수 없기에 그는 사람을 바꿔가면서 그 일을 계속하게 됩니다. 오래 지속되는 관계 그리고 지속될 수록 결속이 일어나는 관계가 아니라 피차에 좋고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 그래서 나의 외로움을 달래고 허무함을 잊어버리게 해줄 수 있는 사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서 한 동안 지내다가는 그 사람이 더 이상 그것을 채워줄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서 그 일을 계속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죄성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결코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는 이런 죄의 성향을 지적하십니다. 이 죄성은 이미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시대 정신이 되어 버렸고 교회 안에서도 지배적인 태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영적 결속이 일어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가 남게 됩니다. 이용당했다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결속은 거짓된 결속일 뿐이고, 피상적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가짜 결속입니다. 그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으면 됩니다. 휴가를 같이 할 수 있고, 취미활동을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그가 누릴 수 있는 결속의 전부입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을 기다릴 여유가 없습니다. 그는 언제나 조급하고 영적으로는 둔감합니다. 그리고 물론 자기 만족의 방법에 따라서 쾌락과 방종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매우 농후합니다.

자기 만족추구가 주변 사람에게 준 고통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런 죄성을 어떻게 고쳐주십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기 중심적인 만족 추구의 성향, 자기 이기심이 다른 사람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그런 성향 때문에 여러분의 배우자가 받게 된 상처들, 여러분의 자녀들이 받은 상처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 상처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발견입니다. 결코 쉬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도무지 깨닫지 못할 것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만 채움받을 수 있는 것들을 받기 위해서 여러분이 요구했던 모든 사람들은 다 여러분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이것이 한 사람의 성품에 나쁜 영향을 깊이 미치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주변의 사람들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누가 나를 캐어해줄 수 있는 사람인가? 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 누구인가? 저 사람을 가까이 하면 나에게 도움이 될까?” 혹시 사람들을 바라볼 때, 이런 관점으로 여러분의 생각이 돌아가지는 않습니까? 자기 중심성이 이렇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이 돌아가는 사람에게, “내가 저 사람을 어떻게 축복할 수 있을까?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고싶다. 내가 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없을까?”라는 생각은 허위와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자리로 옮겨가기를 원하시고 성령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리로 데려가십니다.

하나님께,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가라.
결국 인간이 하나님과의 깊은 결속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콘트롤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결코 진정한 결속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결속을 이룬 사람만이 사람과 깊은 영적 결속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것을 흘려보내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고 사람들을 사랑할 능력이 있으며 사람들을 위해서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 기도해줄 수 있고, 이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교회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자비와 선하심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선하심을 깊이 맛보아 알고 경험하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깊은 만족을 경험한 사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깊은 외로움의 채움을 받고 만족을 누리는 사람만이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저는 네 번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의 교회를 교회되게 하지 못하고 우리의 참된 영적 결속을 방해하는 죄성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제 마음에는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제 가슴 속에 주신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은혜를 사모하는 저에게 교회를 섬길 마음을 계속해서 주셨고 오늘 이 자리까지 목회자로서 교회를 섬기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성 쌓기를 멈추십시오. 교회 안에서는 물론, 세상에서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삶을 그치십시오. 우리 인생은 기껏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존귀한 것입니다. 자기를 증명하고자 하는 한, 우리는 결코 깊은 결속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자기 성을 쌓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런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횃불 밝히는 일도 멈추십시오. 자기 지식, 자기 경험 가지고 큰 소리치고 살겠다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갈 길을 보여달라고 구하면서 광야로 들어가고 흑암 속으로 발을 내딛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믿음으로 산다는 것,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한 걸음씩 흥분된 발걸음을 내딛는 삶을 경험하십시오. 그 때 우리는 결속을 경험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불안한 삶에 회칠하면서 사는 일도 중단하십시오. 괜찮을거라는 근거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듣기 좋아하는 소리를 들려주는 사람들과의 거짓 결속을 끊어내십시오. 정직하게 문제를 바라보십시오. 육적인 소욕이 여러분의 삶의 동력이 되도록 허용하지 마십시오. 문제를 덮고 가지 마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분, 터진 웅덩이를 그만 파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말고 차고 있는 주머니를 내려 놓으십시오.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잠깐의 만족과 쾌감을 제공해주는 그 모든 삶의 습관에서 떠나십시오.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내려놓으십시오. 그런 죄의 성향이 여러분 안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는지, 또 주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보여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리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돌아가십시오. 교회가 여러분의 터진 웅덩이로 존재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을 찾는 일을 멈추십시오. 내가 섬겨야 할 사람, 내가 다가가서 결속을 이룸으로써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흘려보내줄 수 있는 관계를 찾으십시오.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기다리겠다고 말씀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생수의 근원을 보게 하시고 그 생수를 마시게 해달라고 그분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을 버리고 여러분이 팠던 모든 터진 웅덩이들에서 만족을 구했던 것을 깊이 회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결속을 추구함으로써 만족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복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은혜,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보게 하시고 거기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수를 마시도록 다시는 목마름이 없는 그 물을 마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로 그 생수를 온 교회 안에서 맺어지는 관계 속에서 그리고 세상 속으로 흘려보내줄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구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