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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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5) - 천국의 비밀을 아는 자들

마태복음 13:10-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2-08

말씀내용
1. 예수님은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가?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여러분도 복음서를 읽으면서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까? 마태복음 13장 34절에 보면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가르치시는 것을 보면서 특이하다고 느꼈던 모양입니다. 당시 랍비들도 가르칠 때 비유를 많이 사용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예화의 용도로 비유를 사용하곤 했답니다. 비유가 당시 사람들의 일상 생활의 요소들을 가지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는 설명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보니까, 주님은 비유를 사용하시는데 그것을 예화의 용도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유를 툭 던지시고는 그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진리를 설명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주님께 여쭌 것입니다. 이 질문을 얼른 생각하면 보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랍비들은 물론 그랬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아주 다른 것이었습니다.
A. 예언의 성취(마 13:35)
가장 우선적인 대답은 마태복음 13장 35절에,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한데서 발견됩니다. 이것은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라는 시편 78:2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구절이 주님께 대한 예언이며 이것을 성취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도 말씀하셨듯이, (구약) 성경은 주님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요 5:39). 복음서는 구약성경이 주님께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모든 말씀을 주님께서 성취하신다는 것을 정교하게 드러냅니다. 35절은 비유의 목적이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긍정적 목적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비유에는 긍정적 목적은 부정적 목적과 함께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B. 비유의 이중적 목적(11~12): ‘너희’ vs. ‘그들’
그것을 잘 보여주는 말이, 11절에 ‘너희’와 ‘그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대답하십니다(11). 비유의 목적은 이중적이라는 암시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큰 무리’이고(2), ‘너희’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대중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는 설명을 주십니다. 네 밭의 비유도 제자들에게만 설명해주셨습니다(18~23).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도(24~30) 대중에게 말씀하셨으나 나중에 집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에게 그 의미를 설명해주십니다(36~43).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설명이 없이 주어지는 비유는 사실상 수수께끼와 같은 말씀이 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비유 자체는 그들의 일상 생활의 요소와 언어들로 구성된 이야기이기에 어린 아이라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두가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주님의 비유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는 사람들은 오직 ‘너희’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목적은 ‘그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숨기시고 ‘너희’에게는 그것을 명확하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너희’의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들’입니까, 아니면 ‘너희’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천국 비밀을 아는 자는 점점 더 많이 알게 되겠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나마 알고 있던 지식 조차도 점점 더 심각한 무지와 혼돈으로 향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는 자는 더 알게 되고 모르는 자는 점점 더 모르게 됩니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에서 확인됩니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마 25:28).”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눅 19:24).” 이 원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천국의 비밀(11)
여기서 잠깐 멈추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의 비밀’이라는 말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뮈스테리온’인데, 여기서 영어 단어 mystery(신비를 의미하는)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mystery 라는 영어 단어에서 이 ‘비밀’이라는 뜻을 이해하려고 하면 오해를 하게 됩니다. 여기 ‘비밀’이란 단어는 말해주면 다 아는 것입니다. 누군가 알고 있는 사람이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리 단순한 내용일지라도 알 길이 없는 것, 그것을 비밀이라고 쓴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 가치(비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여기는데 ‘너희’는 자기 생명을 바꿀 수 있을 만큼 너무나 가치가 있고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 이것이 천국의 비밀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지만,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설명해서 깨닫게 하시지만 그들, 큰 무리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유로 대중들을 가르치신 목적입니다. 천국의 비밀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곧 주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이고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모든 일입니다. 천국의 복음을 듣는 자가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뜻에서 비유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3.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13~15)
이제 주님은 비유로 말씀하심이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13~15절에서 말씀하시는데, 35절에서 설명한 것보다 더 깊은 차원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6:9~10이 인용됩니다.
A. 이사야의 본문(사 6)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부르심을 받는 유명한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말합니다. 그때 천사가 제단의 숯으로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언하는데, 이어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주의 목소리를 이사야는 듣습니다.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소명에 대한 이 본문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그 다음에 어떤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셨는지 주목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를 많이 듣고 알지만, 다음 구절을 잘 보지 않습니다. 이사야 6:9~10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무슨 말씀입니까? 한 마디로 이사야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백성들의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겨서 못 알아들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황당합니까? 누구를 보낼꼬 하셔서 이사야가 자원했는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네가 가서 말해도 사람들은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까? 그러자 이사야가 묻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 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1b~13).” 망할 때까지 못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십 분의 일만 남아도 못 알아듣고 다 없어져서 그루터기만 남을 텐데 그 때까지 못 알아들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선지자로 소명을 받던 날, 사역이 실패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그 생애를 통해서 이 약속을 경험했습니다. 이사야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선지자가 말씀을 전할 때 백성들은 못 알아들었고 그래서 선지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사야를 알아듣지도 못할 백성에게 보내실까요? 예레미야 5:21을 보지요.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예레미야도 그렇게 보냄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의 증거로 그들에게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심판 때에 듣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게 하심입니다.
B. 예언의 성취(막 4:12; 눅 8:10; 요 12:39~41; 행 28:23~27; 롬 11:8)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인용하신 말씀이고 이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똑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4:12; 눅 8:10).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2장에서도 많은 표적을 보고도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그 현상을 설명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요 12:40). 또 바울 사도가 로마에 구금되어 있을 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들 중에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분열이 되었는데 이 현상도 바울 사도가 이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했습니다(행 28:26~27). 바울 사도는 로마서를 쓰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무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이 구절을 인용했습니다(롬 11:8). 오늘 본문 14절에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라고 하는 부분을 보십시오. 정교하게 번역하면 “이루어지고 있으니”라는 말입니다. 즉, “지금 그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다, 너희가 지금 그 성취를 보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의 사역에서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C.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것은 원인인가, 목적인가? (13; 막 4:12)
이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구체적으로 보지요.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 구절을 잘 보십시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그들이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입니까, 원인입니까? ‘그들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원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R.C.스프로울은 이 구절을 이렇게 풀어냅니다. “만약 너희가 내 말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의 귀를 제거해버릴 것이다. 만약 너희가 나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거룩한 것에 대해서 너희의 눈을 멀게 할 것이다. 만약 너희가 나에게 사랑의 마음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의 마음을 돌과 같이 만들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귀와 눈을 막으시는 것은 버림 받은 자들이 원하는 것을 주시는 일종의 심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구절의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4:12을 이 구절과 비교해서 보지요.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같은 이야기지만 여기서는 뉘앙스가 다릅니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목적이 그들로 못 알아듣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으로 들립니다. 여기서는 원인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이 같은 내용을 달리 쓰는 것일까요? 실상 이사야의 본문(사 6:9~10) 자체가 이런 의미들을 다 지니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면, 마태복음은 말씀을 듣는 사람의 책임을 더 무게 있게 다룹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천국의 비밀을 듣고 그것을 깨달아 아는 데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얽혀있는 불가분의 요소들입니다. 15절도 보십시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마음이 완악해졌다’는 말은 기름이 껴서 둔해진 것을 말하고 ‘귀가 듣기에 둔하고’라는 말은 처음부터 듣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를 보여주고 ‘눈은 감았으니’라는 말은 스스로 눈을 감아서 보기를 거부하는 고집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적극적으로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유로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D.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이사야의 말씀은 그들이 알고자 하고 듣고자 하고 구원을 얻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역사하셔서 그들로 절대로 깨달을 수 없게 만드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듣기를 원치 않고 깨닫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 말씀을 거부합니다. 듣는 것 같지만 그 말씀을 빼앗아가는 마귀가 있으며, 실제로 그들의 마음 속에는 말씀을 거부하는 바위가 놓여 있고, 세상과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질식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의 방식을 주님께 복종시킬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세상입니다. 이것이 네 밭의 비유의 내용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지 않고, 천국의 비밀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혹시라도 이 말씀을 깨닫게 되어 돌이켜 회개하고 주님께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합니다(15). 이것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태도를 더 강조하기 위해서 이사야의 본문의 의미를 약간 변형시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전혀 없는 의미를 갖다 붙인 것이 아닌 것은 이사야에게 영감하신 성령님께서 친히 그 말씀을 해석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부하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런 상태로 내버려두셨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분명히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라는 중요한 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이런 것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하나님만이 이런 완전한 자유를 행사하실 주권을 가지십니다. 사람의 마음이나 의지를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으시면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천국의 비밀인 복음을 깨달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으며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는 것도 주권에 속한 사실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하락되었으나”라는 말씀은 이것을 깨닫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비밀은 머리가 좋아서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아무리 천재라도 알려주어야 아는 것이 비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셔야만 아는 것이 천국의 비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야 되는 일입니다(겔 36:26).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책임을 나누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가 함께 맞물려있고 얽혀 있어서 인간이 이성으로 정확하게 구분하여 설명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것을 만족스럽게 나누지 못합니다. 이 두 요소가 다 있는 것입니다.
E. 긴장: 주권적 은혜(선택)와 인간의 겸손한 수용(마 11:25)
그래서 신자들에게는 일종의 긴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겸손한 마음과 함께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의지하고 바라는 마음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한다면 해”하는 태도가 아니라 “주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제 마음 눈을 밝히사 천국 비밀, 복음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구하는 마음이 요구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1:25에서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깨닫지 못하는데 어린 아이같이 하나님께 의지하여 은혜를 구하는 자들은 깨닫습니다.
4. 지상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축복(16~17)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16~17).” 그들은 복된 자들, 행복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지 않고 제자들의 눈은 감기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귀는 듣고 눈은 보며 마음은 천국의 비밀을 깨닫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입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와 성도들은 약속은 받았지만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멀리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환영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메시아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를 듣고 보고 알기에 복된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깨달아 아는 것이야말로 지상에서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5. 지상에서 받는 죄의 형벌(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8문)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8문은 “이 세상에서 받는 죄의 형벌은 내적으로 마음의 굳어짐, 타락한 지각, 강한 유혹, 마음의 고집, 양심의 공포와 부끄러움, 정욕 같은 것이나 외적으로는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저주하신 일, 우리들의 몸, 이름, 지위, 관계, 직업 등에 생긴 다른 모든 악과 더불어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마음의 굳어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불신의 상태입니다. 이 불신의 마음 상태가 바로 현세에서 죄인이 받는 죄의 형벌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불신의 마음 상태는 저주받은 상태요, 소망없는 상태이며, 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보장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죄인이 이 세상에서 받는 형벌입니다.
6. 교훈과 적용
주님은 대중에게 비유로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에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다수는 철저히 거절하여 주님을 죽이려는 마음까지 가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이며 다수의 불신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R.T.프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계시가 아주 중요하게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사역자들이 능력있게 일을 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고 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신비다. 이것이 이 비유들이 설명하고자 하는 위대한 신비다.” 이제 이 말씀의 적용적 교훈을 생각해봅시다.
A. 하나님 말씀에 대한 태도: 겸손한 수용(=좋은 땅) vs. 교만한 거부
세상을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과 영원을 결정합니다. 좋은 땅 같이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 태도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를 통해 들려질 때 여러분은 그런 마음으로 들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그런 마음으로 읽으셔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교만한 거부는 지상 최고의 저주요 형벌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계획, 지혜를 의지해 살아가려는 교만은 그 자체가 형벌입니다. 그것은 완악한 마음이고 막힌 귀이고 감은 눈입니다. 겸손히 그 말씀 앞에 엎드리십시오.
B.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구함
모든 것은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열어 천국의 비밀을 보이고 알려 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라고 구해야 합니다.
C. 천국의 비밀을 아는 자들의 특징: 겸손
이렇게 천국의 비밀인 복음을 깨달아 알게 된 자들의 특징은 겸손함입니다. 이 지식은 유일하게 자랑할 수 없는 지식입니다. 세상 모든 지식은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낸, 노력의 산물이기에 자랑할 수 있지만 천국의 비밀인 복음은 은혜의 계시로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의 지식이기에 자랑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참으로 깨달은 사람은 자랑하지 않으며 감사하며 더 깊은 은혜를 구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은혜에 이르게 되기를 겸손히 간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그의 서신에서 내내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은혜에 우리 모두를 이르게 하여 주시기를 주님의 존귀한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