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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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12) - 만 달란트의 은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마태복음 18:21-3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3-29

말씀내용
1. 비유의 배경(마 18:1~20):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존귀한 자녀요, 네 형제다.”
자기 중심성은 타락한 인간이 가진 본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녀들도 이 본성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은 신자는 그 은혜에 인생의 모든 것을 의존해서 살아가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롬 6:14). 신자는 ‘은혜 아래’ 있는 자입니다. 본문의 비유가 나오는 마태복음 18장은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가?’하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이 질문은 제자들이 여전히 자기 중심적 사고에 젖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그들 앞에 세우시고 크고 작음의 문제를 넘어서 ‘어린 아이’처럼 될 것을 요구하십니다. 당시 어린 아이는 요즘과 달리 가장 보잘것없고 미천하고 주목 받지 못하고 함부로 다루어지는 존재였습니다. 어린 아이는 제자들의 관점에서는 가장 낮은 자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크고 높은 자가 되는 관심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가 되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4).” 그리고 6절에서 주님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는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보잘것없다고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말씀하시고(12~13) 15절에서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15~20). 형제의 범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이 말씀은 교회의 권징에 대한 중요한 본문입니다. 18장의 흐름에는 ‘어린 아이’,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길 잃은 양 한 마리’ 그리고 ‘형제’가 등장합니다. 모두가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귀하고 천한 세상 기준이 없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배경이고 전제입니다. “이는 네 형제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존귀한 자녀다”라는 관점이 비유를 관통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하찮고 모자라 보여도 그렇습니다.
2. 베드로의 질문과 주님의 대답(21~22)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듣던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님께 질문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이 질문을 하는 베드로의 얼굴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말할 때 그의 얼굴은 의기양양한 대인배다움을 드러내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토록 어린 아이, 작은 자, 잃어버린 양, 형제의 존귀함을 강조하셨으니 저들 중 하나가 내게 잘못을 한다고 해도 내가 일곱 번까지 용서해 줄 의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대한 세 번까지 용서해 주라고 가르친 랍비들의 가르침을 베드로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적용하여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에 두 배를 넘는 용서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봅시다. 용서는 우리 인생에서 경험하는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입니다.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는 인생을 송두리째 파멸시키게 하는 복수심, 즉 용서하지 않는 마음의 무서움을 보여줍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짧은 인생을 통해서도 용서는 한 번도 하기 어렵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압니다. 랍비들이 가르친 대로 세 번까지 용서하는 일도 거의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제안한 일곱 번의 용서는 정말 대단한 수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순간 베드로와 제자들은 대경실색했을 것입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단지 490번이 아니라 완전수를 중복하심으로써 무제한의 용서를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비유의 내용(23~34)
이런 제자들을 보시면서 주님께서는 무제한의 용서를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이 비유는 천국에 속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용서라는 것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다른 천국 비유들과 같은 방식으로 이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여기서 종들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노예가 아니라 임금을 모시는 고위 신하들을 가리킵니다. 임금이 결산해야 하는 신하 중에 ‘만 달란트 빚진 자(신하) 하나’가 등장합니다(24). 제자들은 여기서도 놀랐을 것입니다. 신하가 임금에게 진 빚의 액수 때문입니다.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입니다. 데나리온은 당시 유대 사회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까 한 달란트는 6000일의 품삯이고 평범한 한 노동자의 20년 벌이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만 달란트라면 6000만 데나리온이고 한 노동자의 20만년 벌이에 해당됩니다. 현대 수치로 환산하면 60억 달러이고 한화로는 6조원에 달합니다. 주전 202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전쟁인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패했을 때 로마가 카르타고에 요구한 배상금이 50년 간 매년 은 1만 달란트였는데, 이것은 한 나라가 배상하기에도 무거운 액수였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하는 임금에게 천문학적인 빚을 진 상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비유에서 종종 과장법으로써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를 강조하시고 청중들의 주의를 끄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나 오늘날의 현실세계에서도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당연히 그 신하는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임금은 고대의 관습대로, 그 신하 자신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합니다(25). 하지만 이런 조치는 당시 노예의 가격이 500~2000데나리온이었다고 볼 때, 빚을 갚는 행위라기 보다는 빚을 갚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임금의 무서운 명령 앞에서 신하는 엎드려 절하면서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조아려 말합니다(26). 물론 그의 이 말은 받아들여질 수도 없는 말입니다. 설령, 임금이 기간을 연장해 준다고 하더라도 만 달란트의 빚은 그의 인생에서 벌어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하의 상황은 절망 자체입니다. 이 때 반전이 일어납니다.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 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준 것입니다(27). 제자들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놀랐을 것입니다. 한 두 푼도 아니고 만 달란트를 아무 조건 없이 그냥 탕감해 주다니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 역사에 이런 임금에 대한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 신하는 자비한 임금으로부터 만 달란트의 빚을 한 순간에 탕감 받고 더 이상 빚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 몸으로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신하의 기분을 상상 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비유의 두 번째 장면이 시작됩니다(28~30).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신하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길에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 한 사람과 마주치게 됩니다.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백 일치 품삯 그러니까 약 4개월 벌이에 해당하고 만 달란트에 비하면 60만분의 1입니다. 그러자 이 신하는 “아니, 이 놈이 왜 지금까지 얼마 되지도 않는 빚을 갚지 않고 있나”하는 괘씸한 생각에 그의 목덜미를 잡고 “빚을 갚으라”고 윽박지릅니다(28). 그러자 그 동료가 엎드려서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빕니다(29). 이 장면은 조금 전에 임금에게 만 달란트를 빚진 신하가 임금에게 보여준 태도와 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에 빚진 동료에게 달려들었다 해도, 순간 그는 조금 전 임금 앞에서의 자기 모습을 이 친구에게서 보았을지 모릅니다. 아니, 봐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돌아봄이 그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어났지만 그 마음을 눌렀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이 불쌍한 친구를 옥에 가두고 맙니다.
비유는 세 번째 장면으로 넘어갑니다(31~34). 길에서 벌어진 일을 다른 동료들이 보았습니다. 이것은 동료들의 눈에도 납득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 은혜를 알지 못하는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임금에게 이 일을 다 고합니다. 그러자 임금이 다시 그 신하를 불러 말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엄히 질책합니다(32~33). 이 신하는 실로 ‘악했고’ 자신이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로서의 모습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임금은 진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깁니다(34). 옥졸들의 문자적 의미는 고문하는 자들인데 채무자와 그 가족들에게 갖은 압력을 가해 빚을 갚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이 신하가 만 달란트라는 천문학적인 빚을 다 갚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그는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형벌에 처해진다는 것, 즉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암시하기 위해서 사용한 의도적인 용어인 것입니다.
4. 만 달란트!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교훈하시려고 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비유의 결론으로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것입니다(35). 아주 하찮아 보이는 형제의 잘못에 대해서도 무제한의 그리고 마음으로부터의 용서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살 수 있는 영광스러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성경에서는 종종 죄를 ‘빚’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그렇게 쓰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죄’라는 헬라어 단어는 빚을 의미하는 말이고, ‘사하여(용서하여)’라는 단어는 오늘 비유에서 ‘탕감하다’(27,32) 또는 ‘용서한다’(35)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 비유에서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오’의 대조는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죄 용서의 크기와 형제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만 달란트’의 은혜입니다. ‘만’은 당시에 수를 세는 가장 큰 단위였고 ‘달란트’는 화폐의 가장 큰 단위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주님께서는 말로 표현하실 수 있는 최고의 액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A. ‘만 달란트’ = 인간의 절망적 실존
첫째로 ‘만 달란트의 빚’은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보여줍니다. 만 달란트는 인간이 영광의 하나님을 향하여 범한 죄의 크기 그리고 그 죄를 갚을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보여줍니다. 그 죄의 빚을 진 인생은 답이 없고 길이 없는 절망 자체입니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는 것만이 그가 이 빚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부유해질 수 있고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영예를 얻을 수도 있고 원하는 꿈을 성취하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여러분은 ‘만 달란트의 빚’이라는 인간 보편의 실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행하는 어떤 업적도 ‘만 달란트의 빚’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 힘과 노력으로 이 빚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의 속박이라는 실존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자는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B. ‘만 달란트’ =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은혜
사실 이 신하에게 10년의 유예 기간을 더 준다고 해도 그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이 절망의 실존에서 빚진 신하를 풀어줄 수 있는 것은 임금의 탕감(용서) 선언 밖에 없습니다.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겼고 그렇게 했습니다. 신하가 탕감 받은 것은 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만 달란트였습니다! 만 달란트는 하나님의 무한한 속죄의 은혜와 사랑을 보여줍니다. ‘무한’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것을 당시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금액으로 주님께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 금액은 한도가 있는 액수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머리와 가슴에서는 도무지 도달할 수 없고 상상 조차 불가능한 액수였습니다. 그것은 ‘무한’이라고 표현할만한 액수였습니다. 주님은 ‘만 달란트’로 하나님께서 절망의 실존에서 죄인을 풀어주시는 은혜를 표현하셨습니다. 만 달란트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속죄의 능력과 크기를 보여줍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일은 그저 말만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비가 무한하시지만 공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지만......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출 34:7).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벌을 받지 않는 죄는 없고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사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채무)문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써 만 달란트의 죄값을 치르신 것입니다(골 2:14). 이렇게 우리는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았고 갚을 수 없는 무한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런 은혜는 잊혀질 수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성정대로 행한다 할지라도 순간 은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은혜입니다. 그것은 만 달란트의 은혜입니다. 찬송가 216장이 만 달란트의 은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5. 복음: ‘그러나’(롬 3:21)와 ‘그러므로’(롬 12:1)
결국 이 비유는 복음의 핵심과 전체 구조를 온전히 드러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스린 죄인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에 처해있는지를 먼저 설명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그것은 임금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진 신하의 절망적 상태입니다. 이런 죄인의 절망적 상태를 설명하고 난 후에 사도는 3장 21절에서 복음을 제시하는데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시작합니다. 한글성경에 이 위대한 반전인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생략되어 있는 것이 큰 유감입니다마는, 헬라어 성경은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시작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것은 위대한 반전입니다.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극적인 반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차별 없는 은혜가 나타난 것입니다. 사도는 절망적인 죄인에게 나타난 복음의 은혜를 길게 설명한 후에 12장 1절에서 복음의 은혜를 입은 사람의 삶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지를 말하기 위해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의 남은 이야기는 만 달란트의 은혜를 받은 사람의 삶, 그 은혜가 역사하는 삶이 얼마나 영예스러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만 달란트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이제 이렇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그리고 성경이 복음을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이 비유에는 이 은혜의 복음이 온전하게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8년 반 동안 제가 죠이선교교회의 강단에서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했던 복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6. 은혜,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로마서의 논리 전개가 보여주듯,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방법이 은혜입니다. 아무리 무섭고 추하고 버려진 인생일지라도 만 달란트의 은혜가 바꾸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은혜는 일평생을 두고 우리 본성의 자기 중심성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복음으로 우리를 낳으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은혜는 성화의 동력입니다. 은혜는 신자가 살아가는 인생 전체의 동력입니다. 신자의 삶은 자기가 받은 은혜의 영광과 크기를 점점 더 알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무한한 것이기에 사도는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점점 더 많이 깨달아가기를 또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 그들 안에 충만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뿐입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도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한 마디로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크기를 에베소 성도들이 알게 되기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그 은혜를 아는 것이 신자가 인생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만 달란트’의 은혜를 점점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백 데나리온의 은혜가 아니라 만 달란트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신자의 성화입니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집니다. 그 은혜의 깨달음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우리를 자비하게 만듭니다(눅 6:36). 어떻게 우리는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할 수 있습니까(엡 4:32)?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성부 하나님의 은혜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점점 더 아는 것이 열쇠입니다. 은혜만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만듭니다. 이 은혜가 우리의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발의 모든 곳에 스며들고 이 은혜에 흠뻑 적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 은혜는 우리의 온갖 더러움과 약함과 추함을 다 덮고도 남는 은혜, 만 달란트의 은혜입니다.
7. 은혜가 교회를 세운다.
오늘 이 비유는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만 달란트의 은혜, 만 달란트의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하는 용서는 ‘백 데나리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죄용서와 은혜의 크기는 ‘만 달란트’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용서는 이 비유에 나타난 수치로 표현하자면 60만분의 1에 불과합니다. 성도가 만 달란트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형제의 백 데나리온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평생 무한히 반복해도 되는 일이고 그렇게 할 일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사람을 단 한 번이라도 용서할 수 없는 본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성도는 자신의 영혼의 저장고에 하나님의 은혜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저장고를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갈 때 그가 형제를 용서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던 바로 그 일입니다. 이런 은혜가 교회를 세웁니다. 교회가 만 달란트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공동체, 용서받은 자들의 공동체라면, 교회의 모든 관계는 용서라는 특징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구별되게 하는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낳을 뿐 아니라 교회를 세웁니다. 저는 8년 반 전에 성경적인 교회, 목사의 뛰어난 능력이나 탁월한 프로그램이나 훌륭한 교인들로 설명되지 않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하나로 세워지는 교회를 보기를 간절히 원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죠이선교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죠이선교교회의 강단에서 하는 마지막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낳을 뿐 아니라 교회를 세운다”는 명제를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낳고 세운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깨달아 알게 된 사람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바로 만 달란트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 그래서 그 은혜로 백 데나리온의 용서를 하고 또 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워가시는 방식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8. 만 달란트를 기억하십시오.
죠이선교교회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 영광스러운 교회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마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 2:3).” 여러분이 얻은 그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마십시오. 소홀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앞의 진정한 현실은 여러분이 목을 매고 살아갈지도 모르는 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만 달란트의 은혜입니다. 일평생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만 달란트의 은혜와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더욱 더 알아가십시오. 그 은혜에 적셔지고 그 은혜에 압도당하십시오. 그 은혜로 여러분의 인생이 설명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만 달란트의 은혜를 받은 사람임을 여러분이 형제를 향하여 무한히 반복하는 용서를 통해서 나타내십시오. 이것은 은혜 받은 자의 의무사항이 아니라 은혜 받은 신자의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만 달란트의 은혜를 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입니다. 그 은혜로 여러분의 인생과 죠이선교교회가 설명되게 하십시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그 ‘만 달란트’를 기억하십시오. 만 달란트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살 수 있는 영광스러운 삶을 사십시오.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납하고 안아주는 삶을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