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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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1) -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

마태복음 25:1- 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12-28

말씀내용
오늘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비유들을 중심으로 주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1/3 정도가 비유일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는 ‘천상의 의미를 지닌 지상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어 보이는 삶 속에서의 이야기인 비유를 사용하여 깊은 영적 진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2014년을 마감하는 마지막 주일인 오늘, 본문의 이 비유가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먼저 이 비유를 상고하고, 비유에 대한 서론적인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려고 합니다.
1. 결혼식 이야기?비유를 이해하기 위한 시대 정황
이 비유는 결혼식 이야기입니다. 결혼식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익숙한 소재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은 오늘날 우리의 결혼식과는 너무나 달라서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결혼 풍습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의 결혼식은 대개 한 주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신랑은 자기 집에서 들러리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에 와서 신부와 신부 들러리들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게 되는데, 대개는 밤에 왔고 신부는 들러리 친구들과 함께 신랑의 행렬을 기다립니다. 문제는 신랑이 언제 도착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보통 신랑 일행이 밤에 횃불(본문에서는 등)을 들고 신부의 집에 오게 되면 기다리던 신부와 들러리들 역시 횃불을 준비하고 있다가 밤거리를 밝히면서 신랑의 집으로 가서 결혼식을 하고 며칠이고 혼인 잔치를 벌이게 됩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갈릴리 지방을 여행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차로 지나던 중 신부 들러리들이 거리에서 춤을 추는 광경을 보았답니다. 그들은 신부 집 앞의 거리에서 신랑 일행을 기다리는 신부 들러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통역자에게 결혼식을 구경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신랑이 오늘 밤에 올지 내일 밤에 올지 아니면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결혼식을 구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대답을 했답니다. 이게 유대인들의 결혼 풍속이고 이 비유의 배경입니다.
2. 비유 이해(관찰)
A. 슬기 있는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이 비유에서 열 처녀는 신부의 들러리들입니다. 주님은 그들 중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실상 묘사되고 있는 그들의 행동과 모습만으로는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을 거의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 결혼식에 초청받았고, 거절하지 않고 와서 들러리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 똑같이 신랑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신랑이 오는 시간이 더뎌지자 그들은 다 똑같이 졸고 있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자는 동안에 슬기 있는 처녀들은 깨어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 졸며 잘새”라고 말씀합니다(5). 그때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하는 소리를 듣고 다 일어나 등을 준비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차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B. 슬기 있는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고 미련한 처녀들은 준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이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시간에 미련한 처녀들과 지혜로운 처녀들이 갈립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시간이 지체될 것을 대비하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부탁하지만 슬기 있는 처녀들은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말합니다. 당시는 요즘처럼 24시간 문을 여는 가게는 없었습니다. 문을 두드려 가게 주인을 깨워서 사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 행렬은 도착했고 기름을 준비해두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을 따라서 혼인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문은 닫혔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10). 그 후에 미련한 처녀들이 도착해서 문을 두드리며 신랑을 부릅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이것은 마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마 7:21). 신랑은 말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이 대답은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고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결국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미련한 처녀들은 자신들이 원했고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맙니다.
3. ‘결정적인 시간’에 관한 이야기
자,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신 교훈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먼저 이 비유가 ‘결정적인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시간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A. ‘그 때에’(1) 그리고 ‘그 날과 그 때’(13)
먼저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비유 앞의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24장 42절과 4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 때에’라는 말은 이 비유가 바로 이 때와 관계가 있는 말씀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 어떻게 이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까?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여기서도 주님은 ‘그 날’ 그리고 ‘그 때’를 말씀하십니다. 그 결정적인 시간이 언제인지는 알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결정적인 시간은 신랑이 오는 때이고 이것은 바로 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고 주님을 만나는 때입니다.
B. 크로노스(chronos)가 아닌 카이로스(kairos)
만일 이 결정적인 시간이 기념일이나 생일처럼 온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시계로 측정되거나 계산되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건의 시간, 즉 카이로스입니다. 결정적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옵니다. 죽음으로 혹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그 결정적 시간은 우리의 인생과 역사 속에 찾아옵니다.
C. 늘 준비된 상태로 살아라.
그렇다면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교훈하시는 바는 분명해집니다. 그 결정적인 때가 언제 오더라도 늘 준비된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의 결론인 13절과 일치합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사실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언제 주님께서 오셔도 준비된 상태로 주님을 맞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4. 해석과 관련된 고려사항들
비유를 주신 주님의 의도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살펴야 할 세부적인 내용들이 더 있습니다.
A. 혼인잔치=어린 양의 혼인잔치(계 19:7)
우리가 나중에 살펴볼 기회가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이 비유 말고도 하나님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신 경우가 있었습니다(마 22:1~14; 눅 14:15~24). 또 요한계시록 19장 7절은 혼인잔치를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주님의 재림의 때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교회는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주님은 혼인잔치를 하나님 나라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가 신부가 아니라는 이 점이 비유 해석의 원리를 가르쳐주는 중요한 부분인데, 주님께서는 대개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우리가 열 처녀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과 기름이 각각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주님의 비유를 풀려고 하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시는 핵심 교훈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신부인 줄 알았는데 신부가 아니고 들러리로구나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B. 신앙고백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오늘 이 비유는 특별히 신앙고백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열 처녀는 모두가 다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여 등을 가지고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다 신앙고백자들입니다. 오늘날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다 교회당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고, 다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들 안에는 미련한 처녀와 슬기 있는 처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원했지만 모두가 혼인잔치에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에 참으로 우리가 자신을 살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C. 결정적인 차이가 결정적인 시간에 드러난다.
신랑이 오기 전까지는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 있는 처녀들 사이에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지만, 결정적인 시간이 오자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신앙 생활을 합니다.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눕니다. 열 처녀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다 졸고 잔 것에서도 그들은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시간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갈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생에서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을 잘 안다고 해도 알 수 없는 게 사람입니다. 사람의 진정한 성품이나 신앙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위기가 왔을 때입니다. 사람은 위기의 때에 평상시 갖고 있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성품도, 신앙도 그렇습니다. 위기의 때에 내가 드러나는 나의 성품과 신앙이 우리의 실상과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소홀히 여기면 자신을 속이기 쉽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약 1:22). 결정적인 시간이 오면 우리가 누구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미련한 자인지, 슬기 있는 자인지 드러납니다. 그전에 우리 인생을 통하여 우리가 스스로를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십니다. 저는 그 결정적인 시간에 우리가 다 준비된 자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D. 기름은 빌려주거나 양도할 수 없다(non-transferable).
결정적인 차이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는가 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가장 흔히 했던 오해가 ‘기름은 성령님’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비유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미련한 처녀들에게 기름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최소량의 기름을 가지고 등을 켰던 사람들입니다. 등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늦게 오자, 기름이 다하여 그들의 등불이 꺼져가게 되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닳아서 없어질 수 없으시고, 계시다가 신자를 완전히 떠나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해석은 일면 은혜로워 보이나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채 신랑을 기다린 처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주님을 만난 준비가 되지 않은 채 그 문제를 도외시한 채 주님을 기다린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당에 앉아있는 많은 사람들의 상태가 이 미련한 처녀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사함을 받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고, 자신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의롭다함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며, 자신이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된 것을 알고 누리지 못하고 심지어는 그런 중차대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으면서 교회 생활에 재미를 붙이고 직분을 받고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러므로 슬기 있는 다섯 처녀가 기름을 좀 나눠달라는 요구를 거절한 것은 그 자체로 보면 매우 이기적인 행위로 보이지만, 사실 이와 같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E. 결정적인 때를 모른다. 그러므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이라는 결정적인 시간을 준비하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물론 그 결정적인 시간은 우리 개인에게는 죽음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죽음은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 이후에도 기회는 없습니다. 혼인잔치의 문이 닫힌 후에, “주여, 주여”라고 부르짖어보지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하는 대답만 들릴 뿐 문이 다시 열리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때를 모른다는 것, 그 때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다는 것을 비유는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라도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5. 당신은 준비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준비되셨습니까? 우리는 오늘 2014년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 해가 시작하는가 하면 또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우리는 해마다 이것을 경험하며 나이가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결정적인 시간이 언젠가 찾아올 것을 생각합니다. 그날은 홀연히 옵니다. 하지만 신랑이신 주님을 만날 소망을 가진 성도들에게 이것은 고약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다 함께 예배당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준비가 되어 있느냐? 내가 이 밤에 올 때, 너희는 준비가 되어 있느냐?” 주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쉼은 영원한 안식입니다. 죄짐을 진 인생, 열심히 수고하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생, 아무리 화려하게 이 땅에서 살아도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정죄 받아 영원한 지옥을 면할 수 없는 인생들에게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안에서 내 모든 죄가 사해지고 내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며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이 우리가 준비할 기름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요 주님으로 믿으십시오. 지금이 구원 받을 때입니다. 결정적인 시간이 10년 후나 20년 후나 그 이후에 올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미련함입니다. 그 때가 오늘 밤일수도 있고, 내일이거나 며칠 후가 될 수는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준비된 채로 이 교회당 문을 나서라는 음성을 들으십시오. 미국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오랜 수속기간이 필요하고 기다려야 하지만, 구원을 받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조금 후 교회당 문을 나설 때에는 교회당 문을 들어올 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나갈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그것은 언제 그 결정적인 시간이 와도 나는 준비되었다고 말하게 하는 권세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주님은 오늘 여러분에게 이 비유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죄인이 여기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제가 주를 믿나이다. 오,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제게 참된 믿음, 구원얻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사, 준비된 인생을 평안히 살다가 언제라도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라고 구하십시오. 이것이 슬기 있는 처녀들이 가졌던 은혜입니다. 여기에 슬기로운 처녀들이 누릴 안전함과 영원한 행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