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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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3) - 말씀을 깨닫는 은혜: 네 가지 밭의 비유

마태복음 13:1-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1-25

말씀내용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비유들을 차례로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비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왜 이 비유의 가르침들이 마태복음 13장에 등장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1. 천국 비유들(마 13)의 배경 질문: 왜 사람들은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전하는 능력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능력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역사상 그 어떤 설교자도 예수님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1세기의 바울도, 18세기의 휫필드도, 19세기의 스펄전도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에수님은 최고의 설교자였습니다. 마태복음 7장 28~29절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마치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서기관들은 당대 최고의 성경학자들이요, 성경교사들이었습니다. 즉 최고의 설교자들이었는데, 예수님은 그들과는 다른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것이 대중의 일반적인 평가였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실상 마태복음의 이야기가 전개되어가면서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점점 더 미움을 받으셨고, 회당의 문은 예수님께 대하여 점점 닫혀가고 있었으며 예수님을 거부하는 대중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먼저 13장과 근접한 배경을 살펴보자면 10장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0장에서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시고 복음을 전파하도록 둘씩 파송하기 위하여 파송 설교를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접하는 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절하고 반대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그런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11장은 옥중에 있는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내 “오실 그 이가 당신이 맞습니까?”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세례 요한의 마음에 의심이 왔습니다. 왜 이런 의심이 세례 요한에게 찾아왔을까요? 자기 생각에는 온 이스라엘이 이 메시아와 그가 전하는 말씀 앞에 반응하고 무릎을 꿇어야 마땅한데 그렇게 되지를 않는 겁니다. 주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자신의 메시아되심을 확증하실 뿐 아니라,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11:17)”는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장터에서 놀던 것을 비유하신 말씀인데, 피리를 불며 결혼식 놀이를 하고 슬피 울며 장례식 놀이를 하던 것입니다. 피리를 불면 아이들은 즐겁게 춤을 춥니다. 그리고 한쪽에서 슬피 울기 시작하면 남은 아이들은 장단을 맞춰 가슴을 칩니다. 아이들 놀이도 이렇게 장단을 맞추는 법인데, 주님께 대하여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주님 자신을 비난하는 것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특히 주님께서 가장 많은 이적을 행하신 갈릴리의 고을들인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이 주님께 믿음으로 반응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그 고을들을 주님은 저주하셨습니다. 12장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안식일 문제로 고소하려는 시도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이라 일컫는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이 적대감은 비난을 넘어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으로 발전합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토록 권세 있는 능력의 말씀을 전하셨고, 많은 이적을 행하신 주님에 대하여 어떻게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하는가?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가르치신 후에 주님께서는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가셨는데 거기서도 사람들은 놀라서 말합니다.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마 13:54~56) 그들은 분명히 놀랐고,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57절은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디서나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분열시켰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절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리입니다. 어떤 이들은 열광적으로 수용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철저하게 거절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천국 비유 가르침의 배경입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하는가에 대한 대답인 셈입니다.
이것은 모든 세대에 적용됩니다. 휫필드나 스펄전과 같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고 따르기도 했지만, 그들은 수 많은 반대와 배척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똑같은 말씀이고, 능력있는 말씀이 증거되었지만, 모두가 다 그 말씀을 인해서 은혜를 받고 그 말씀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개척 선교사들은 전혀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은 곳에 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릴 때 이와 같은 일들을 많이 겪어야 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씨를 뿌리지만, 눈에 보이는 열매들이 없는 것을 대부분의 개척 선교사들이 경험을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모든 문제들을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이 대답합니다.
2. 네 밭의 비유: 복음의 말씀(씨)은 동일하다. 왜 동일한 씨가 다른 결말을 가져오는가?
우리는 이런 배경 질문을 가지고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비유들 중 첫째로 네 밭의 비유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보통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지만, 비유의 핵심 내용을 볼 때 ‘네 밭의 비유’라는 제목이 더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씨 뿌리는 자가 비유의 중심이 아니라 씨와 밭이 그 중심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주님의 비유들은 한 가지 중요한 핵심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비유 해석의 절대 원리는 아닙니다. 때로는 이 비유와 같이 주님께서 친히 해석해주신 대로, 그 자체로 풍유적인 성격을 가지기도 합니다. 즉 씨 뿌리는 자는 일차적으로 주님 자신이고 모든 복음설교자, 복음전도자들에게로 연장될 수 있습니다. 씨는 주님께서 설명하신 대로 ‘천국 말씀’ 즉 복음이고(19), 네 종류의 밭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다양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이 비유에서 씨를 뿌리는 자는 한 사람이고, 씨도 다 같은 씨입니다. 주님께서는 갈릴리와 유대를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반응은 나뉘었습니다. 믿음으로 반응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대중은 사실상 주님께서 뿌리신 천국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 똑 같은 씨가 뿌려지는데 그 똑 같은 씨가 다른 결말을 가져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씨 뿌리는 자가 잘못 뿌렸다거나, 씨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실수도 많고 연약함을 가진 사람이기에 때로는 잘못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고, 복음 자체에 물을 타서 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상황을 상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사역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신실하게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한다고 할 때, 그 결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거절할 뿐 아니라 미워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열매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밭의 차이에 있습니다.
3. 네 종류의 밭: 반응(밭)은 다양하다.
주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밭은 네 종류인데 이것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다양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A. 굳은 마음 / 길 가(4,19; 고후 4:4)
첫 번째로 4절에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라고 했습니다. ‘길 가’는 밭고랑 사이로 사람들이 밝고 다니도록 난 길을 가리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밟혀서 딱딱해진 이 땅은 씨가 뿌려져도 흙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굳은 마음 혹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마음을 가리킵니다. 비록 예배당 안에 와서 앉아서 선포되는 복음을 귀로 듣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복음을 전혀 받아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은 대개 교만과 무지로 인한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주장, 자기 경험이 옳다는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논쟁적이고 비판적입니다. 이런 교만한 태도는 사실상 영적 무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대적하고 어떻게든 예수님에게서 흠을 찾아내려고 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존재들에게서 이런 마음을 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매우 주의 깊게 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듣는 것은 믿기 위함이 아니라, 비판하고 흠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들을수록 마음이 더욱 완악해지고 굳어집니다. 결국은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당 안에도 이런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주목할 한 가지 주님의 설명이 있습니다. 4절에서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말씀하셨는데 19절에서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라고 설명하십니다. 이런 마음의 태도는 결국 ‘악한 자’인 사탄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한 바,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과 같은 것입니다(고후 4:4). 여러분은 이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지금은 어떻습니까?
B. 피상적인 마음 / 흙이 얇은 돌밭(5~6,20~21)
두 번째는 5절에서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라고 쓴 것인데, 팔레스타인에는 석회석 지층 위에 흙이 살짝 덮인 이런 밭이 흔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님은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하셨습니다(5~6). 그리고 설명하시기를,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하셨습니다(20~21). 이것은 피상적인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깊이를 원하지 않고 가볍고 천박한 마음입니다. 금방 뜨거워지고, 금방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한없이 부드럽고 은혜를 잘 받는 부드러운 마음이지만, 바로 그 껍질 아래에는 깨어지지 않은 채 여전히 완악한 바위와 같은 속 마음이 있습니다. 그의 속 마음은 성령님에 의해서 부서지지 않은 채, 여전히 자아와 독선과 아집과 주장이 가득합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바로 성령님께서 이런 단단한 속 마음까지도 산산조각 내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속에는 그런 증거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외면적 태도는 사실상 믿음이 좋은 사람인 것처럼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해지는 복음의 말씀 앞에 빨리 반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깊이를 원하지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식의 신앙 생활은 결국 시간이 그 신앙의 진위를 드러내줍니다. 말씀으로 인해 환난과 박해와 같은 어려움이나 손해를 보는 일이 일어날 때, 그는 ‘곧’ 넘어지고 맙니다. 참된 믿음의 요소인 인내가 없습니다. 피상적인 태도는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뿌리 없는 신앙, 거짓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깊이, 인격적으로 알려는 마음이 있습니까? 복음의 진리를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더 깊이 알고 싶어하십니까? 그것을 추구하십니까?
C. 질식시키는 마음 / 가시떨기(7,22; 19:16~22; 요일 2:16)
세 번째로 주님께서는 7절에서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길 가와 흙이 얇은 돌밭은 밭 내부의 문제였다면 이것은 밭의 외부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22절에서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막혀’라는 단어는 ‘질식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는 분명히 복음을 추구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는 분명히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그 심령 안에서 자랄 수 없도록 질식시키는 요소들이 그 삶에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질식시키는 대표적인 요소들입니다. 복음서에는 주님께 나아왔던 부자 청년이 바로 이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 19:16~22). 그는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라고 주님께 물으면서 왔을 뿐 아니라 십계명을 준수하여 살려는 열심도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말씀하셨고 그 청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성경은 이 청년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마 19:22). 청년이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것은 그가 가진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여러분이 오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신앙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안에 생명이 있는가를 알지 못할 정도라면 바로 이런 마음의 상태에 있지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의 염려는 여기서 재물의 유혹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이것만이 아닙니다. 요한일서에서 지적했듯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입니다(요일 2:16).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고 살지 않지만, 육신으로 대표되는 외모와 성공 그리고 안목의 정욕이라고 할 눈에 보이는 가치들을 추구하는 것, 이생의 자랑에 속하는 모든 허탄한 생각들에 마음을 쏟고 살아간다면 그는 아무리 오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해도 결코 영적인 실재를 경험하는 자리에 가지 못할 것이고, 모든 말씀은 그 안에서 언제나 질식 당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예배당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우려합니다. 그는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습니다(요일 2:15). 여러분은 혹시 이런 심령의 상태로 오래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심히 두려운 일입니다.
D. 깨닫는 마음 / 좋은 땅(8,23; 히 4:2)
마지막으로 8절에서 주님은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를 가리키고 열매를 맺는 마음을 말합니다(23). 씨가 제대로 심겨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결실 즉 열매입니다. 모두가 천국 복음을 들었습니다. 즉시 기쁨으로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여기에서만 주님은 그들이 깨달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듣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열매가 없습니다. 여기서 깨닫는다는 말이 단지 지적으로 이해했다는 뜻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깨닫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있는 아집과 자아와 자기 의와 주장을 깨뜨립니다. 속 마음이 깨어지지 않으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을 깨달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말씀을 듣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2).” 복음의 말씀은 오직 믿음으로만 들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6:13). 성령님께서 신자의 믿음과 더불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습니다. 영적인 지각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말씀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깨어진 자아 속으로 깊이 박히게 되고 100배, 60배 혹 30배 결실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은 비유의 과장법을 통해서 청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키십니다. 농사에서 이런 정도의 수확을 거두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천국 복음을 듣고 깨달은 사람에게는 이런 정도의 어마어마한 열매를 맺는 축복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주님은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첫 열매는 사실상 순종입니다. 말씀을 듣고 영적으로 깨달은 사람은 순종으로 그 첫 열매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의 씨가 그 사람 안에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한 결과를 만들어내십니다. 듣고 깨달은 사람은 그 복음의 증인이 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수 많은 심령들이 복음을 듣고 살아나는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삶 속에서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드러낼 것입니다.
4. 적용과 교훈
이제 이 비유의 결론으로 교훈과 적용을 간단히 다루겠습니다.
A. 복음은 마음의 시금석이다. 두 가지 토양만이 있다.
물론 미각은 주관적인 것이지만, 아주 예민한 맛을 가지고 있는 고급 요리를 시식해보면 그 사람의 미각을 어느 정도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은 마음의 시금석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들려질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직분이나 봉사, 기타 어떤 것도 복음의 말씀처럼 그 사람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복음이 마음을 판단하는 시금석입니다. 오늘 상고한 주님의 비유에는 물론 크게 네 가지 종류의 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원리상, 두 가지 토양만이 존재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토양과 열매를 맺는 토양입니다. 길 가와 흙이 얇은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는 모두 열매를 맺지 못하는 토양입니다. 좋은 땅만이 열매를 맺는 토양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계십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자신의 심령의 상태를 정확하게 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B. 말씀을 깨닫는 은혜: 토양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복음의 말씀을 듣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 자리에 와 계십니다. 그러나 그 복음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 축복은 정녕 여러분에게 축복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과 만족이 많겠지만, 말씀을 깨닫는 은혜와 기쁨에 비할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로 이 비유를 마치셨습니다(9). 이 기쁨과 이 은혜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 깨닫는다는 것은 말씀을 귀로 들어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을 보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기쁨과 만족에 비할 것이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리고 그 말씀을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믿음은 자라나고 견고해집니다. 무엇이 이 은혜와 기쁨과 만족을 여러분에게서 빼앗아가는 것입니까? 그 모든 것을 꺾어버리십시오. 그 모든 것을 잘라내십시오. 그 모든 것을 제거하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밭이 자기 스스로를 갈아 엎을 수 없습니다. 오직 농부이신 하나님, 씨를 뿌리는 자이신 예수님께서 밭을 기경하시고 갈아엎어서 좋은 땅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구하십시오. 간절히 구하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에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