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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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8) - 희생이 아닙니다: 보화와 진주의 비유

마태복음 13:44-4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3-01

말씀내용
1.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가?
이 단순한 두 개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천국의 특성이 무엇일까요? 이 두 비유로 어떤 설교를 할 수 있을까요? 자, 먼저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인물을 보라. 그들은 모두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서 보화를 차지했고 그 진주를 샀다. 우리도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이 해석은 옳습니까, 틀립니까? 주님께서는 지금 이 두 비유를 제자들에게만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에서 이 해석은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설교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의도에서 벗어난 해석입니다. 그럼, 이 비유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지요.
2. 비유의 해석
A.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44)
두 비유는 매우 유사합니다. 먼저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보지요. 한 사람이 우연히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잘 숨겨놓고 크게 기뻐하면서 돌아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매입함으로써 밭에 숨겨져 있던 보화를 합법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사람은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남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했을 수도 있겠지만, 예레미아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는 그 밭에서 일하는 일용노동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는 주인의 밭을 갈다가 주인을 확인할 수 없는 밭에 묻힌 보화를 발견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들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였습니다. 왜냐하면 고대에도 은행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보통 사람들은 대개 보화를 땅 속에 묻어두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그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고 말한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전쟁이나 변란이 일어날 때,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땅에 묻어두고 갔다고 돌아와서 찾는 경우들이 흔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는다든지 혹은 기타 다른 변고로 그 보화를 다시 캐내어 소유하지 못할 때 그 보화는 땅 속에서 세월의 풍상을 거쳐 어떤 이에 의해서 발견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근동의 설화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결국 그 밭을 사서 거기에 궁전을 짓고 자식을 주인의 딸과 결혼시켜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흔한 이야기를 비유로 사용하심으로써 천국의 특성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우연히 횡재한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그것도 기쁨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B. 진주의 비유(45~46)
두번째는 진주의 비유입니다. 사실 여기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고 말씀하시지만, 여기서도 천국의 비교 대상은 진주이지 상인은 아닙니다. 고대 근동에서 진주는 대단한 귀금속이었다고 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의 어머니에게 로마 은화 600만 세스터스(Sesteritius) 상당의 진주를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현재 미화로 70만불에 해당합니다. 그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1억 세스터스(1100만불)의 진주를 가졌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극히 값진 진주 하나’는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우연히 발견하였다면 여기 이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진주를 전문적으로 찾아 다니는 상인입니다. 여기서 ‘상인’이라는 단어는 그냥 소매상이 아니라 육지와 바다를 다니면서 무역을 하는 큰 규모의 상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 수리아인이나 아랍인들이 주로 진주를 취급하는 무역상을 했답니다. 이런 사람이 클레오파트라가 소유했던 진주 같은 것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는 당연히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진주와 집과 토지를 다 팔아서라도 그 진주를 사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결코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3. 비유의 전제: 성령님의 중생시키시는 사역
두 비유는 비슷하지만 차이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보화를 발견했고 또 한 사람은 구하고 찾다가 값진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양상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복음을 듣고 회심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랜 세월을 추구하고 찾다가 비로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사람은 열심히 찾고 추구하다가 발견한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복된가? 그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것을 찾지 않았는가?”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우연이냐, 추구했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이런 양상들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교리적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실 이 두 경우는 모두 성령님의 중생시키시는 은혜의 사역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만일 성령의 중생 사역이 없었다면 보화와 진주의 가치를 알고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사는 결단을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외면적으로 보는 것은 그 사람이 발견하고 가서 다 팔아 사는 행위지만, 성령님께서 은밀하게 그 심령 안에서 행하신 중생은 보이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14절을 보지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여기서 보화와 진주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도 보화이고 진주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고 영적인 눈으로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아니면 그 가치를 분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해석하자면, 이 두 사람은 성령님의 중생 역사가 있었고 그래서 자기들이 발견한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았고, 그래서 자기들의 소유를 다 팔아서 사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천국의 가치를 알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중생시키신 사람은 천국의 가치 앞에서 세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중생한 사람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그 가치를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들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과 진주를 사는 행위는 결코 자연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이 점에서 믿지 않는 사람의 이해를 받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보화와 진주를 발견한 사람들의 고백이 이렇게 표현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 119:127).” 이것이 구약 성도의 고백이라면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의 고백을 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a).” 이런 고백들은 그들이 어떤 지식을 학습해서 획득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들을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고백들입니다. 이런 중생의 역사가 주님의 두 비유에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4. 천국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치러야 하는 비용? (마 4:20,22; 16:25~26; 19:21~22, 27~29)
이 두 사람은 모두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과 진주를 샀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버려두고(마 4:20)” 주님을 따랐고, 요한과 야고보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마 4:22)” 주님을 좇은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26).” 이것은 단지 소유만을 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잃을 것을 각오하고, 생명을 내놓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재물이 많은 청년의 이야기를 압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그는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습니다’(마 19:21~22). 부자 청년이 떠난 후 베드로는 주님에게 묻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8~29).”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온 베드로와 제자들은 과연 주님을 위해서 희생한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은 그게 희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 두 비유의 주인공들처럼 그들은 희생한 사람들이 아니라 도리어 횡재한 사람들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성경이 이와 관련해서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희생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희생이 아니고 치러야 할 대가 혹은 비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와 관련해서 비유로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8~33절입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망대를 건축하는 사람과 전쟁을 시작하는 왕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면 모두 일을 시작하기 전에 비용 계산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이루지 못할 일을 시작해서 중단하거나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 교훈은 이 비유를 둘러싸고 있는 26~27절과 33절에 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비용, 즉 천국의 아들들이 되는 비용입니다. 그것을 오늘 두 비유에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라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은 천국을 위해서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두 비유가 강조하고 있는 바, 그들이 보화와 진주의 가치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기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강요에 못이긴 헌신의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라도 그 가치를 제대로 알기만 하면 그렇게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보화와 진주를 살 것이라는 말입니다.
5. 비유를 이해하는 열쇠, 기쁨
이런 관점으로 비유를 이해할 때, 우리는 44절에 ‘기뻐하며’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 단어는 밭의 보화를 발견한 사람에게만 사용되었지만, 사실상 진주를 발견한 상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척도를 넘는 큰 기쁨이 한 인간을 사로잡으면 그 기쁨은 그를 감격시키고 그의 중심을 사로잡아 그의 마음을 압도한다. 모든 것은 발견된 보물의 광채 앞에서 빛을 잃는다. 아무리 비싼 값도 비싸게 보이지 않는다. 가장 값비싼 것의 무분별한 희생이 아주 자명한 것이 된다. 결정적인 것은, 이 두 비유의 주인공들이 소유물을 희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결심을 촉구한 동기 즉 그들이 발견한 것의 위용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도 이러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돌연한 시작에 관한 기쁜 소식은 우리를 압도하고 큰 기쁨을 주며 하나님의 공동체의 완성을 위해 삶 전체를 바치게 하고 가장 정열적인 희생을 감행하게 한다(예수의 비유, p. 194).” 이 기쁨이 열쇠입니다. 천국을 발견한 기쁨, 그리스도를 발견한 기쁨,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발견한 기쁨이 그로 하여금 자기의 소유를 다 팔게 만듭니다. 자기의 목숨도 아끼지 않게 만듭니다. 그 가치 앞에서 자기가 이전에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의 가치는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말할 만큼 모든 것은 그 빛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밭의 비유에서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았던” 돌밭이 가졌던 일시적 기쁨이 아닙니다(마 13:20).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빼앗을 자가 없는 기쁨,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인 것입니다(요 16:22). 여러분, 이런 기쁨을 아십니까? 이런 기쁨을 맛보았습니까? 이것이 천국을 발견한 자들, 천국을 소유하게 된 자들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그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하게 합니다. 자기 소유와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주를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과 복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 기쁨을 경험하고 맛본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다른 기쁨이나 쾌락과 그것을 바꾸지 않습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산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6. “나는 결코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두 사람의 예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먼저 20세기 최고의 설교가로 불리는 마틴 로이드존스입니다. 그는 20대 초반에 이미 영국 왕실과 상류층 인사들의 의료를 담당하는 영국 최고의 의료팀에 합류한 의사였습니다. 그의 장래는 보장되었고 유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씀의 사역자로 부르신다는 부담을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보장된 의사의 길을 완전히 내려놓고 남 웨일즈의 항구 지역인 에버라본에 거의 무너져가는 전도처 샌드필즈 미션 홀의 목회자가 됩니다. 당시 보장된 삶을 버리고 가난한 목사의 길을 선택한 로이드존스의 이야기는 굉장한 뉴스거리였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누구든 복음의 사자로 부르시는 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영예라고 생각합니다.”(로이드존스 평전1, p.266).
두번째로 아프리카 선교사로 삶을 드렸던 데이빗 리빙스턴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는 1857년 12월 4일 캠브리지 학생들에게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나로서는 하나님이 그런 직분에 나를 임명하신 것을 즐거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아프리카에서 나의 삶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쏟으며 보인 희생에 관하여 말합니다.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우리 하나님께 진 빚의 작은 부분을 되갚았을 뿐인 것을 희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건전한 행위, 선을 행한다는 의식, 마음의 평안, 장차 영광스러운 운명에 대한 밝은 소망으로 복된 상급을 가져다 주는 것이 희생입니까? 그런 관점의 말과 그런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단연코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특권이라고 말하십시오. 지금이나 과거의 걱정이나 질병이나 고난이나 위험은 앞서 말한 이생의 일반적인 편리함과 자선과 더불어 우리로 잠시 멈추게 하며 정신이 방황하게 하며 영혼이 가라앉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잠시 그렇게 되게 하십시오.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계시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결코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천국을 발견한 사람의 평범하고 당연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7. 교훈과 적용: 하나님께 부요한 자로 살아가는 것
이제 이 두 비유에서 발견한 교훈을 적용해봅시다. 주님께서는 탐심과 관련해서 한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알려진 것입니다(눅 12:16~21). 한 성공한 부자가 있습니다. 너무나 소출이 많아서 저장할 창고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평생 먹을 것이 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밤에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리고 이 비유의 뜻을 설명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세상의 재물을 자기를 위해서 쌓고 자기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사용하려고 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말씀하시고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보화와 진주를 발견하고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산 자들은 지혜로울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인생이 잘 사는 인생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2~34).”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 그리고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그렇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억지가 아니라, 그 가치를 알았기에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비록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해할 수도 없고 어리석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합니다. 기쁨으로 그렇게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로 횡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무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희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얻는 하나님 나라는 그들이 팔아 넘긴 모든 소유와 비교 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비밀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기독교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천국을 얻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희생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인생을 사는 은혜를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