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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3 - 관계와 공동체 (2) - 횃불 밝히기

이사야 50:10-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4-30

말씀내용
<횃불 밝히기> 사 50:10~11



1. 삶은 수학공식이 아니다.
인생을 살면서 배우게 되는 것은 원칙과 공식에 인생을 묶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수학공식 같이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인생을 공식화하면 좀 더 잘 살고 인생이 쉬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이런 공식들을 제공해 줍니다. 하지만 인생이 이런 책들을 읽어서 성공할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잘 키우는 7가지 방법이나 행복한 결혼생활의 7가지 비결이 인생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인생은 수학공식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타락한 본성의 욕구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드러냅니다.

2. 타락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
A. 모든 것을 알고 가겠다.
그 첫째는 모든 것을 알고 가겠다는 태도입니다. 인간은 본래 이해를 추구하는 피조물입니다. 알려고 합니다. 처음에 선악과를 먹은 것도, 그 열매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모르는 영역을 남겨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 알고 가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B. 과학 같은 신앙: ‘혼돈은 적이다.’
과학은 근본적으로 우주 안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설명하는 학문입니다. 설명할 수 있는 영역과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은 언제나 도전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근본에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과학의 이름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어떻게 자연법칙이라는 폐쇄된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신앙을 이런 식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신학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합니까? 성경을 보고 책을 많이 읽으면 하나님을 다 알 수 있고 신앙의 모든 영역을 다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경향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어떤 영역을 하나님의 영역이며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C. 관리 가능한 영역 속에서 활동한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자신을 관리가능한 영역 속에 두고 싶어합니다. 자기가 정통하고 자신있는 분야, 자기 지식을 드러낼 수 있는 분야에 머물러서 큰 소리로 주장하기를 좋아합니다. 그외의 영역으로는 좀체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을 뿐 더러, 들어가게 되면 잠잠해지고 불안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죄의 성향입니다.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깊은 결속을 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주저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3. 본문 이해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 말씀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또 불신앙이 무엇인지를 예리하게 지적해줍니다.

A. 불신앙은 자기 불을 피우고 자기 횃불을 들어 어둠을 밝히려는 것이다(11).
11절을 보지요. “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 이 말씀은 매우 심한 책망입니다. 무엇을 책망하는 것입니까? 어둠 속에서 자기 불을 피우고 자기 횃불을 밝혀서 어둠을 밝히려고 하는 태도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방식, 자기 지식, 자기 경험, 자기 기준으로 모든 어둠을 밝혀 이해하고 설명하고 관리하고 개척하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너희 스스로 피운 불꽃 가운데로 행하고, 너희 횃불 속으로 걸어다니는 삶을 산다면 슬픔 중에 눕게 되고 결국 망하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한 마디로 성경은 이것을 불신앙이라고 규정합니다.

i. 공식을 좋아하고 언제나 정답이 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삶에 대한,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공식을 세우기를 좋아하는 태도입니다. 그에게는 늘 정답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혼란이나 무질서나 신비로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슨 문제든지 가져오면 그는 ‘이렇게 이렇게 하라’는 행동지침을 주거나 정답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 삶이 정말 그렇게 다 설명될 수 있습니까? 1+1=2 하는 식으로 딱 맞아떨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대로, 인생은 ‘흑암 중에 행하는 것’입니다. 어두워서 다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어떻게 배우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을 우리의 죄성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배울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아무 것도 시도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시스템과 방법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은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 공동체가 각종 교회성장방법론 등을 의존한다면, 여기에는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는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공식을 좋아하고 정답을 가졌다는 것은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ii. 질문은 언제나 “내가 제대로 바르게 하고 있나?”이다.
이렇게 공식에 맞아야 하고 정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이 공식과 정답에 맞추어 바르게 하고 있는가?” 적어도 나는 문제가 없어야 하고 옳아야 하고 맞아야 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나의 외부에 있는 것입니다. 내 방법, 내 방식이 옳습니다. 그래서 논쟁을 벌이기 매우 쉽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 방법, 내 방식이라는 것이 내가 피운 불, 내가 피운 횃불이 아닌가 생각해야 합니다. “내 판단, 내 지식, 내 기준으로 모든 어둠을 다 비추어 보려는 것은 아닐까?”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잘 던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허무는 것이며, 이런 영역을 내주다보면 자기가 피운 불의 무용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iii. 다른 사람을 돕는데 열심이다.
자기 불을 피우는 것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바쁘고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나쁜 일에 열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데 열심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나의 영혼이 다른 이의 영혼에 가닿는 것 보다 내가 일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나,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관심입니다. 자기 성을 쌓는 사람의 성향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눈에 띄는 자신의 열심이 자기 불을 피우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자기 불을 열심히 피워서 목회를 성공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승인하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iv. 성령의 음성이 필요없고 성경은 행동지침서다.
이런 방식은 더 이상 성령의 음성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머릿 속에 있고, 언제 어떻게 한다가 다 수립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행동지침서입니다. 이것은 매우 피상적인 이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도 매우 조심스러운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과 동행하고, 성령을 좇아서 살아간다고 할 때, 우리는 성령님의 의향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수시로 그 뜻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정답이 있고 신앙과 삶을 공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신비의 영역, 어둠의 영역이 없기 때문에, 다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간절히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v. 그의 최대 관심은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최대 관심은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입니다. 마치 수학 문제를 풀듯이 말입니다. 문제를 잘 푸는 쾌감을 그는 추구합니다. 인간 관계를 예로 들어보지요. “내가 저 사람을 성공적으로 도울 수 있으면 돕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거절한다?” 맞습니까? 이런 관계 속에서 어떤 결속이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vi.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결속보다는 통제를 원한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이 맺는 대부분의 인간 관계는 결속에 기반을 두기 보다는 통제에 기반을 둡니다. 그에게는 획일성이 친밀함의 기본이 되기 때문에 솔직함이 나타나기 어렵습니다. 결속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전문분야?자기 불을 피워서 밝힐 수 있는 분야?가 아니면, 자신과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하는 것이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속 보다 통제가 가능한 대인관계를 선호하게 됩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 이런 성질의 관계들이 지배적이라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서 어떤 선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사람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배우게 되며 신앙이 성숙해져가는 모습을 경험하셨습니까? 그런 모습을 보셨습니까? 이런 일이 얼마나 적게 일어나는지 우리는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결속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결속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불을 피우는 것은 모든 타락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B. 신앙은 빛이 없는 흑암 중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이다(10).
신앙은 흑암 중에 행하고 빛이 없어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고 자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설명할 수 없고, 내 지식, 내 판단, 내 경험이 먹히지 않는 어둠 속으로 그냥 주님의 손만 잡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10절입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i. 신앙은 흑암 중에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생이 본질적으로 흑암 속에서 걷는 것이라고 인식합니다. 모든 인생이 흑암 속을 걷는데, 어떤 이들은 자기 불을 피우고 걷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고 자기 하나님을 의지하고 걸어갑니다. 자기 방식을 주장하느냐, 하나님을 의뢰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모르는 것이 정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앙을 가지니까 보이지 않던게 보이더라가 아니라, 신앙을 가지니까 여전히 어둡지만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갈 힘이 생기더라가 맞습니다.

ii.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 외에 다른 보장이 주어지지 않는 길을 하나님을 붙들고 가는 것이 신앙이다.
여기서 믿음의 자세는 이런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외에는 아무 다른 보장이 없는 이 길을 하나님만 붙들고 가겠다.” 이것이 신앙이라면, 불신앙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 하나만 가지고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수년 전 썼던 일기의 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 외에 아무 다른 보장이 주어지지 않는 일, 그 일을 행할 용기가 있는가? 나는 결과를 통제하려는 모든 노력을 버린채 대인관계의 신비로 들어설 마음이 있는가?....
잘 될까? 교회의 5년 후, 10년 후는 어떨까? 과연 그런 장단기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나는 적어도 목회의 영역에서 아니 내 삶에서 그냥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거짓된 자기 확신 속에 머무느니 말이다.
마치 나를 따라오면 잘 될 것이라는 식의, 나는 미래를 예측하는 지도자인양 너스레를 떨지 않으면서 겸손하게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길이 생명의 길이고 어둠 속에서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난 본능적으로 내 불?내 경험과 내 지식의 불을 피우고 걷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길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이 아니고 교우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걸어야 할 길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어둠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해주실 것을 나는 안다. 그리고 또 하나 아는 것은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나는 계속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계속 이 어둠 속을 걸을 것이고, 빛이 없는 길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이름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걸어갈 것이다.”
저 자신의 불을 피우지 않고, 저의 횃불을 밝혀 ‘여기를 보십시오’라고 하지 않으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어둠 속을 헤쳐나가려는 기대가 제게는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로를 놀랍게 경험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iii. 최대 관심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를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확실하게 도와주었다’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맡겨주신 영혼들에게 삶과 가르침, 만남과 관계, 그리고 결속을 통해서 그분을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C.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신앙의 시금석이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이것이 말로는 쉬운데 사실 삶에서 부딪힐 때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훈련된 영역이 자기 불을 피우는 것, 자기 횃불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많은 것들을 성공적으로 설명한 사람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만나게 될 때가 오는데, 그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우리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그래, 올 것이 왔구나. 나는 하나님을 붙잡고 이 두려운 길을 걸어가련다”라고 말하는가, 아니면 거기서도 자기 불을 피우고 자기 횃불을 밝히고자 하는가가 신앙과 불신앙의 갈림길입니다.

4. 하나님의 처방
자신감을 가지고 살려는 성향, 아는 길만 가려는 성향, 그래서 자기 지식의 범위 내에서만 자신있게 움직이려는 성향이 타락한 인간이 가진 죄의 성향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유지하면서 예수를 믿고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단지 외면적 수준의 결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내면의 수준에서 일으키시는 변화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신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부분을 고치시기 위해서 어떻게 우리를 다루십니까?

A. 어둠을 더 깊게 하신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어둠을 더 깊게 하심으로써 더 이상 자기 횃불로는 밝힐 수 없게 만드십니다. 대강 어두운 곳에서 유용했던 자기 불, 자기 횃불이 더 이상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가 믿고 사는 지식, 경험,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자원을 다 동원해도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상황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가 하는 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든지, 낙심으로 좌초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경험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경험하고 살지 않습니까? 전에는 통하던 것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을 경험하신다면,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더 깊은 어둠으로, 자기 불과 자기 횃불로는 안 되는 자리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어둠을 깊게 하시는 방편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대인관계입니다. 부부관계 혹은 부모 자식관계처럼 피할 수 없는 관계에서 우리는 좌절을 경험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상한대로 관계가 진행되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배우자가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했고, 모든 합당한 조건을 넘치도록 만족시켰지만 자기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 대인관계입니다. 이제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그런 관계 속에서, 그리고 도무지 자기 지식과 경험의 한계 속에서는 어떤 공식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것인지, 좌절하고 거기서 주저앉을 것인지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B. 혼자서는 할 수 없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어둠을 깊게 만드실 때, 우리는 책상에 앉아 공식을 연구하고 발견하는 것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실패감, 좌절감 등의 감정들을 나눌 친구가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와 자매들을 주셨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때는 오직 결속이 필요한 때입니다. 답만 있으면 혼자 해 볼 수 있을텐데, 이제 그 답이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선한 영향력이 자기에게 와 닿아야 하는 필요를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이런 실패감과 좌절감을 내어놓는 대신, 자기 실력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죄성에 이끌려 대인관계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가게 됩니다. 강한 척, 부족하지 않은 척, 외롭지 않은 척,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척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불을 피우고 자기의 횃불을 밝히는 행위이고 죄의 성향의 열매입니다.

5.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이전의 삶의 방식과 어떤 변화를 가져야 합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관계맺던 옛 방식이 교회라는 울타리만 바뀐 채 그대로 남아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A. Plan A, B, C 의 삶의 방식을 버리라.
자기 관리 영역 속에 들어가서 안주하는 삶의 방식을 버리십시오. 사람과 맺는 관계 속에서 Plan A, Plan B, Plan C를 세우는 방식을 버리십시오. 이 방법이 먹히지 않으면, 이렇게 하겠다는 식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사람에게 다가서는 법을 배우십시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두려워 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실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기대하십시오. 여러분, 혼란스럽고 힘든 대인관계 상황 속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몰아넣으실때,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된 경건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질서정연하고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관리영역에 안주하는 사람을 삶의 신비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찌해야 하는지 정확히 말씀해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성령의 속삭임은 지시보다 격려일 때가 더 많습니다. 첫째는 이렇게, 둘째는 이렇게 해라가 아니라 “너는 할 수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B. 바르게 행하려는 욕구를 내려놓으라.
둘째로, 우리는 자신이 옳게 행하겠다는 욕구가 강할수록 깊은 결속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방식을 내려놓으십시오. 앞에 있는 사람을 분석하고 그에게 정답을 줘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진정 그 사람과 깊은 결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냥 함께 있어 주는 것, 안아주는 마음…여러분의 머리에서 나오는 어떤 것, 여러분의 당위감에서 나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에서 나오는 어떤 것으로 그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내가 바르게 행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나를 해방시킬 때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C.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욕구는 바르게 행하려는 두꺼운 욕구 속에 감추어져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바르게 행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자유해질 때, 즉 자기 불을 끌 때, 자기 횃불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흑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앞이 캄캄하고,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진짜 강한 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사람을 깊은 관계의 결속으로 이끄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