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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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6) - 교회, 세상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가라지 비유

마태복음 13:24-30 / 36-4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2-15

말씀내용
1. 두 가지 질문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일곱 개의 비유 중에 두 번째 비유인 가라지의 비유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A. 교회는 얼마나 거룩해질 수 있고, 거룩해져야 하는가?
먼저 질문을 드리지요. 사도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고 고린도교회에 도전하면서 교회의 거룩과 순결을 강조했습니다(고후 5:6~7). 교회는 거룩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얼마나 거룩해지고 순결해질 수 있을까요? 물론 교회는 할 수 있는 한 거룩과 순결함을 유지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서 권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얼마나 완전하게 할 수 있을까요? 만일 교회의 거룩과 순결을 완전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많은 연약한 신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 남아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때때로 거룩과 순결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던 운동과 분파들이 있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처음 300년 동안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많은 배교자들이 일어났지요. 이런 배교자들이 다시는 교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거룩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역사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온갖 박해를 겪고 순교까지 했던 목사와 교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신사참배에 굴복한 목사와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해방 후, 교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똑 같은 갈등이 재연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교회의 거룩과 순결함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지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와 같은 고민과 갈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성경적인 대답입니까?
B. 믿어서 좋은 게 도대체 뭔가?
또 하나의 질문입니다.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순결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서 제대로 살 수 있습니까? 시편 73편을 쓴 아삽이 가졌던 고민이 그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한 문제입니다. 그의 눈에 비친 악인들은 살아있을 때 고난이 없고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었습니다. 항상 평안해보이고 재물은 계속 불어납니다. 그런데 정작 마음과 손을 깨끗이 하여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자신은 종일 재난이 그치지 않습니다. 도대체 믿는다는게 뭔가, 믿어서 좋은게 뭔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겁니다.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라지 비유가 이런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어떤 대답을 주는 것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다는 겁니까?
2. 가라지의 비유(24~30)
비유의 내용을 먼저 주목합시다. 주님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고 비유를 시작하시는데(24), 이것은 주님만의 독특한 어법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비유를 시작하시는 익숙한 방식입니다. ‘무엇과 같다’고 할 때 비교되는 것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이라기 보다는 이 비유 전체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와서 곡식이 뿌려진 위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25). 가라지는 독보리라고 알려진 것인데, 이것을 먹으면 설사, 구토, 어지럼증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독보리가 밀과 외관상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고 이삭이 여물 때 비로소 구분을 할 수 있었는데 이때쯤이면 이미 뿌리를 깊고 강하게 내려서 밀의 뿌리들과 얽히게 됨으로써 제거가 불가능하게 되어 농사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 중에는 원수를 협박할 때 “네 밭에 가라지를 뿌려버리겠어”하는 식으로 말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행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복수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법은 이런 행위를 범법 행위로 규정하고 다스렸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쉽게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농사가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집 주인의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말합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27)?” 이 질문은 “왜 밭이 이 모양이 되어버렸지요?”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로 바꾸면, “왜 세상이 이 모양이지요?” 혹은 “왜 교회가 이 모양이 되어버렸나요?”하는 익숙한 말이 됩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28).” 주인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농사가 이렇게 된 것은 자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우리를 파괴하고 망치려는 원수가 한 짓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원수는 아주 적극적으로 밤에 와서 가라지를 뿌려놓은 것입니다. 종들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묻는 말은 그들의 무지하고 성급한 열정을 보여줍니다(28). 때때로 우리가 듣는 말, “왜 하나님은 이런 꼴을 보시고도 심판을 하시지 않으시나?”하는 말에는 이런 성급한 열정이 묻어있습니다. 주인은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대답합니다(29).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말합니다(30). 가만 두라는 의도는 가라지를 잘 자라게 하자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아직은 구분하기도 어렵고 구분할 수 있다고 해도 뿌리가 서로 얽혀 있어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기 쉬우니 가만 두라는 것입니다. 곡식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마지막 추수 때가 오면 그 때에는 분명히 구분이 되므로 가라지는 완전히 분리해서 땔감으로 사용할 수 있고 곡식은 곳간에 거두면 된다는 것입니다.
3. 주님의 비유 해석(36~43)
이제 주님은 모인 사람들을 흩으시고 집으로 들어가 제자들과 사적인 시간을 가지십니다(36). 36절 이하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를 비롯해 모든 말씀은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핀 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이 비유를 설명하여 천국의 비밀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제자들은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라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알고 싶어하고 깨닫고 싶어합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그 비유를 풀어 설명하여 주십니다. 일곱 개의 일대일 대응식의 해설입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 곧 주님 자신입니다(37). 밭은 세상입니다(38a). 밭이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입니다(38b). 이 말은 천국에 속한 자녀들, 악한 자에게 속한 자녀들이라는 뜻입니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이고, 추수 때는 세상 끝을 말하며, 추수꾼은 천사들입니다(39). 이 자체로 비유가 명확하게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초점은 추수 때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세상 끝에는 가라지를 불태우듯 인자가 천사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고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40~42). 악한 자의 아들들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운명을 맞을 것입니다(43). 여기서 인자이신 주님은 단지 씨를 뿌리는 분일 뿐 아니라 추수의 주인, 심판자이기도 하십니다. 마지막 추수 때에는 모든 것이 확연하게 구분되고 분리되고 영생과 영벌로 나뉠 것입니다.
4. 하나님 나라의 성격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천국의 어떤 성격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가르침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지금은 감추어져 있고 지금은 확정적으로 판단할 수 없지만, 장래 심판 날에는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고 각각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다 섞여 살고 구분을 하기도 어렵지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는 완전하고 확연하게 모든 정체가 드러나고 나눠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악인들은 영원한 불에 던져지고, 의인들은 아버지 집에서 영원히 해와 별 같이 빛날 것입니다(단 12:3). 지상의 교회는 망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몇 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인 좋은 씨를 멸하려는 적대적이고 적극적인 마귀의 세력과 공격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신자들, 공동체적으로는 교회를 공격하는 마귀의 역사를 인식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을 쉽게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곡식과 가라지를 정확하게 가려서 심판하실 추수 날까지는 참된 신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급한 열정으로 가라지를 뽑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5. 비유의 적용
이제 이 비유를 적용하겠습니다. “밭은 세상이요”라는 말씀에서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적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일차적으로 말 그대로 세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넘어 보다 넓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시각입니다. 또 하나는 어거스틴이 도나티스트들과의 논쟁에서 처음으로 ‘세상’이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했고 이후에도 많은 성경학자들이 그 타당성을 인정하는 시각, 즉 세상은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A. 세상을 향한 적용
먼저 세상이라는 시각에서 이 비유를 생각해보지요. 24절에서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제 밭’입니다. 말하자면 온 세상이 다 주님의 소유라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 그 어떤 영역에도 주님께서 당신의 소유라고 주장하지 못 하실 영역은 단 1인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주님의 영역과 마귀의 영역으로 나뉘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하나님의 밭입니다. 원수인 마귀는 주님의 밭에 들어와서 가라지를 뿌린 것입니다. 세상이 신자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님은 당연합니다. 많은 불신자들이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곳이 세상입니다. 불신자의 기원은 마귀가 첫 사람에게 와서 죄를 심어놓은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마귀의 의도와 목적은 이렇게 해서 신자들을 미혹하고 넘어뜨리고 그들의 믿음을 무너지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불신자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자체는 신자에게 고통과 환난을 의미합니다. 시편 73편을 쓴 아삽이 느꼈던 것처럼 세상에서 불의하고 악하고 불경건한 자들의 형통을 신자들은 보게 됩니다. 마귀의 방해는 적극적이고 주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성급하지 말고 세상 끝, 추수 때를 기다리라고 가르치십니다. 주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심판하실 때,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풀무 불에 던질 것입니다. 반면 의인들은 아버지 나라에서 영원히 해 같이 빛날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시간은 물론 죽음 조차도 공의를 보여주지 못하지만, 추수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온전하게 나타내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아들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악인의 형통으로 인하여 불평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37편을 보지요.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시 37:1~10).” 신자들은 이렇게 신실하게 복음의 증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바로 주님의 땅, 주님의 소유된 밭이기 때문입니다.
B. 교회를 향한 적용
이제 세상을 교회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적용을 하기 전에, 어떻게 주님께서 ‘밭은 세상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상을 교회로 이해할 수 있는지를 잠깐 설명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이라고 하실 때, 그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갈릴리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리적 의미로 온 세상이라기 보다 이스라엘 민족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에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닌” 것처럼(롬 9:6) 교회 역시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씨인 천국의 아들들을 심어 교회를 세우셨으나 마귀가 가라지인 악한 자의 아들들을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을 심어놓은 것입니다. 지상에 100% 순도의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교회가 위선자들로 가득해서 또 목사들이 거짓을 행하고 말하기 때문에 교회에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교훈은 이런 변명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 사탄이 역사하고 있고 의의 일군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군들이 있는데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교회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주님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추수 때에)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교회에 가라지가 많이 섞여 있다는 것이, 심지어 목사나 장로 같은 지도자들 중에도 가라지가 많다는 것이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못할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저 현실 안주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가르침은 종종 권징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오용되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다 그런 곳이니까 너희가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고 가만 놔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교회의 권징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비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형제가 죄를 범하였을 때 개인적으로 권고하고 듣지 않으면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가 최종적으로 공적으로 말한 후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서 내쫓으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8:15~17). 교회는 섞여 있지만, 거룩함과 순결함을 유지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하지만 완전한 거룩을 이룰 것처럼 생각하여 성급한 열정으로 행하게 되면 연약한 신자들을 실족하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늘 교회의 세속화를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 정신의 포로가 되는 것, 세상 정신이 교회를 지배하는 것이 교회의 세속화입니다. 교회가 거룩을 포기하고 크기를 추구하는 것이나, 크기를 열매로 착각하는 것, 그리고 교회의 직분을 세상의 벼슬쯤으로 여기는 것,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돈, 미디어, 프로그램과 방법론들을 믿는 것들이 다 교회의 세속화입니다. 신자들은 언제나 이것들을 경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적용에서 또 하나의 요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시간입니다. 세상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인생 끝까지 기다려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마 9:13). 교회는 완성품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결실하기 전에는 무엇이 참 곡식이고 독보리인지 구분도 쉽지 않습니다. 가라지 같은 참 곡식이 있고 참 곡식 같은 가라지도 있습니다. 성화는 시간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참 곡식과 가라지는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각각 그 정체를 드러낼 것입니다. 참 곡식은 지금은 미숙하고 연약하여 넘어지기 잘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견고한 믿음으로 성장하고 성령의 열매를 온전하게 드러내는 삶으로 갈 것입니다. 인생의 중간도 아니고, 인생의 마지막까지 가봐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요소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C.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11)
사도들은 주님의 이 비유를 직접 들었고 설명도 직접 들었습니다. 사도들은 신자들이 살아가는 세상 그리고 교회가 어떤 환경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0~11).” 여러분이 예배당에 나와서 앉아있다는 것은 어떤 보장도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 어떻게 택하심을 입은 자인지 성경을 통하여 알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확신을 얻고, 그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십시오.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시오. 마지막 날에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과 은혜를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