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예수님의 비유 (9) -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

누가복음 18: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3-08

말씀내용
1. 하나님께서 기도에 침묵하실 때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라는 이 설교의 제목은 아마 여러분 대다수가 공감하는 주제일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나는 영력이 있어서 혹은 하나님과 관계가 특별해서 하는 기도마다 다 응답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는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신용카드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세 번이나 하나님께 구했던 기도를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을 압니다. 제가 여기서 거절이라고 말했습니다마는, 사도 바울이 이 말을 듣는다면 “아니, 그건 거절이 아니었지. 그것은 도리어 축복이었네.”라고 말할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한 기도도 거절되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서도 다윗은 그것을 거절이 아닌 더 큰 은혜의 축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시편에서 우리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라는 부르짖음을 봅니다(시 13:1~2). 이것은 마치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과부가 재판장에게 호소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욥은 깊은 고난 속에서 부르짖고 호소하고 항변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침묵하십니다. 그래서 욥은 말합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우리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는 심정입니다. 신자는 기도하는 것마다 척척 응답 받아서 문제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그런 착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왜 성경에 이런 이야기들을 기록하셨을까요? 왜 응답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고통스러운 기도들이 있는 것일까요? 이런 말씀들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가 잘못되었다든지, 우리의 믿음이 문제가 있다든지 하는 일차원적인 분석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줍니다. 네가 기도해도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고 변화가 없다면 네 믿음이 약해서 그런거라는 식으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더 커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양이 아니라 믿음의 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지는 참된 믿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믿음 즉 관계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하나 더 생각해보지요.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1~13).” 선하신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좋은 것을 자녀에게 아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고, 온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십니다. 이런 근거에서 우리는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2. 이 비유의 배경(17:22~37): 인자의 날의 지연
먼저 우리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의 상황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17장 22절에서 제자들에게 “날이 이르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날은 ‘인자의 날’입니다. 그 날은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을 것입니다. 인자의 날, 주님 재림의 날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의 날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날, 승리의 날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인자의 날이 언제 오느냐는 것입니다. 그날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때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날은 하나님의 정하신 날이지만 제자들은 지연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연이라는 상황이 바로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3. 비유의 이해(1~5)
이 비유는 첫 절에서 그 의도가 드러납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앞에서 언급한 상황들입니다. 기도하는데 기도가 응답 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상황 말입니다.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얼마든지 실패의 지점까지 갈 수 있고,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더 심한 고통의 자리에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상정하는 말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런 의미에서의 낙심을 알지 못합니다. 이 비유의 한 등장 인물은 재판장입니다. 그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독백처럼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라고 말합니다(4). 이 짧은 비유에 재판장의 성격이 두 번이나 반복된 것으로 볼 때, 특별한 강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은 그를 ‘불의한’ 재판장이라고 묘사합니다(6). 이 재판장의 첫 번째 특징은 그의 삶이 율법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은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판이 언젠가 최종 심판자 앞에서 재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사람을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사람에 대한 태도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 재판장의 두 번째 특징은 불의함입니다. 불의는 경건과 반대되는 세속성입니다. 세속성은 세상과 세상의 가치와 권세에 속한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관과 삶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관에서는 결국 자신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슬픈 사실은 이런 사람이 재판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힘을 가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힘입니다. 구약 시대에 여호사밧 왕은 유다 전국에 재판관들을 세우면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 (대하 19:6~7).” 이것이 재판관이 가져야 할 태도요 할 일입니다. 이 비유의 재판장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헤롯이나 로마제국의 임명을 받은 재판장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악명 높은 자들이었습니다. 뇌물을 받고 정의를 굽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재판장의 모습을 제자들이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비유의 두 번째 등장 인물은 과부입니다. 과부는 한 사회에서 재판장의 정반대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재판장이 힘있는 사람을 대표한다면, 과부는 한 사회의 힘 없고 무력한 자를 대표합니다. 이 과부는 풀어야 할 원한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사회에서 자기의 원한을 풀어 자신의 옳음을 입증해 주기를 바랄 수 있는 사람은 재판장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원한’이라는 단어를 네 번이나 사용하셨습니다(3,5,7,8). 과부는 끈덕지게 그 재판장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라고 호소합니다. 그녀의 요구는 단순히 내 편을 들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굽어진 정의로 인해서 자기가 당하게 된 억울한 일을 정의를 다시 세움으로써 자기 옳음을 입증해 달라는 요구입니다. 결국 과부의 끈덕진 호소에 불의한 재판장이 손을 듭니다. 이유가 5절에 나옵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이 재판장은 자기 명성 보다 그저 감정적으로 귀찮아서 그 원한을 풀어주기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비유의 내용입니다.
4.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교훈(6~8)
A. 번거롭게 밤낮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
이 비유를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장도 과부가 열심히 끈덕지게 부탁하니까 들어주지 않았느냐? 그러니 끈덕지게 하나님께서 귀찮으실 정도로 기도해라. 그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 받는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핵심 교훈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불의한 재판장이 한 말에 제자들의 주의를 모으십니다(6). 다시 5절입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불의한 재판장이 이 정도라면,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 주님께서 묻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7).”
B. 비유의 핵심교훈: 불의한 재판장 vs. 선하신 하나님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 불의한 재판장과 선하신 하나님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유의 핵심이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장도 귀찮아서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그 자녀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8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주님의 강조는 드러납니다. 불의한 재판장은 한동안 과부의 호소를 듣지 않고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은 뇌물을 줄 능력도 없는 과부의 원한을 들을 생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관계에 대비되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과 ‘택하신 자들’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자의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택하신 자들의 원한’입니다. 택하신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C. 택하신 자들=과부
이 세상에서, 그리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비유 속의 과부와 같습니다. 세상은 불의한 재판관이 다스리는 것과 같아서 종종 정의가 굽어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살아가면서 억울한 일들을 겪습니다. 신앙을 지키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롬 12:2), ‘이 세상 풍조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지 않는’ 삶입니다(엡 2:2).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합니다(요 16:33).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아무리 많은 불의를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판결하시는 최종 법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의 원한을 푸시고 정의를 온전히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엄밀한 최종 법정에서 아무도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 심판장이신 주님의 의의 기준을 만족시킬 자는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결국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택한 자들의 무고를 입증해주실 것입니다. 정의는 반드시 세워집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인자의 때, 바로 주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D. 인자가 올 때(8)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비유는 배경 설명에서 말했듯이, ‘인자가 올 때’에 초점을 둔 종말론적 비유입니다. 성도는 이 날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 모든 것을 갚아주실 것을 알고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신자의 소망은 그 날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렇습니까? 여러분의 소망이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꿈을 이루는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오시는 날에 있습니까? 주님께서 오실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그때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믿음을 보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 믿음은 낙심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E. 정의를 추구하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무엇이든지 기도를 열심히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과부의 요청은 비록 그녀 개인이 경험한 불의의 사건이지만,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기도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하신 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감각은 바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성품과 속성과 기준입니다. 정의가 그 하나입니다. 신자는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의 기준을 가지고 정의를 추구하는 백성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억울한 일을 겪고 또 봅니다. 그들은 미련하고 세상 이치를 모르는 자로 여겨집니다. 여기서 원한이 생깁니다. 그리고 원한이 기도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그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조건들을 구하는 것입니까? 정의가 굽어진 세상에 굴복하고 적응하여 잘 사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여러분의 기도의 중심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고 인자의 오실 날을 바라보십시오. 원한을 가진 과부만이 재판장에게 끈덕지게 호소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를 추구하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하나님께 호소할 것입니다. 단지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불의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속에 나타나는 모든 불의에 대해서 우리는 최종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호소하고 고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영광 중에 오실 때 그들의 믿음을 보실 것입니다.
F. ‘오래 참으시겠느냐?’와(7) ‘속히’(8)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장처럼 우리 정성과 열심이 차서 귀찮아지실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고 하시고(7)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말씀하십니다(8). 속히 들어주신다는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말입니다. 궁극적 판결은 주님 오실 때 내려집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통치는 이 세상에 임했습니다. 그 나라의 통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을 주심으로써 구약의 모든 약속의 성취 속으로 신자들은 들어와서 살고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판결하시는 심판은 재림이라는 사건보다 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 주님의 심판은 시작되었고 신자들은 구원의 유익을 이미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신자들에게는 장래 영광의 기업을 온전하게 누릴 은혜가 기다리고 있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오래 참으시겠느냐”와 “속히......갚아주신다”는 말은 단순히 시간만이 아니라 불의한 재판장과는 전혀 다른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5. 교훈과 적용
A. 하나님께서 아신다(욥 23:10).
이제 비유의 교훈을 우리 삶에 적용해보자면, 가장 먼저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십니까? 우리의 사정, 우리의 원한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말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자기의 택하신 자녀들을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그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상황을 주목하고 아십니다. 앞에서 욥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우리도 이런 상황을 겪습니다. 그래서 더는 기도하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욥기의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나는 모릅니다. 나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 아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혼란스러운 현실 앞에서, 칠흑 같은 인생의 어둠 속에서 이것을 알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아십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의 앞을 모르지만 오직 그가 아십니다. 그래서 나는 그 길을 계속해서 오늘도 걸어갑니다. 이것이 신자의 영광스러운 고백입니다.
B.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들으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습니까? 정성이 찰 때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정성에 의해서 감동을 받으실 때까지 무시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당장 어떤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 같을 때, 우리가 기도해도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는 것 같을 때 우리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의 말 한 단어도 놓치지 않으시고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시편에는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시는 주님을 시편 기자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C.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성취하신다(계 6:9~10; 8:3~6; 21:5~7).
하나님께서 듣기만 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일하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이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이미 일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야 조금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밀가루 속에 감추인 누룩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땅 속에 심긴 겨자씨처럼 이미 현존합니다. 하나님은 통치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적 성취는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어가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 6장 9~10절을 봅시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순교자들이 하늘 법정을 향하여 호소하는 장면입니다. 과부의 기도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 과부처럼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삽니다. 해결할 수 없는 억울한 일들을 겪습니다. 성도들은 다 이 기도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번에는 요한계시록 8장 3~5절을 보지요.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성도의 기도가 합해진 금 향로가 쏟아질 때 심판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성취해가십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기도하면서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7절을 봅시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기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인자께서 오셔서 그 안에서 믿음을 볼 자입니다. 그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 하늘의 최고 법정에 항소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믿음을 지키고 살려면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합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피하지도 마십시오. 당해야 한다면 당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굽은 것을 정의로 세울 최고 법정에 항소하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밤낮 부르짖는 것입니다. 종국에는 주님께서 우리 눈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계 21:4).
D. 응답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당신의 영광의 그릇으로 빚으신다.
마지막 적용으로 하나를 더 말하겠습니다. 응답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기도 속에서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영광의 그릇으로 빚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당신의 자녀들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단 한 순간도 자녀들의 기도를 흘려 듣지 않으십니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시고 택하신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시지 않으시며 자녀들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늘의 아버지십니다. 이 일로 인해 우리는 기도하면서 낙심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기뻐하며 감사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9-22 12:21:47 설교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