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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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11) - 보상이 아니라 은혜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태복음 20:1-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3-22

말씀내용
1. 문맥(마 19:16~30)
A. 보상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적절한 동기인가?
보상을 바라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적절한 동기일까요? 물론 주님께서는 천국에서의 상급을 분명하게 언급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그리고 오늘 본문의 비유는 보상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비유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19장 16절에서 22절은 주님께 찾아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가?” 물은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율법을 지킨다고 말하는 이 사람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는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이 상황을 정리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씀하십니다(23~26).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 보다 어렵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에는 부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아무도 못 들어간다는 말이 아닌가 하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는 몹시 놀랐고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인간은 아무도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부자에 견주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주목하던 베드로가 드디어 입을 엽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 말에서 베드로의 심정이 어떤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첫째로 그는 부자 청년과는 달리 자기들은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는 생각을 피력합니다.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셨으니(21) 베드로가 그 말씀을 듣고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말했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부자 청년이 떠나간 후에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을 듣고 그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자기들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가 하는 두려움과 의심으로 질문을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의 의중이 무엇이든 주님께서는 그의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질책하지 않으시고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8~29).” 먼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얻게 될 영광이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집, 형제, 자매, 부모, 자식, 전토를 버린 것에 대하여 여러 배를 받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다른 공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현세에 누리는 것이고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말씀은 내세에 관한 언급입니다(막 10:30; 눅 18:30).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보상이 있다는 것을 확증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다시 묻습니다. 보상을 바라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적절한 동기입니까?
B.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19:30; 20:16).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문맥상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비유를 둘러싸고 있는 19장 30절과 20장 16절은 유사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20:16).” 나중 되고 먼저 됨의 순서만 바뀌었을 뿐 동일한 내용입니다. 19장 30절이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 것은 이 말씀이 보상이 있다는 긍정적 답변에 대한 주의사항으로 주어진 것임을 표시합니다. 이것을 명심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또 이 비유를 마치면서 다시 그 주의사항을 상기시키십니다. 20장 16절에 ‘이와 같이’라는 말은 이 비유의 내용이 바로 그것을 설명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2. 비유의 내용(20:1~15)
비유의 내용을 보지요. 이 비유도 천국 비유로서, “천국은 마치 ~과 같으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1). 천국의 특징, 원리를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집 주인은 포도원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가 포도원에 추수할 때가 되어서 일꾼을 필요로 합니다. 일꾼을 부르려고 이른 아침 6시에 나가 장터에서 일을 찾는 사람들에게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게 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아침 6시에서 저녁 6시까지 12시간을 일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른 아침’은 오전 6시를 가리킵니다. 주인은 오전 9시(제삼시)에도 장터에 가서 사람들을 포도원에 보내 일을 하게 하면서 ‘상당한’ 보상을 약속합니다. 이것은 일한 시간에 합당한 보상을 주겠다는 말입니다. 주인은 낮 12시, 오후 3시에 또 나가서 같은 방식으로 일꾼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인 오후 5시에 주인은 다시 한 번 장터에 나가서 일을 찾지 못하고 하루를 허비한 자들을 불러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이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간 품꾼들은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들을 고용해주는 주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 장터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7). 해가 저물자 주인은 청지기에게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명합니다(8). 오후 5시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품꾼이 제일 먼저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먼저 온 품꾼들은 이것을 보고는 자기들은 더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 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주인에 대한 원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원망을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먼저 온 자들, 오전 6시에 온 사람들입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2).” 우리 중 그 누구도 이 원망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말이고 우리는 이런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3~15)” 주인이 약속한 대로 그에게 지급했다는 점에서 주인의 말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원망하는 품꾼을 ‘친구’라고 부른 것은 주인의 부드러운 태도를 보여줍니다. 주인은 자기 돈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줄 것보다 덜 준 것이 아니라 더 준 것이기에 선합니다. 그 주인의 선함을 먼저 온 품꾼들이 악하게 본 것이 문제입니다.
3. 보상이 아니라 은혜: ‘공평함 대 은혜’의 문제
먼저 온 품꾼의 원망과 주인의 대답 사이에는 보상이냐 은혜냐, 혹은 공평함이냐 은혜냐 하는 두 주제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품꾼의 원망은 공평함이라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즉,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 종일 12시간을 수고하고 더위를 견딘 자신에게 똑 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이 공평함은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모두에게 똑같이 각각 한 데나리온씩 지급했습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당시 하루 일해서 하루 먹고 사는 품꾼들의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었는데 이것은 한 가족이 하루 먹고 사는데 꼭 필요한 비용이었습니다. 비록 오후 5시가 되도록 써주는 사람이 없어서 빈둥거려야 했던 사람들도 가족들과 한날을 먹고 살기 위해서는 한 데나리온이 필요했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알았기에 그들이 얼마나 일을 했는가에 대한 계산이 아니라 그들의 하루 필요라는 기준에서 그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입니다. 하지만 먼저 온 품꾼의 원망에 나타나는 공평함의 기준은 다른 사람의 생존권을 무시하고 위협하는 결과를 요구하기에 은혜와 대립됩니다. 공평은 은혜를 담을 수 없고 은혜는 공평의 잣대로 잴 수 없습니다. 이 비유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이 안에 보상과 은혜, 삯과 은혜라는 개념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A. “은혜보다 교회 안의 사람들을 더 화나게 하는 것도 없다.”(마이클 야코넬리)
“은혜보다 교회 안의 사람들을 더 화나게 하는 것도 없다”는 마이클 야코넬리의 말은 이 비유를 설명하기 적절한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공평함의 기준이 통용되기 때문에 은혜 때문에 화를 낼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은혜가 지배적 원리가 되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회입니다. 비유에서도 먼저 온 품꾼들을 화나게 한 것은 바로 은혜였습니다. 공평함의 기준으로 사는 사람은 은혜를 보면 화가 납니다. 우리가 이 품꾼의 원망에 공감을 표하는 것은 우리 역시 은혜에 대하여 화를 내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하신 하나님의 결정에 대하여 화를 냈습니다(욘 4). 나에게 주어진 관대한 은혜는 즐겁고 기쁘지만 남에게 주어지는 관대한 은혜는 우리를 화나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나에게는 은혜가 적용되기를 바라면서 남에게는 공평함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공평함의 잣대를 내세우는 한, 우리는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은혜를 느낄 수 없습니다. 첫째는 공평함의 잣대를 완전히 공정하게 나와 타인에게 적용하지 못하는 우리의 이기적 죄성 때문이고, 둘째는 타인에게 주어지는 은혜를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B. 영생은 수고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이 비유의 주제가 문맥상 앞에 있는 베드로의 보상 주제와 연결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보상을 이 세상의 기준과 방식인 노동에 대한 대가, 혹은 삯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먼저 온 품꾼들은 한 데나리온의 삯을 약속 받고 포도원에 들어왔고 이후에 들어온 품꾼들도 상당한 삯을 약속 받고 일을 했습니다. 품꾼들이 일을 한 동기는 분명히 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비유를 주님인 말씀인 “영생을 상속하리라”에 맞추려고 하면(19:29) 맞출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수고에 대한 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9장에서 부자 청년의 이야기의 주제는 영생이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19:16). 주님은 그가 떠난 후에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23).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19:27)?” 여기서 보상의 개념이 들어옵니다. 하지만 주님은 “보상 따위는 없어!”라고 매몰차게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현세에서도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서 영생을 상속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29). 보상은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보상을 공평함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면, 결국 먼저 온 품꾼들의 원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공평함은 정당함, 자격, 권리를 전제하는 말인데, 은혜의 정의가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호의이기에 은혜는 정당함이나 자격, 권리와 같은 단어들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먼저 온 품꾼은 자기가 하는 말이 정당하다고 여겼고, 자기가 한 데나리온 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주인이 나중 온 품꾼들에게 베푼 선함을 은혜로 볼 수 없었고 기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상을 바라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이 점에서 경계해야 할 태도입니다. 영생은 수고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일하기 전에 이미 얻은 것이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일한 후에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영생을 보상으로 얻으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상속은 유산을 상속받는다는 개념입니다. 상속자는 보상으로 유산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기 때문에 유산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생의 상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성령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현재적으로 누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C. 품꾼을 불러주는 주인
모든 품꾼들은 그들이 몇 시에 고용되었든지 상관없이 일정한 시간 동안 주인의 포도원에서 일을 했습니다. 오후 5시까지도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어서 빈둥거려야 했던 현실을 생각할 때, 품꾼으로 불러주었다는 사실에 이미 주인의 은혜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이른 아침 6시에, 그리고 오전 9시에, 낮 12시에, 또 오후 3시 그리고 심지어는 오후 5시에 계속해서 품꾼을 부르러 장터로 나갑니다. 나갈 때마다 일을 찾지 못해 빈둥거리고 있는 품꾼들이 있습니다. 이점에서 그들이 품꾼으로 포도원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인의 은혜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포도원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한 데나리온이라는 보상(삯)도 가능한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이라는 약속된 삯은 사실상 그들이 그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부름을 받은 은혜 위에서 가능해진 일입니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겠다는 것은 품꾼들의 결정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을 품꾼으로 불러주는 주인의 의지에 속한 것입니다. 이미 주인의 포도원에 들어와서 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은혜이고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가 쓰지는 않았으나 그의 이름을 이용하여 저술된 <이방인들을 부르심>이라는 고대 문서는 이 비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께서는 이 비유에서 은혜는 하나뿐이지만 부르심은 각양각색임을 밝히 보이신다. 오후 5시에 포도원에 갔어도 온종일 일한 사람들과 똑같은 보수를 받게 된 사람들은 분명히.... 날이 저물 때에, 즉 일생이 끝날 때에 하나님의 자비로 보수를 받는 사람들의 운명을 대표한다. 주께서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의 은혜의 탁월성을 나타내신다. 그들의 노동의 대가를 치르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와는 별도로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신다. 많이 수고했으나 늦게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도 이 처사를 보고 자기들이 받는 것은 일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기독교강요, 3.18.3 재인용). 품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놓치면 우리도 먼저 온 품꾼의 원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4. 교훈과 적용
이 비유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놀랍게 가르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행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은 것도 우리의 원망 사항이 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이 비유에서 어떤 한 품꾼도 부당 대우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약속된 것 보다 더 적게 받은 자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비유의 교훈적 적용을 살펴보지요.
A. 하나님은 채무자가 아니시다(롬 11:35).
먼저 하나님은 결코 채무자가 아니십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5)?”고 말합니다. 아무도 주님께 먼저 드리고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보상을 하시게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빚을 먼저 꿔드리고 빚 갚으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런 것이 보상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먼저 온 품꾼의 원망이 반영하는 태도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고백이고 찬송입니다. 은혜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우리가 자격과 권리를 주장하여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영역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지금 그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 이미 은혜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섬겼으니, 내가 이렇게 주를 위해서 고생을 하고 있으니 이런 보상을 받겠지 생각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보상이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보상이 은혜 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B. 보상이 섬김의 동기가 될 때 공동체의 연합을 깨뜨리게 된다.
다시 질문합니다. 보상이 하나님을 섬기는 합당한 동기가 될 수 있습니까? 은혜가 아닌 보상이 섬김의 동기가 될 때 공동체의 연합이 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고전 9:24). 그러니 서로 경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와 같은 언급들은 모두 은혜라는 대전제 위에서 주어지는 말들입니다. 은혜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권면은 없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우리의 모든 수고는 모두 은혜 위에서 이루어지는 은혜일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상을 동기로 주를 섬긴다면 우리는 공동체의 연합의 파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잦아들지 않을 것이고 저마다 공평함의 잣대를 들이밀 것입니다. 형제에게 주어지는 은혜 때문에 기분 나빠할 것입니다. 오직 은혜만이, 그리고 그 은혜를 은혜로 아는 자들만이 교회의 영적 연합과 하나됨을 지켜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C. 우리의 고백: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눅 17:10).”
마지막 적용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분부를 다 지켜 행했을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 세상을 살면서 자아의 신, 물질의 신, 세상의 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으로 섬기며 살게 하신 은혜에 감사해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저와 같이 무익한 종을 불러 주를 섬기게 하신 은혜, 무한 감사합니다. 할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임종의 침상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마지막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을 주를 섬기며 살아가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