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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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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2 - 관계와 공동체 (1) - 관계와 공동체.

창세기 4:10-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4-16

말씀내용
<성 쌓기> 창 4:10~17


1. 왜 우리의 교회 경험은 쓰디 쓴가?
우리는 교회에서 아름다운 신앙의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종종 쓰디 쓴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쓰디쓴 경험은 드물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대해서 이런 부정적 경험을 한 사람들은 좋은 경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는 열린 관계를 맺되, 다른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신앙 생활을 하자.” 그러나 이것이 가능할까요? 한 마디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닫히게 하고 말 것입니다. 관계를 맺는 것은 신앙 생활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좋은데 사람들과 결속의 관계로 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A.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 만족하도록 창조되었다(창 2:18).
인간은 관계를 통해 만족을 얻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아담은 하와와 맺는 관계를 통해서 만족스럽고 풍성한 삶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B. 하나님의 형상과 삼위일체적 공동체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설명해줍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 속에는 공동체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삼위일체십니다. 이것은 세분이 하나로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부께서 성자를, 성자께서 성부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영원한 성령의 교제 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동체로 존재하신다고 말합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C.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족과 교회
하나님은 하와를 아담에게 주실 때, 사실 인간에게 가족이라는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하신 일은 교회를 세우신 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거듭난 신자들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종종 신앙생활에 쓰디 쓴 경험을 하게 합니다.

D. 공동체를 깨는 독: “완전한 교회를 발견하거든 거기 나가지 마라.”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동체를 깨는 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완전한 교회를 발견하거든 당신은 거기 나가지 마라.”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그 완전한 교회에 가면 그 교회에 독을 퍼뜨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그 독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독이고 그 영향력과 파급력이 매우 크고 빠릅니다. 그것은 죄이고 죄성입니다.

E. 좋은 교회는 꿈인가?
좋은 교회, 성경적 교회는 꿈일까요? 물론 이 세상에서 완전한 교회를 이루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을 향해서 가는 우리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무모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싸움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영혼의 치열한 전투입니다. 그리고 평생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좋은 교회, 성경적 교회는 그저 꿈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이고 비전입니다. 우리 인생의 한 순간에 성화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성화는 죽어야 완성되는 것이기에), 성화의 삶을 살지 말아야 할 이유와 핑계가 되지 않듯이 우리는 이 목표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번에 4주에 걸쳐 [관계와 공동체]라는 큰 제목으로 성경적 공동체를 이루는 비전을 방해하는 우리 내부의 적들 즉 죄된 성향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이 네 번의 설교는 제가 성경에서 배운 하나님과 구원과 인간에 대한 진리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크게 빚을 진 래리 크랩(Larry Crabb)이 쓴 <끊어진 관계 다시 잇기>에 기초합니다.

2. 스토리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가인은 제사 문제로 빚어진 갈등으로 동생 아벨을 죽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A.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의 핵심은 공동체의 기쁨을 박탈하는 것이었다(12b).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공동체?함께 살아가는 삶?를 파괴한 행위였습니다. 공동체를 파괴한 사람인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의 기쁨을 그에게서 박탈해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2).” 가인은 이제 정착해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벌입니다. 그는 유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가인은 이 벌이 너무 무겁다고 항변합니다. 자기가 공동체 없이 혼자 유리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누군가 자기를 만나서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 같습니다(14).

B. 가인은 성을 쌓아 공동체를 이루고 눌러 앉음으로써 하나님을 반역하였다(17).
결국 가인은 하나님의 낯을 떠나 에덴 동편 놋땅에 거합니다. 거기서 그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에녹이라고 이름하고 거기서 자기가 쌓은 성을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이름했습니다(17).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가인이 성을 쌓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벌, 그가 유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정면으로 반역한 행위였습니다. 그는 공동체의 기쁨을 빼앗기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을 쌓았습니다. 이것은 반역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이 공동체의 결속을 방해하는 요소인가에 대한 통찰을 줍니다. 그것은 성을 쌓는 행위입니다.

3. 영의 생각 대 육신의 생각(살리고 죽여야 할 것)
잠깐 이야기의 뿌리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롬 8:6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영의 생각이 있고 육신의 생각도 있습니다. 두 생각의 결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하나는 사망이고 하나는 생명입니다. 이 무서운 결과를 생각하는 성도라면, 영의 생각은 살리고, 육신의 생각은 죽여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문제는 이 두 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A. 영의 생각: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세상에서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살아가라”(히 11:10,13~14).
먼저 영의 생각을 보지요. 믿음의 조상들이 살아갔던 방식은 하늘에 있는 도성을 바라보는 삶이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요 14:1~3). 그 소망이 뚜렷했고 자기들의 본향이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살기에,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히 11:10,13~14). 이런 것이 영의 생각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생각을 최대한 살려야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으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B. 육신의 생각(죄의 성향): “어떻게든 내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이 세상에서 그럴 듯 하게 살아가리라.”
반면 육신의 생각 즉 죄의 성향도 동시에 나타납니다. 육신의 생각의 핵심은 “어떻게든 내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세상에서 그럴 듯 하게 살아가리라”는 것입니다. 그 생각은 자신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존하지 않는 생각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는 자에게는 자기 자리가 보장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공을 귀중히 여깁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한 기준입니다. 자기 속이 어떻든 그럴 듯 하게 보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성을 쌓는 사람들의 숨어있는 동기입니다. 인정받고자 하는 경향이 바로 죄의 성향입니다. 성도는 이런 성향을 가슴 아파하고 마음을 찢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 회개가 육신의 생각을 죽이는 일입니다.

4. 죄의 성향: “자기 충만”
결국 공동체의 결속을 깨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성향입니다. 거짓된 결속을 만들어내려는 태도가 바로 성을 쌓는 태도입니다. 이 죄의 성향은 자기 자신으로 충만합니다.

A. 자기 증명 욕구: “내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주실 것을 바라보는 대신, 가인처럼 자기 성을 쌓는 사람의 유일 최고의 관심사는 자기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는 범사에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그는 일 자체의 의미,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의 의미에 대해서 묻기 전에, 자기가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일’입니다. 그는 일을 통해서 사람을 만납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람과 마음을 나누겠다는 기대, 관계를 통한 만족을 바라기 보다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서 어떤 인상을 줄 것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일을 잘 하는 것이 그 사람보다 중요합니다. 사람을 만나면 그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줄 모르고 자신의 지식이나 일에 대해서 말하기를 즐깁니다. 오래 만나도 그 사람의 내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도 만날 것입니다. 일로써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일을 잘 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게 그에게는 중요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로는 결코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교감할 수 없습니다.

B. 기쁨: 자기가 증명될 때 기쁨을 누린다.
그의 기쁨은 자기가 증명될 때 찾아옵니다. 자기가 어떤 일을 잘 해냈을 때 기쁨이 옵니다. 사람들이 자기 능력을 알아주고 인정해 줄 때 오는 기쁨입니다. 어떤 힘든 사람을 도와줄 때도 그 사람과 마음을 나누고 함께 있어주어 그 사람이 회복된 것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증명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물론 앞의 것에 대한 기쁨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기쁨은 그 사람이 도움을 입어 회복이 되었다는 것때문이라고 착각을 할 만큼 자기를 속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신앙의 영역에서 우리의 동기를 속이는 마음의 기만은 많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C. 가장 두려워 하고 싫어하는 것: 자신의 실패와 약함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실패하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증명하지 못했을 때가 가장 두려운 때입니다. 그는 자기가 어떤 일에서 무능하고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가장 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무능이나 부적합성에 대한 의심이나 생각이 들면 그것을 얼른 죽이거나 감추어버립니다.
목회자에게는 어떨까요? 만일 목회를 실패하게 될 때, 주변 사람들의 눈총이 두렵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제가 여러분의 목회자로서, 목회의 성공과 실패?세상적 기준에 의한?에 온 마음을 쏟아 목회를 한다면, 제 관심사가 목회 성공을 통해 자신을 성공한 목회자로 증명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결속을 깨뜨리게 될 것입니다. 자기로 충만한 목회자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그런 목사에게 교인은 성공의 발판이고 자기 증명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D. 가짜 결속: 나를 인정해 주는 비슷한 사람들 끼리 결속한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자기의 약함과 부적합함을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가 애써서 죽이고 있거나 감추고 있는 두려움의 존재를 누군가가 꺼내놓거나 아는 것처럼 접근한다면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마음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가인은 자기의 숨겨진 동기를 지적받자, 감히 하나님께 증오심을 품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가 쌓은 성에서 그와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인정해 주는 비슷한 사람들 뿐입니다. 사실 이것은 편한 관계일 뿐, 진정한 인정이 아닙니다. 그는 이런 사람들과 결속을 이루어가는 것 같지만, 그것은 가짜 결속입니다. 그는 아무하고도 진정한 결속, 마음과 마음의 솔직한 이어짐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피상적 관계들만 많이 만들어가고 나에 대한 좋은 인상만 계속해서 만들어갈 뿐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아십니까? 이 문제는 피해갈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속이 이런 가짜 결속의 형태로 가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지 않고 불편하게 하거나 당혹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 한도에서 서로 동의해주고 공감해주면서 위험하고 깨지기 쉬운 거짓 결속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결속을 깨는 사람이고 이방인으로 취급되기 십상입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동의를 해주는 것이 격려이고 긍정적 태도라는 인식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내 약함을 아는 듯 싶고, 누군가 내 두려움을 아는 것 같으면 그를 싫어하거나 피하게 됩니다. 심지어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문제를 다루고 들추어내게 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피차에 편한 사람들끼리 관계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교회 안의 모든 관계들 속에 고착된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편하게 느끼는 몇 사람이면 교회생활이 충분하다고 느끼십니까? 아니면 그것이 없어서 불편하십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불편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기 성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성을 깨뜨리셔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자기 왕국을 만들어가는 것이지 절대로 하나님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삶의 기초입니다.

5. 하나님이 다루시는 방법: 광야로 데리고 가서 말씀하신다(호 2:14).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아, 그 사람’ 하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은 이것이 우리 모두의 죄성이라고 말씀합니다. 가인의 삶의 방식이 이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이런 마음의 성향이 있습니다. 이 죄성이 공동체를 가로막는 요소입니다. 더 분명히 말씀드리면, 이것이 너와 나의 진정한 결속을 막는 죄의 성향입니다. 이 죄의 성향은 결코 쉽게 변화되거나 단 한 순간에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평생 우리는 이 죄의 성향과 싸우고, 이 죄의 성향에 저항하며, 이 성향을 죽이는 전투를 치루어야 합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교회는 결국 세상의 조직과 아무 차이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죄의 성향이고 교회를 깨는 것이며 진정한 관계와 결속을 방해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싸워야 할 적이며, 회개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죄성을 다루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광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죄성은 인생의 광야로 들어갈 때 비로소 그 본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경향이 있으며, 그 정체를 드러내면서 죽어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A. 광야는 내 힘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홀로 서는 곳이다.
광야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자기 힘이 전혀 먹히지 않는 곳입니다. 광야는 자기가 원하던 인정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던 현실을 마주 대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더 이상 자기를 증명할 생각 조차 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는 그냥 홀로 서야 합니다.

B. 광야는 지금까지의 결속이 가짜 결속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곳이다.
광야에 오게 되면,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맺어온 거의 모든 결속이 가짜였음을 알게 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물론 광야가 이 깨달음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광야는 정직한 인식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할 뿐입니다. 광야는 지금까지 자기 주변에서 자기에게 동의하고 자기를 인정해 주던 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런 결속은 순식간에 깨지고 맙니다. 그것은 애당초 결속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관계였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6. 어떻게 살 것인가?
여러분, 우리 안에 이런 죄의 성향이 머물러 있고 우리가 맺어가는 모든 관계 속에 작동하고 있는 한, 우리는 진정한 결속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로 가득찬 여러분을 아무도 도울 수 없을 것입니다. 성공한 사업가, 성공한 그리스도인, 성공한 가장, 성공한…. 성공한….이라는 수식어들이 따라다닐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여러분은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여러분은 아무하고도 진짜 관계, 진정한 결속을 맺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실패이고 영적 파산입니다.

A. 죄의 성향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죽여라.
여러분은 이런 영적 전투를 치루면서 살아가십니까?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진지해 지시기 바랍니다. 대충 예수 믿고 사는 개념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그 생각에 항복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싸우셔야 하고 그 육신의 생각을 죽이셔야 합니다.
가장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죄의 성향을 뚜렷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이 어떤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이런 성향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사람들의 눈 앞에 있는 자신을 의식하지 않으십니까? 이것은 그냥 나쁜 태도가 아니라, 공동체의 결속을 파괴하고서야 만족하는 죄의 성향입니다. 만일 여러분 안에, 이런 죄의 성향을 인식하신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그 성향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성향이 여러분을 지배하는 폭군이 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주님 달리신 십자가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B.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갈망하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성화의 삶은 죽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은 날마다 죽여야 하지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은 새로운 마음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갈망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내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 마음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그는 자기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웁니다. 성공보다 저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사도는 자존심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오직 갈라디아 교회의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를것을 위해서 자신을 해산하는 고통 속에 다시 집어넣을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은 성령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 갈망을 살리고 이 갈망에 순종하십시오. 갈망을 주시되, 더욱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구하십시오. 진정한 결속의 관계를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런 관계로 엮어져 있는 교회 그것이 성경적 교회요, 하나님이 바라시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