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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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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1 - 서론 - 성품과 열매

갈라디아서 5:22-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4-09

말씀내용
왜 이 시리즈를 시작하는가?
요한계시록 강해를 시작하기 전에 [신앙과 성숙]이라는 주제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 공동체에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과 성숙]이라는 주제는 목회자인 저 자신에게와 신앙 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미성숙한 인간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성숙하기를 원합니다. 특히 신앙과 관련하여 성숙이 무엇인지, 성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제가 종종 말하는 바, 경건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신앙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까? 어떻게 그런 성숙과 경건에 이르는가를 선명하게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이런 사람입니다. 제가 책에서 쓴 그대로를 인용하겠습니다. “당신은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혹은 신앙의 고민을 가지고 있을 때 찾아갈 수 있는 어른이 있는가? 내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목사나 장로 같은 직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지긋한 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가진 재능이나 업적이 아니라 그의 경건한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웃어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런 사람이다. 하나님을 정말 아는 사람,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줄 아는 사람, 자기 자신보다 그리스도께 푹 빠지는 법을 아는 사람, 자아를 찾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사람, 거룩함에서 자라가는 사람, 사람들에게 열심과 뜨거움의 인상을 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 자신의 내면과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의 차이를 깨뜨리고 정직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사람, 얄팍한 프로그램이나 어떤 행사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존재감으로 주님을 향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그는 인생에서 그리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한 번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경건한 영향력으로 다가오는 사람, 이런 사람이 내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이다.”
이 내용을 들으시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모습으로 나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경건은 아름답고 흠모할 만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과 성숙]이라는 주제의 시리즈 설교를 계획하는 저의 가슴에 깊이 자리한 핵심 개념입니다. 그리고 경건한 어른은 제 목회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경건한 어른이시고 또한 경건한 어른으로 지어져 가시기를 바랍니다. 경건한 사람이 많은 교회, 경건한 사람이 많은 세상을 저는 꿈꿉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또 우리는 경건한 어른을 어떻게 식별할 수 있습니까? 종종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오해와 혼란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성품과 열매를 구분하십니까? 이 질문을 좀더 분명하게 하려면 오늘 설교의 제목에 나오는 성품이 무엇이고 열매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정의를 내려야할 것입니다 제가 성품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가질 수 있는 성품이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열매와 구분하여 말하기 위해서 성품을 자연인이 맺는 자연적 품성으로 제한하여 사용하겠습니다. 반대로 열매라는 말은 성령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성령의 열매는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신자의 삶에서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열매는 오직 신자와만 관계를 가집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성령의 열매로 소개되는 특징들은 사실 모두 성품과 관련된 것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품과 열매를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의 직분자들을 선출할 때, 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분별력입니다. 장로의 직분이나 집사의 직분에 합당한 자질과 은사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고 그가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교회를 유익하게 섬길 수 있는 사람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성품과 열매를 구분하는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종종 혼동되는 이유는 성령의 열매의 특징이 모두 성품과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런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할 것은 본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의 특징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육체의 일들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함으로써 사도가 전한 바른 복음의 결과로서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우리가 확인할 것은, 여기서 사도는 성령의 열매를 복수로 말하지 않고 단수로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의 특징 혹은 맛이 9가지로 구분됩니다. 그 9가지 특징이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그 각각을 간단히 살펴보지요.
‘사랑’(love)은 다른 모든 특징들이 나올 수 있는 근원이고 성령님의 근본적인 성향입니다. 신자의 믿음은 사랑으로써 표현되고(갈 5:6) 사랑은 모든 율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롬 13:8). 일차적으로 이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희락’(joy)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복음으로부터 얻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묵상하는 일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일이, 그리고 복음 그 자체가 기쁨이 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화평’(peace)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화평입니다. 이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만들어냅니다.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 평화가 없는 곳에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거짓된 평화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오래 참음’(patience)은 힘든 상황 혹은 힘든 사람과 관계가 있습니다. 고난을 견디는 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자기와 다르고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을 오래 참음으로 기다려주는 것도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치 않는 죄인을 기다려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비’(kindness)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돌보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 보내주려는 마음, 타인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양선’(goodness)’은 베풀기를 기뻐하는 태도이고 성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관대하고 후하며 인색하지 않은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색하게 행하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쌍한 자들이겠습니까?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열매는 우리의 개성과 인격을 넘어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충성’(faithfulness)은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나오는 태도이자 성품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가득한 상태이며, 하나님을 향한 자신감의 표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을 책임지실 것을 알기에 사적인 이익 앞에서 꾀를 부리지 않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온유’(gentleness)는 진정한 겸손이고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는 약함이 아니라 절제된 힘입니다. 무절제한 힘인 폭력과 구별되는 절제된 힘이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되는 힘입니다. 온유는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겸손해서 사람들이 다가가도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절제’(self-control)는 모든 관능적인 것들로부터 자신을 참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지 않게 하고, 잘못된 열정에 이끌려 유혹에 항복하지 않게 하는 저항력입니다. 이것은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 가지는 천부적 본성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열매는 자연적 성품이 아니다.
여러분은 이제 본문이 가리키는 성령의 열매가 사람이 자연히 맺을 수 있는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물론 표면상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성령께서 신자의 삶에서 맺으시는 열매는 자연인이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내는 성품과는 본질상 구분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을 상정해볼 수 있습니다. 불신자이지만 성품이 훌륭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이지만 성품이 모나고 미숙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을 간단히 표현하면, 성숙한 불신자와 미성숙한 신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미혼으로서 배우자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쉬운 질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머리는 후자를 선택하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은 전자에게 더 끌릴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두 가지 전제 및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인이 그의 성품이나 성숙의 정도, 혹은 윤리의식이나 도덕적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전제이지만 많이 오해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을 종종 하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왜 저렇게 행동을 하는거야?” 예수님을 믿을지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여전히 미숙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숙해지고 그들 안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두번째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왜 저렇게 행동할 수가 있지?”라고 물을 때, 사실은 그 사람이 거듭난 신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는 교회를 다닐 뿐 아니라 교회의 중직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상 그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그에게서 성령의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다 거듭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성령의 열매는 자연인이 맺는 자연적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짚고 가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여러분에게 드린 질문을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문제를 좀 더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가?
사람이 어떻게 변합니까? 사람이 어떻게 성숙함에 이르고, 어떻게 선한 성품을 가지게 됩니까? 멋있게 변하고 싶다고 해서 멋있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 주제는 두 가지로 접근해야 합니다. 성품과 열매를 구분하여 접근하는 것입니다. 성품은 자연적 성품의 차원에서, 열매는 신자 안에 맺혀지는 성령의 열매라는 차원에서 각각 접근을 달리 해야 합니다.

성품: 자연인의 성품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먼저 자연인의 성숙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자연인이 성숙을 추구할 때, 그것을 덕(virtue) 혹은 윤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로 수단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어릴 때는 훈육이 중요하고 성장하면서는 자기 수양이나 의지적 훈련을 통해서 덕을 쌓아갈 수 있습니다. 가령, 일기를 씀으로써 자기 성찰을 하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은 더 도덕적이고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덕을 쌓아가거나 자신의 욕심을 비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용어로 율법주의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인과율의 차원에서 결과 곧 도덕적 성품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소하지 않은 결정적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성품 자체는 좋고 바람직할지라도, 그것이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본질적으로 자기의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그러합니다.

열매: 신자에게 성령의 열매가 어떻게 맺혀지는가?
그러나 신자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신자는 어떻게 경건함과 성숙함으로 변화됩니까? 이것은 신학적으로 성화의 주제와 관련됩니다. 이 변화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믿음을 주셔서 그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고 의롭다함을 얻게 하실 때, 그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되어가는 성화의 과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역사이고, 주도하는 동력은 은혜입니다. 칭의는 믿음으로 거저 얻는 반면에 성화는 노력과 행위로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화와 성령의 열매는 자연인의 성품과 조금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키는 것이고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칭의도 성화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다만 성화에서는 은혜가 주도하더라도 사람의 순종의 행위가 따른다는 점이 칭의와는 다릅니다.
여기서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신자는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고, 은혜로 거룩해집니다. 이 은혜는 용서하고 용납하고 용서받고 용납받는 삶의 환경을 만들고, 이 환경은 신자가 자라가고 성숙해지는 환경입니다. 여기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를 일관되게 드러냅니다. 그 의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거저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자격이 없지만 예수를 믿는 자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신자의 변화는 단순히 매일 하나의 적용을 하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회개와 자기 부인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회개와 자기 부인, 이것이 신자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직접적 동인입니다.

교회는 윤리운동체가 아니다.
이 주제를 조금 확대해보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저급한 윤리 수준을 한탄하면서 교회의 윤리회복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의도는 좋지만 여기에는 교회를 윤리운동체로 보는 오해가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 같은 기관은 기독교인들의 윤리 수준과 의식의 향상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 조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윤리운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신앙운동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참된 신앙은 도덕이 아니라, 사람의 세계관, 인생관, 삶에 대한 의식과 태도 전체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추구하는 모든 변화는 성령께서 복음의 진리를 통하여 이루시는 변화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기관이나 조직도 이룰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이루시는 열매입니다. 교회는 이 비밀이 복음 안에 있음을 알기에, 윤리가 아니라 복음에 목을 겁니다. 복음이 모든 변화의 동력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세상이 말하는 도덕이나 윤리의 수준을 넘어서는 사랑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이웃을 매우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도덕과 신앙, 종교와 기독교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는 도덕적 인간이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가 추구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도덕과 신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고,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소위 종교적 차원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던 도덕적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도덕적인 사람들을 찾아오지 않으셨다는 것을 늘 나타내셨습니다. 도덕적인 사람들은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도덕을 추구하는 종교인들은 은혜의 요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 탕자의 형인 맏아들은 그의 말대로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는” 아들이었습니다(눅 15:29). 그는 효자였습니다. 반면 둘째 아들은 자기 멋대로 사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먼 나라에 가서 탕진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이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는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아버지에게 말합니다(눅 15:21). 이것이 두 아들의 차이입니다. 세상적 표현으로, 맏아들은 승자입니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의지가 있고, 아버지에게 불만을 표출할만큼 당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은 둘째 아들입니다. 그는 패자이고 망한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갈 사람이고, 이 사람이 경건한 어른으로 빚어질 수 있는 사람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과 의지로 도덕을 추구하는 사람의 종착지는 자기의입니다. 자기의는 하나님께서 가장 더럽게 생각하는 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입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자기의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되고 더러운 것입니다. 은혜 없는 도덕, 은혜 없는 종교의 끝은 자기의입니다. 여기에 도덕과 신앙,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있습니다.

단지 성품이 아니라 열매인 성품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추구할 것은 그냥 성품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면, 그는 신자가 아니라 종교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결과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신자가 추구할 것은 성령의 열매인 성품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분명히 성품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에 제기한 문제, 성품이냐 열매냐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의문이 남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믿음은 좋은데 왜 성품은 형편없지?”하는 의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신학적 성경적 답변은 이것입니다. “성품이 형편없다는 것은 그의 믿음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데 성품이 형편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숙한 믿음은 성숙한 성품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성품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것이 신자인 우리가 추구하는 은혜입니다.
정확하게 아십시오. 우리는 도덕적 사람이 되라고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우리의 의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도덕적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서 더러운 걸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 순종의 삶으로써 그 의를 우리를 위해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믿는 자는 은혜로 그것을 거저 받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날마다 주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보는 사람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감격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고 그 안에서 맺어지는 것은 단지 인간 의지가 만들어낸 도덕적 성품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자기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은혜를 사모합시다. 오, 주께서 우리를 은혜로써 빚어주사 성령의 열매를 가득 맺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게 하시기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