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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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2) -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삶/므나비유

누가복음 19:11-2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1-04

말씀내용
새해 첫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 중 두 번째로 므나 비유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비유는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매우 적절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
1. 달란트 비유(마 25:14~30)와 유사하지만 다른 비유
이 비유는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달란트 비유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이 두 비유가 본래 하나의 비유인데 두 개의 비유로 편집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우리가 그렇게 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얼마든지 주님은 유사한 소재를 가지고 다른 상황에서 다른 말씀을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 비유는 많은 유사점을 가지지만 그 배경과 초점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2. 비유의 배경/정황
이 비유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비유의 배경 내지 정황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A. 삭개오의 행동이 보여준 시사점
11절에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라고 한 것은 바로 앞에 있는 본문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어떤 내용입니까? 키 작은 세리 삭개오의 이야기가 1~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자들은 삭개오의 집에 모여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머무시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고(7) 삭개오가 보여준 회개의 결심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주님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라고 했고 주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므나 비유의 첫 번째 배경입니다.
B. 예루살렘 사람들의 메시아 기대: 예수님 같은 메시아는 거부하게 될 백성들
두 번째 배경이 있습니다. 11절 하반절에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는 것이 므나 비유의 두 번째 배경입니다. 이 비유를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셨다고 28절이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호산나를 부르며 환호한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는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들의 무지와 오해에 기인하고 있었습니다. 11절 말씀대로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로마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윗의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제자들도 가졌던 오해였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은 들어도 알지 못했습니다(눅 9:45; 18:34). 그러니 이런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에만 관심을 가졌던 일반 대중들의 메시아 기대는 거의 절정에 이른 상황이었습니다. 때때로 역사를 봐도 이런 과도한 종말론에 기인한 이단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비유는 이런 사람들의 오해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므나 비유의 두 번째 배경입니다.
C. 아켈라오(Archelaus)의 왕권 이슈
이 두 가지 배경 외에 므나 비유의 역사적 배경이 하나 더 있습니다. 주전 4년 악명 높은 헤롯 대왕이 죽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교로 개종한 에돔 출신이었고, 베들레헴에서 아기들을 살육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아내와 두 아들도 처형할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눠 다스리게 하였는데 가장 넓은 유대 지역을 맡은 사람이 아켈라오였습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로마 황제의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아켈라오가 황제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 로마로 갔는데, 그가 다스리는 것을 싫어했던 유대인들은 그의 왕권을 저지하려고 뒤이어 대표단을 로마 황제에게 보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아켈라오는 왕의 칭호를 얻는데는 실패하지만 유대를 다스릴 분봉왕(Ethnarch)이 되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주전 4년에 있었던 일이었고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라는 것과(12)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14)”라는 비유의 서론은 바로 이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조금 더 그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자면, 아켈라오는 아버지 헤롯 대왕처럼 잔인해서 유월절에 일어난 민중봉기를 진압하려고 3000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고 결국 유대와 사마리아 사람들의 대표들이 로마 황제에게 진정을 하게 됨으로써 주후 6년에 폐위되어 지금의 프랑스 지역으로 유배를 감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이후 유대 지역은 로마의 총독 관할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3. 비유의 초점: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비유는 귀인이 왕권을 받으러 먼 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때까지의 기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은 잘 알려진 아켈라오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이용하여 당신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가 만국의 심판주로 오시는 때까지의 기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유 속의 귀인은 열 므나를 가지고 열 명의 종에게 각각 한 므나씩을 나누어주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명했습니다(13). ‘내가 돌아올 때까지’라는 말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결국 그 귀인은 백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치권을 받아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첫째로 그는 므나를 나눠주고 장사를 하라고 했던 종들과 결산을 합니다. 그 이야기가 비유의 대부분입니다. 둘째로는 자신의 왕됨을 원하지 않았던 백성들을 심판합니다. 이것이 므나 비유의 구성이고 귀인이 먼 나라에 왕위를 받으러 갔다가 왕권을 받아 돌아오는 때까지의 ‘기간’이 초점입니다. 적용적 관점은 예수님과 부활과 재림 사이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A. 하나님 나라의 이중 도래
먼저 우리가 이해할 것은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주님의 재림 때 완성됩니다. 재림은 언제라도 예상치 않은 때에 올 수 있고 아무도 그 때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또한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보았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지연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때를 기다리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서 제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문제는 하나님 나라가 이중으로 도래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0절을 보지요.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또 누가복음 17장 20~21절도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성격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영토의 개념이거나 정치적 개념으로 먼저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 안에서 먼저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왕이 권세를 가지고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기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그 나라가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계 11:15)”라고 이 때의 일을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때를 사는 신자들에게는 어떤 긴장이 존재합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지만 아직 이 세상 나라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긴장입니다. 비록 세상의 모든 사람과 다르지 않게 우리는 이 땅에서 일하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의 목표와 의미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나라)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충성의 대상은 세상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이중 도래를 알고 사는 신자의 삶의 자세입니다.
B. 청지기: 우리는 ‘다’ 하나님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다.
그것을 주님은 좀 더 상세하게 이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귀인이 맡긴 한 므나를 가지고 귀인이 왕으로 돌아올 때까지 장사를 해야 하는 종들의 입장입니다. 므나는 달란트에 비하면 아주 작은 화폐 단위입니다. 한 달란트가 보통 사람의 20년치 임금에 해당한다면, 한 므나는 석 달 정도의 임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를 맡겼다고 한 것은 거의 100년에 해당하는 임금으로 어마어마한 액수인데, 이에 비하면 열 명의 종에게 균등하게 맡겨진 한 므나는 아주 적은 액수입니다. 이 돈은 귀인이 왕권을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장사해서 이윤을 남겨야 할 책임과 함께 종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기한이 있는 책임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때 우리 모두를 포함하여 각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에 대한 심판은 물론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심판 때에 신자들 각 사람에 대한 상이 주어질 것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죽고 나면 다른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기회는 죽음 이전까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재림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시간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 시간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결산의 날은 더딜지는 몰라도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 날까지 장사해서 이윤을 남겨야 할 하나님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가진 물질, 건강, 시간 그 어떤 것이라도 본래 여러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위험한 착각입니다. 우리가 나면서부터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한 므나와 같이 ‘지극히 작은 것’일지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것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로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이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4. 결산: 보상과 벌
왕이 되어 돌아온 귀인은 이제 결산을 하기 위해서 므나를 나눠주었던 종들을 다 불러모읍니다.
A. 착한 종: 보상은 은혜다.
첫째가 나와서 말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16).” 이것은 1000%의 이윤을 남긴 것입니다. 학자들은 요즘같이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었던 고대세계에서 이런 정도의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생각할 수 없다는데 동의합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의 비유들은 일반적인 이야기들을 소재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과장이나 특이한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강조하시는 바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종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그 성실함과 지혜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왕은 이 종에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17).” 이와 같이 둘째가 와서 자기는 다섯 므나를 남겼다고 말하자(18), 왕은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고 상을 줍니다(19). 이 사람들은 ‘착한 종’들입니다(17). 왕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했다고 말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므나는 작은 액수였습니다. 착한 종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그 작은 것에 대하여 충성스럽게 행동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보상을 생각해보십시오. 불과 석달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을 맡겨서 장사를 하게 했는데, 그들이 남긴 이윤을 비교한다고 해도, 그들이 받은 보상은 각각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였습니다. 여기에도 이 비유의 과장적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심은대로 거두는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심은 노력에 비해서 거둔 것이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이렇게 끌고 가심으로써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크기와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이루는 일들, 행하는 것들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듯이 보이지만,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주님께 충성을 하듯 살아간다면,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그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상급을 받게 될텐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비교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B. 악한 종
그러나 착한 종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또 한 사람이 왕에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20~21).” 주인인 왕은 말합니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22~23).” 이 ‘악한 종’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업 수완이 없었던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감의 부족입니까? 본문은 이 사람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사람의 문제는 주인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주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엄한 사람’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엄격하고 날카롭다’ 즉 내가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기면 그것을 싹 다 가져가버릴 사람이고, 혹시 망했으면 그 맡긴 돈에 대한 책임까지도 물을 사람이다 하는 뜻입니다. 이 말은 ‘노력하지 않고 돈을 벌려는 사람’ 혹은 ‘투자 이상의 높은 대가를 요구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또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라는 말은 고리대금업자나 착취하는 주인 혹 농사로 말하자면 악질적 지주계급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주인이 무서워서 자기는 주인이 맡긴 돈을 수건에 싸서 보관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핑계였습니다. 주인의 말대로, 주인이 이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은행에라도 그 돈을 맡겨서 이자라도 얻게 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곁에 있는 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24).”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맡은 종에게 한 므나가 더 주어진들 무슨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이 말은 이와 같이 악한 종에게는 있는 것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그 조차도 아까운 것이며, 그것도 빼앗기고 말 것임을 보여줍니다. 게으르고 악한 종은 한 므나도 맡을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옆에 섰던 종들이 말하지요.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이것은 상여금(보너스)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율법주의의 관점,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왕은 한 마디로 정리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26).” 달란트 비유에서는 이와 같은 종에 대해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함으로써 그가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마 25:30).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은 자기가 왕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원수들에 대한 심판과 처형을 명하는 것으로 이 비유는 마칩니다. 세 번째 종이 소극적으로 왕의 명령을 어긴 자라면 왕됨을 원치 않았던 자들은 적극적으로 반역을 한 자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5.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삶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리고 어린 아기가 아니라 심판주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 그 날까지 주님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올 것이니까 이 세상의 삶은 아무 의미도 없는 헛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완성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날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반드시 올 것이며, 그 날까지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줍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이 땅에서의 삶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단 한 번의 인생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내가 맡은 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일과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의 보상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삶입니다. 대단한 일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주 작은 일들, 사소해 보이는 일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고 살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을만한 작고 사소한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일일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듯이 충성스럽게 감당하십시오. 언제까지 말입니까?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살도록 부름을 받은 청지기요, 종들입니다. 그 날이 당장에 임하지 않을지라도 계속해서 그렇게 하십시오. 이 비유를 들은 사람들은 삭개오의 집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삭개오가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남을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다면 율법이 정한 120%를 훨씬 상회하는 네 갑절로 갚아주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구원을 선언하신 것도 들었기에 그들은 이미 어안이 벙벙했을 것인데, 예수님의 이 비유를 또 들은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인생에서 물질과 돈을 더 얻겠다고 속이고 편법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삶의 방식은 세상에서는 지혜롭다고 말할지 몰라도, 하나님께 충성스럽고 착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기에게 맡겨주신 물질을 나누고 갚아줌으로써 그날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한 므나로 이윤을 남겨 열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얻는 종이 된 것입니다. 천국에서 축복을 누릴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삶도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인생에서 무엇을 맡고 있든지 간에 여러분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충성을 다하여 사십시오. 물질, 건강, 시간 모든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또 여러분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가장 작아 보이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을 맡아 충성스럽게 감당하십시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기에 작은 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무가치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2015년 새해를 시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작은 일들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감당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