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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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7) -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마태복음 13:31-3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2-22

말씀내용
1. 예수님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생각의 변화를 우리는 잠깐 추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주님의 권능에 압도되었고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흥분했었고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들 앞에 펼쳐지는 상황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주님의 고향인 갈릴리에서 사람들의 불신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어떤 권능도 행하지 않으셨고 소수의 사람들만을 고치고 가르치셨습니다(막 6:5~6).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주님의 가르침의 권능에 놀랐지만 주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예수님의 가르침에 격분하는 유대인들 특히 유대 당국자들의 반응은 심각해져 갔습니다. 한편 주님의 표적을 보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많기는 했지만 주님의 가르침에 걸려서 이탈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요 6:66). 제자들이나 멀리서 주님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전해진 가르침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교회 현실은 어떻습니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속화의 움직임은 점점 가속이 붙고 있습니다. 그 세속화는 사실상 반기독교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지 전통적 가치에 대한 반발과 역행이 아니라, 성경의 가치들이 하나같이 도전에 직면해있고 하나씩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조국교회는 이미 공공의 적으로 여겨지고 있고 개독교라는 말은 이제 흔해빠진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는 많지만 복음을 듣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삼상 3:1).”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천하에 불량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직을 이용해서 배를 불렸고 성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겁탈했습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무렵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이스라엘 장로들은 언약궤를 앞세워 나가면 이길 것이라는 전략을 냅니다. 그 시대의 영적 무지를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결국 블레셋에게 대패했고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었고 언약궤는 빼앗겼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마침 해산하던 비느하스의 아내는 비보를 듣고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짓고 죽습니다. 이가봇은 “영광이 어디 있느냐?” 즉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가 ‘이가봇’이라고 말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영광이 언약궤와 함께 이스라엘을 떠났습니까? 이것은 한 시대를 진단하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경적 대답은 그녀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자기 백성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설령 유대가 망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불에 타서 무너졌어도 하나님의 영광은 바벨론으로 붙잡혀가는 자기 백성과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빼앗기던 때에도 자기 백성들 중에 계셨습니다. 계실 뿐 아니라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조국의 교회를 떠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기 때문입니다(엡 1:23).
2. 겨자씨 비유의 교훈(31~32)
이런 문제를 인식하면서 이 비유의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31). 여기서 천국의 비교 대상은 겨자씨라기 보다는 겨자씨가 뿌려졌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고 하시지만(32), 사실 더 작은 씨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당시에 작은 것을 ‘겨자씨’에 비유하던 관습을 주님께서 그대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가령,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마 17:20). 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너희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 같다고 생각하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잘것없고 작고 미약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하십니다(32). 이것은 제국을 표현하는 이미지입니다. 에스겔 17:22~23을 보지요.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유다 백성들에게 에스겔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마치 불에 타다 남은 포도나무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처럼 스스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을 것인데, 그 가지는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되어 각종 새가 그 아래 깃들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좌절과 절망에 싸인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큰 나라를 이루도록 회복하실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에서도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는 제국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단 4:10~12). 또 주님께서는 겨자씨가 커서 나무가 된다고 하셨는데, 여기에는 비유의 과장적 요소가 있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크면 3~4미터까지도 자란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겨자는 나무라기 보다는 관목(shrub)에 속한답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표현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로 모여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될 것에 대한 종말론적인 암시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전세계적인 규모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겨자씨 비유는 그 씨가 너무나 작아서 뭔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이게 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작고 초라해서 보이지 않지만 결국 큰 나라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3. 누룩 비유의 교훈(33)
두 번째 비유는 누룩 비유입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33). 가루 서 말은 약 40리터, 100인분 정도의 빵을 만들 수 있는 양입니다. 그러니까 보통 주부들이 거의 경험하지 못할 큰 양입니다. 그 밀가루 안에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누룩이 있습니다. 누룩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밀가루를 100명 이상이 먹을 수 있게 부풀릴 것입니다. 누룩은 거의 언제나 성경에서 죄의 파급력을 부정적인 의미로 표현할 때 쓰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주님께서 부정적 의미로 말씀하셨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누룩의 파급력만을 말씀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가루 서 말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종말론적 성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룩의 비유도 겨자씨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보잘것없고 눈에 띄는 것이 없지만 결국 그 목적을 풍성하게 이룬다는 것입니다. 두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봐라, 지금은 아무 것도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성공할거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비유의 강조점: ‘크기’가 아니고 ‘시작과 끝의 대조’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 두 비유의 강조점은 크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크기를 강조하려고 하셨다면 겨자나무를 사용하시기 보다는 상수리나무나 참나무, 삼나무를 비유에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이 두 비유는 아주 하찮은 시작과 위대한 결과를 대조시키는데 그 강조점이 있습니다. 겨자씨나 밀가루 속에 감춰진 누룩은 잘 안 보이는 미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미한 시작에 비교하면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서구인들은 보통 과정에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면 근동 사람들은 처음과 끝을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작과 끝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주목하게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그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 눈에 보이고, 지금 너희가 느끼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한 일이 궁극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그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고 계시며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으로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그 일을 결국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고 계시며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하신다.
여기에 일반적 교훈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잘 안 보일 수 있고, 그 증거가 너무나 미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고 계십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눈 앞의 증거들은 말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결국 주님께서 오실 때 확연하게 하나님께서 일하신 성취와 결과가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참 중요합니다. 우리는 쉽게 낙심합니다. 그러나 이 두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자들은 낙심에서 소망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고후 5:7).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자리까지 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분임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눈에 근거가 되는 어떤 것을 확인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래서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설명이 불가능한 자리로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면서 맹인이었던 사람의 눈을 주님이 뜨게 해주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에게 설명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아는 한 가지는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이며, 그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누가 나면서 맹인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해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이 설명할 어떤 원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당신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눈에 어떤 증거가 있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가는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겸손하게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을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출발이었지만 애굽의 압제자인 바로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40년도 아닌 430년의 세월을 뒤집고 자유로운 민족이 되어 한 나라를 세웠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셨고, 그 430년 동안 신실하게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일하고 계셨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그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나이 40세에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나이가 80세가 되어 그것도 애굽의 왕자라는 신분이 아니라 미디안 광야의 목자로 늙어가고 있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본격적으로 무대에 등장합니다. 그러면 그 이전의 인생은 헛된 삶이었습니까?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빚어가고 계셨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포기하고도 남을만한 시간과 조건에서 극적으로 당신의 역사를 보이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보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루살렘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이 불타 없어질 수 있습니까? 선지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 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앗수르와 바벨론의 손에 넘기셨고 성전은 무참하게 불타버렸고 그 안의 모든 것들은 바벨론 제국의 전리품으로 옮겨졌습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망했고 사람들은 다 바벨론 제국으로 끌려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일하고 계셨습니다.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그리고 모르드개는 모두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일을 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인물들입니다. 유다라는 나라가 망했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를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긴 것이 이가봇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성육신하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리에서 일하신다는 것, 인간의 판단과 생각에 제한 받지 않으신다는 것, 하나님은 인간이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불가능이 하나님께는 가능함이고, 죽음이 하나님께서는 생명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통해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인간의 손에 의해 죽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다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독생자를 버리시고 저주하시고 율법의 형벌을 가하여 죽이심으로써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시기 위하여 가장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역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은 가장 놀랍게 일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써 자기 백성의 구원이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모든 사건들의 절정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계속해서 일하고 계시며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영광스럽게 세워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할 것입니다.
6. 하나님은 신자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일하신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시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가장 합당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어떤 원인이나 공로를 찾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아담 이래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망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망상은 질기게 인간의 삶을 조종하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자기 의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 시간이 우리에게는 대개 고난으로 경험됩니다. 우리의 예상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의 기대처럼 하나님께서 뭔가를 이루시고 보여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하고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어찌하여?”라고 묻거나 “얼마나 더 오래?”라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 고난이라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어가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상황입니다. 이 고난 속에서, 이 불가능한 절망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영광을 담지하는 영광스러운 그릇으로 빚어가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이 기막힌 하나님의 방법을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깨달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7. 적용적 교훈
A. 신자 개인의 성화에 적용
이 말씀을 적용할 때 우리는 먼저는 신자 개개인의 성화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지만 그 증거가 미미하고 열매가 눈에 띄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두 비유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결과를 만들어내신다고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지금은 미미해도 결국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뿐입니까? 신자는 어떤 상황에도 처할 수 있고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어떤 형편에 있어도 나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안다는 이 말은 얼마나 담대하고 영광스러운 말입니까? 신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모든 형편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난해도, 실패해도, 문제가 많은 중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환경 속에서, 이 환경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심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계시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B. 교회와 선교에 적용
이제 이 비유들의 교훈을 교회와 선교에 적용해보지요. 서두에 말씀드린대로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은 어둡습니다. 그러나 이가봇은 아닙니다. 교회는 승리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만큼의 열매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교회에 충만하게 계시며 당신의 방법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선교 역사의 초기 개척 선교사들은 첫 열매를 보기까지 수년 혹은 십 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던 경우들이 흔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어떻게 그 민족, 그 나라의 복음화를 이룰 수 있을까 염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어떻게 로마 제국의 300년 동안의 그치지 않는 박해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지난 2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그 일을 놀랍게 이루셨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C. 모든 불가능한 상황에서 신자의 믿음은 소망을 이룬다(롬 4:18~21).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상황에서, 고난 속에서 신자의 믿음은 소망을 이룹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고 하신 말씀을(롬 4:18) 그대로 이루십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이 처해 있는 모든 환경 속에서도 역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의 장성한 자리로 여러분을 빚어가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처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빚어가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하나도 볼 수 없고 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증거를 볼 수 없을지라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겨자씨 하나가 큰 나무를 이루듯, 밀가루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 누룩이 밀가루를 다 부풀어오르게 하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하게 성취되는 일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부르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