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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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4) - 말씀의 씨가 자라나는 은혜

마가복음 4:26-29, 마태복음 13:1-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2-01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주일에 네 가지 밭의 비유를 상고했습니다. 비유의 핵심은 분명히 같은 사람이 같은 씨를 뿌렸지만 그 결과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밭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똑 같은 자리에 앉아서 똑 같은 복음의 말씀을 들었지만 어떤 사람은 그 말씀으로 거듭나고 자라가고 열매를 맺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버림을 받은 상태에 머물러 있고 전혀 영적인 성장과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 밭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가르침은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원리를 가르칩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씨인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뿌려야 합니다. 이 씨는 어느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뿌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정확하게 이 비유가 언급하고 있는 네 종류의 마음 밭이 존재합니다.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숨어서 몇 사람만 데리고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다. 또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천국 말씀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행해서도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에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마음의 상태는 이 네 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1. 씨가 자라는 비유(막 4:26~29)
오늘 우리는 지난 주에 상고했던 네 가지 밭의 비유와 함께,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비유 하나를 더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씨가 자라는 비유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네 가지 밭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 두 비유는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A. 말씀 전파는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이다.
이 비유에서도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라고 시작하십니다. 마태복음과의 차이가 있다면 마태복음에서 천국이라고 묘사한 것을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언급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복음서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은 것과 같이 ‘하나님’이라는 표현 대신에 ‘하늘 나라’ 혹은 ‘천국’이라고 지칭한 것입니다. 두 비유가 모두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씨를 뿌리는 것과 관련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는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 요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마태복음의 네 가지 밭의 비유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면, 마가복음에 씨가 자라는 비유는 말씀의 씨가 뿌려졌을 때 그것이 어떻게 결실을 하게 되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즉 말씀의 씨가 사람의 마음에 뿌려져서 그 씨가 자라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라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을 두고 완성된다.
농부는 씨를 뿌렸습니다. 27절에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랐다고 하는 말씀은 상당한 시간이 흘러갔음을 보여줍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나서도 물론 많은 수고를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제대로 된 씨를 잘 뿌렸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여기서 어긋나면 다른 모든 수고가 아무리 많은 땀을 흘린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시간이라는 요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조급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유난히도 많이 하는 말은 ‘빨리 빨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꽤나 조급한 민족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언제나 시간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최상의 결과를 성취하실 것을 신뢰함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의 선진들이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의 생애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처음부터 그는 자손을 약속 받지만 그 약속의 자녀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75세에 부름을 받아서 그가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얻은 것은 100세가 되었을 때이니 그는 그 늦은 나이에 25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이야기는 전부 시간이라는 요소와 뒤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은 참된 신앙은 인내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의 복음서뿐 아니라 서신서들도 믿음으로 인내할 것을 계속해서 권면합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면, 신약의 성도들은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때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입니다. 그것이 이 비유에서는 ‘그가 자고 깨고 하는 중에’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씨를 뿌린 농부가 그 결실을 보려면 시간이 흘러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이 열매를 보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당장에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의해서 정확하게 판단 받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인생이라는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를 다 보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생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간을 두고 완성됩니다. 씨가 자라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C. 씨가 자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다.
실제로 이 비유에서 씨를 뿌리는 자는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는데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알지 못합니다(27). 그리고 28절에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열매를 맺는 능력이 땅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표현에서 주님은 농부 자신에게 씨가 자라게 하는 능력이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인데 그렇다면 그 능력은 사실상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씨가 자라서 결실하는 것은 농부의 능력이나 열심이나 수고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농부의 역할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씨가 자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D. 심판의 날은 온다.
29절에 “열매가 익으면”이라는 표현은 ‘열매가 스스로 영글어가면”이라는 말인데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을 말합니다. 그날은 세상의 종말입니다. 그 때는 종종 ‘낫을 대는 것’ 곧 추수에 비유되는데,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거둘 것은 거두어들이고, 버릴 것은 버려질 것입니다. 28절에 말씀하신대로, 그 때는 처음에는 싹으로 시작하지만 이삭이 되고 그 다음에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는 때입니다. 이것은 다른 씨가 아니라 참된 씨앗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씨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2.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잘못들: 교회는 어떻게 이 비유들의 교훈을 거슬리는가?
네 밭의 비유는 공관복음이 모두 기록하고 있는 비유라면, 씨가 자라는 비유는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비유는 하나님 나라는 씨 뿌리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이 예수님의 비유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무서운 말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저주입니다. 그 결국은 쫓겨남이고 심판입니다. 어떤 점에서 오늘날 교회가 이 비유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 설명드리지요.
A. 씨를 바꾸는 시도(갈 1:6~10)
이 두 비유가 강조하는 것은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씨가 아닙니다. 문제는 밭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심령, 마음이 중요합니다. 길 가와 같이 씨를 뿌린다고 해서 바로 어떤 결과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말씀을 빼앗아가는 사탄의 역사, 은혜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바위 같은 마음, 모든 말씀의 역사를 질식시키는 가시덤불을 보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이 때 어떤 유혹이 찾아올까요? 그것은 씨 즉 종자를 바꿔보자는 유혹입니다. 길 가와 같은 토양에도 통하고, 흙이 얇은 돌밭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가시떨기에서도 질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종자를 찾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 복음이고 유사 복음이고 물 탄 복음입니다. 바울 사도가 만일 그런 복음을 전한다면 천사라고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던 다른 복음입니다(갈 1:9).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입니다(갈 1:10). 그것들은 아주 빠른 시간 안에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또 어떤 밭이든지 가리지 않고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그런 열매는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고, 사람의 왕국 곧 사탄의 나라를 만들어내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불미스러운 일들은 바로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고 있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런 가운데 좋은 땅과 같은 심령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은 신음하고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시도(창 30:1~2)
오늘날 교회가 이 예수님의 비유들을 통해서 전혀 교훈을 배우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농부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씨가 자라는 비유에서 강조된 교훈, 열매가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린 후에 농부는 밭도 살펴야 하고, 김도 매야 하는 등 여러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농부가 씨를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만이 만들어내실 수 있는 열매를 인간이 만들어내려고 생각한다면 그는 쉬지 못할 것입니다. 큰 사업을 하는 사업가와 교회를 목양하는 목사의 차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모두 쉴 틈 없이 분주하고 미래를 구상하고 계획하고 실행하고 평가하고 회의하고 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면서도 늘 불안해 합니다. 참된 안식이 거기에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성공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농부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듯이, 목사가 아무리 유능해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많은 교회의 사람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했듯이 그들의 목사에게 말합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창 30:1).” “교회를 성장하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런 목사를 찾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씨 곧 복음의 말씀도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도 아닙니다. 우리의 왕국을 확장시키는 것 외에 어떤 관심도 없습니다. 옆에 있는 다른 교회들보다 더 빠르게, 더 크게 성장하는 교회를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성을 내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창 30:2)?”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여기서 교회는 거룩함을 희생하고 크기를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시도의 결과를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C. 기다리지 않는 태도(출 14:13~14; 롬 8:24)
세 번째로 예수님의 이 두 비유에서 한국교회가 교훈을 배우지 못한 증거는 기다리지 않는 태도 즉 조급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더 빨리!”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의 복음의 역사는 어떤 나라의 교회 역사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고속 성장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대신하려고 할 때, 그것은 불신앙의 태도로 나타납니다. 그 불신앙은 바로 기다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홍해와 바로의 군대 사이에 선 모세가 원망하고 분노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을 배우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요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잘 뿌렸다면 그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농부의 염려와 조급함이 열매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 소망으로 참는 것이 성경적 믿음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매를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이 만들어낸 거짓 열매들을 거둔 것입니다.
3. 적극적 교훈과 적용: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참된 교회를 향한 격려
이 비유는 적극적으로 보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교회를 향한 격려입니다. 우리가 이 두 비유의 교훈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한 없는 격려를 받을 것입니다.
A. 계속해서 낙심하지 말고 씨를 뿌려라.
이런 하나님의 격려를 받는 사람들은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실화를 소개하겠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거듭나게 된 한 해군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은 생애에 매일 자기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열명의 불신자에게 전도할 것을 서약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길거리로 나가서 매일 열명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만약 오늘밤 세상을 떠난다면 당신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그는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호주의 시드니 조지가(George street)에서 노방전도를 계속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전도한 전도의 열매를 확인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정말 듣고 싶었던 한마디 말은 “당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 했어요“라고 고백하는 말이었지만 말입니다. 그 즈음 영국의 한 침례교회에서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일예배 설교가 끝날 시간에 어떤 낯선 사람이 목사님께 손을 들었다. “목사님! 저에게 몇 분 동안 간증할 수 있게 해주세요” 목사님은 허락했습니다. 그는 친척을 만나러 호주에 갔었을 때 거리에서 한 노인이 노방전도를 하는데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만일 오늘밤 세상을 떠난다면 당신은 천국에 갈수 있습니까?” 이 메시지가 자신의 심령을 두드려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간증을 허락한 목사님은 로스앤젤레스와 퍼스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4명의 노인과 선교사로부터 시드니 노인 전도자에 대한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들 역시 그 노인으로부터 전도 메시지를 여행 중에 듣고 예수를 영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그 집회를 주관하는 공직자가 나는 호주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할 때 길거리의 노인의 전도 메시지를 듣고 크리스찬이 되었다고 간증하는 이야기를 또 듣게 됩니다. 이 영국 침례교 목사님은 비행기를 타고 호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 전도 노인을 수소문하여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병상의 노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 주었다. 노인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는 단 한 사람도 자신의 전도를 통하여 거듭나게 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그는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전도자 프랭크 제너(Frank Jenner)의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다 열매를 확인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으로 목회를 하는 목사님들이라면 주님의 성숙한 제자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당장에 어떤 결과도 없어 보이는 것이 씨를 뿌리는 것을 중단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B. 잠을 자라.
저는 씨가 자라는 이 비유를 읽을 때 기억하는 설교가 하나 있습니다. 2010년 Together for the Gospel 컨퍼런스에 갔을 때, 존 맥아더 목사님이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제목은 잠의 신학(Theology of sleep)이었습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했으면 그는 잠을 잘 잘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가 자고 깨고 하는 중에 그 씨가 심겨진 영혼 안에서 역사를 이루시고 결실을 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씨를 잘 뿌리고 나서도 잠을 자지 못하고 노심초사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자기가 하려는 불신앙일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제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들로써 신실하게 말씀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자고 깨고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영혼들 안에서 결실이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C. 기다려라. 뿌려진 씨는 헛되지 않다(사 55:11).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뿌린 씨의 열매를 다 알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 기다림은 노년이 될 때까지의 기다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서서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일이 다 드러나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는 우리의 수고를 하나도 헛되게 만들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버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뿌려진 씨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수 년 동안 여러분의 심령 속에 뿌려진 씨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잠깐일지라도 그 복음의 씨가 심겨졌다면 그것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모든 씨 뿌리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립니다. 모든 것을 보게 될 날을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천국에서 깰 때에 우리는 그 모든 열매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힘을 얻어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신실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