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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23). 죄와 은혜 - 2

사무엘하 24:1-2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1-05-15

말씀내용
죄와 은혜. 저는 이보다 더 그리스도인의 삶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단어의 조합을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직한 부하 장수인 우리아를 모살한 본문에서 저는 이미 <죄와 은혜>라는 제목을 붙여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제 두번째로 다윗의 생애 마지막의 이야기에서 다시 우리는 이 동일한 주제를 생각해야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죄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1.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 인간은 교육하면 된다!
우리가 본문 말씀을 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는 공유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를 다루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이 오해가 뿌리 깊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이것이 근대 계몽주의 세계관에 의해서 형성되고 영향을 받아온 꽤나 오래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인간은 말로 가르치고 깨닫게 하면 그렇게 행할 수 있는 내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육이겠지요. 교육만 잘 받으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잠재적인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인간 역사의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입니다. 이런 계몽주의 인간관에서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도 아니고, 은혜도 아닙니다. 오직 교육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교육을 통한 역사의 진보를 확신했고 이것이 20세기 초에 절정을 이룬 인간의 진보에 대한 서구사회의 확신이었습니다. 사실상 19세기에 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을 때, 선교운동에도 이런 계몽주의적 사고가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이런 사상이 붕괴된 것이 바로 20세기에 겪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결국 인간이 이루는 진보라는 것이 바벨탑 처럼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 종국에는 그들이 개발한 기술과 지식으로 악을 행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뼈저린 실패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다시 무너진 바벨탑을 다시 쌓기 시작했고 우리는 바로 그 시대인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라고 한 헤겔의 말이야말로 이런 현실을 잘 보여주지 않는가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이런 계몽주의가 가르쳐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생각 속에도 어느 정도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할 때, 이런 우리 안에 남아있는 우리 자신이 의식 조차 하지 못하는 생각들, 이해들이라고 할지라도 신앙은 거기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 중 중요한 질문은 “인간이 도대체 누구냐”하는 것입니다.

2.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 인간은 교육이 아니라 은혜가 필요하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성경의 처음 설명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타락했습니다. 죄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인간을 총체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개발된 능력으로 진보를 완전하게 성취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성이 교육을 통해서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의 죄성은 너무나 질겨서 죽는 날, 그 순간까지 그가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를 넘어뜨릴 수 있을 만큼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이 가르쳐주는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께 의존적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나은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비록 본문의 사건이 정확하게 언제 일어난 일인가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성경 기자가 이 사건을 다윗의 생애 말년을 보여주는 사무엘하의 맨 마지막에 위치시켰다는 것은 아무 뜻 없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 훌륭해 보이는 다윗의 마지막에 이 사건이 위치해야할 만큼, 다윗의 삶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삶을 멀리서 보면 멋지고 흠이 없어 보이는 삶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헛점 투성이에 죄의 얼룩이 가득합니다.

3.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작정을 이루기 위하여 사단도 사용하신다(24:1; 욥 1:12; 2:6; 창 45:8).
인구 조사는 그 자체로 죄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백성들의 인구를 조사할 것은 모세에게 명하셨던 적이 있습니다(민 1:2).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다윗이 어떤 동기로 그것을 명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3절에 요압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다윗이 가진 동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힘을 보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다윗의 삶은 자기 힘으로 살아온 삶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오직 은혜, 하나님 은혜다라고 말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한 순간, 사람은 그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넘어지게 되어있다는 다윗은 보여줍니다. 자기 능력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내가 몇 번째나 되는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요압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백 배라도 더하게 하실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이렇게 한 것이 하나님의 부추김 때문이었다고 하는 1절의 설명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상당 부분 다윗과 같은 죄가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그 순간 우리의 교만은 암세포 같이 무서운 속도로 우리 내면에 퍼지고 맙니다. 이것은 아마 다윗 왕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가진 문제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 배경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과 같은 역대상 21장을 보면,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1)”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한 본문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다른 본문은 사단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을 이루실 때, 사단을 사용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교만해지는 것은 사단의 유혹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사단을 허용하신 것이지만, 그 허용은 결국 하나님의 작정하신 일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기에서 우리가 본 것이 그것입니다. 처음에는 욥의 몸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소유물에만 손을 대도록 허락하십니다(욥 1:12). 두번째는 욥의 생명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십니다(욥 2:6).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만큼만의 권세를 가지고 마귀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고 죄를 짓도록 부추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요셉의 이야기도 이것을 보여줍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때 자기를 팔아넘긴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형들은 자기들의 악한 마음을 가지고서 죄를 짓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행 마저도 당신의 거룩한 작정을 이루는데 쓰신다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배후에는 마귀의 역사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4. 신속한 회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지다(24:10).
9개월 20일만에 요압이 인구 조사를 마치고 돌아와 보고하게 될 때, 다윗은 자기의 죄를 즉각적으로 깨닫게 됩니다(10). 다윗은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라고 회개합니다(10). 이처럼 신속한 회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밧세바를 범했을 때에는 거의 1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지만, 그가 죄를 깨달았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지적했을 때에야 비로소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다윗은 스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신앙의 성숙과 미성숙의 차이는 죄를 짓는가 안 짓는가 보다 오히려 죄를 민감하고 신속하게 깨닫고 회개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살아오면서 처음과 비교할 때 여러분도 그런 민감함 아래 살아가고 계십니까?

문제는 여기서 또 발생합니다. 다윗이 회개를 한 다음 날 아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 갓에게 임했습니다. 다윗에게 이 죄에 대한 형벌로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를 택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칠년 기근, 삼 개월을 대적에게 쫓기는 것, 그리고 3일 간의 온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참 어려운 결정을 요구하셨습니다. 정말 다윗은 자기 말대로 곤경에 빠졌습니다(14).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정확히 다윗이 무엇을 선택했는지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결과로 보면 3일간의 온역을 선택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무려 7만 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인구 조사 결과로 보면 군사의 수가 도합 1백3십만인데, 거의 1/20이 죽은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이 다윗 한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백성의 죄로 말미암은 사건임을 보여주므로, 이것이 무고한 백성의 억울한 죽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진노하시는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여기서 재앙내림을 ‘뉘우치셨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신인동형론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재앙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다윗은 다시 자기 죄를 자복하면서 왜 백성이 자기 죄 때문에 죽어야 하느냐고 하며 자기와 아비 집을 치시라고 말합니다(17). 결국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와서 온역이 그친 곳,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아 제사를 드리라고 함으로써 이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 합니다.

5.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도덕적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 의존이다!(마 18:3)
여기서 먼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성화의 완성을 향해서 갈 때, 그 결정적 요소가 무엇입니까? 기도를 하루에 3~4시간씩 하는 것입니까? 성경에 달통하는 것입니까? 성인군자가 되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마는 성경이 성화를 말할 때 가장 강조하는 그 결정적 요소는 위에 열거한 것들이 아닙니다. 종종 우리가 속게 되는 것이 앞서 말씀드린 계몽주의적 인간 이해와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섞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공담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영웅을 만들어내는 문화에도 익숙합니다. 어떤 사람이 십일조를 잘 했더니 성공했다는 이야기들 말입니다. 결국 이런 ‘멋’을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고 이것은 소위 승리주의적 기독교의 이단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승리주의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성공담으로 가득한 기독교이고, 기독교의 성화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며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 변종 기독교가 행하는 가장 나쁜 일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으로 살면서, 아니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낙심케 하는 일을 하는 것뿐 아니라, 참된 신앙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으로 증명이 되어야 한다는 심각한 오해를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계에 잘 알려진 목사님 가운데 한 분이 주장했던 고지점령론 같은 것이야말로 이런 오해의 극치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성화관은 결국 기독교 복음을 다른 모든 고등 종교들이 가르치는 내용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으로 만들게 됩니다. 며칠 전 트위터에 올라온 글 가운데 제 눈길을 끈 것이 있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티비 채널돌리다가 부처님 오신날 설법을 듣는데... 소위 현대의 기독교 복음주의 라인의 설교와 얼마나 비슷한지... 쇼킹했습니다.” 도덕적 완전을 격려하고 설교하는 것이 일반 타 종교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슬프게도 오늘날 복음주의의 타락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설교에도 예수님이 나오고, 바울도, 다윗도 나옵니다. 십자가도 말하고 보혈도 말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계몽주의적 복음 안에서 언급되는 무의미한 단어들일 뿐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설교는 언제나 인간의 본성을 기쁘고 뿌듯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요, 인간을 믿는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는 무엇입니까? 처음에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우리는 떠들썩할 수 있습니다. 그 은혜의 충격이 결코 우리를 무덤덤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가며 그가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게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하게 되고 자연히 그는 점점 조용하게 자신에 대해서는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성이 과거에 인식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넘어지는 일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 속에서 그는 자신을 알아가게 되고,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며 하나님께 의존적인 삶을 절박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인의 성화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독립적인 어른이 거꾸로 돌이켜 의존적인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자기가 누구인지를 복음 안에서 비로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점점 더 알게 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괜찮고 자기 능력으로 자기 구원과 도덕적 완전을 이루어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자신, 성경 공부를 통해서 뭔가 되지 않는 자신, 기도로 뭔가를 이루어낼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보는 것입니다. 기도도, 성경공부도 다 쓸데 없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수단으로써 사용되지 않고 도리어 나를 변화시키는 나의 능력의 차원에서 사용된다면 그것은 아무 일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인지를 점점 더 많이 알게 되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 더 의존하게 되는 것이 성화의 결정적 시금석입니다.

6. 성경의 인물들을 통한 예증: 아브라함(창 12; 20), 베드로(갈 2)
성경의 인물들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애굽에 내려가서 아내로 인해서 화를 당할 것을 염려하여 누이라고 속입니다(창 12). 하나님을 만난 처음이니까 인간 자체는 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훌쩍 지나서 99세가 되어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낳기 전입니다. 그때 남방 그랄로 가서 거하게 되었을 때에도 옛 버릇이 또 나와서 아내를 누이라고 하게 됩니다(창 20). 사실 지난 25년 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성장한 그 사람이 이런 일을 저지릅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그는 그 사건을 통하여 이미 자신에 대한 절망을 깊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다시 회복을 경험한 후에, 사도들 가운데 지도력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후일 안디옥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도착하자 그들이 무슨 비난을 할 것이 두려워서 슬그머니 그 식사 자리에서 물러나는 위선을 저지릅니다(갈 2). 베드로가 그렇게 하니까 다른 유대인 신자들도 그를 따라서 위선을 했고 그 유명한 바나바도 유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를 면전에서 책망했습니다. 이게 무슨 창피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이 왜 이런 사건을 기록해 놓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윗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제는 뭔가 도덕적 수준에서 완성도를 보여주어야 할 때인데, 인간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죄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끈질겨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순간만을 기다리다가 고개를 들고 사람을 삼켜 버리곤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삼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아! 내가 이 모양이구나. 나는 여전히 언제나 은혜가 필요한 존재구나. 내가 뭘 잘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었구나. 이렇게 넘어지는 이것이 나로구나.”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그 어느 미숙했던 젊은 날보다도 더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며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7. 인간의 절망점이 하나님의 출발점이다.
사람이 여간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의 글을 읽으면 인간이 이렇게 깊은 절망을 할 수 있구나 하고 느끼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느끼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정직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인간이 절망하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은 일하기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대신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붙들고 가는 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절망을 하십니까? 아니면 그저 즐겁게 즐겁게 인생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절망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직도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의 현실을 보는 눈이 아직도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인생에서 목적하는 바가 단지 성공이고 즐기는 것이라면 절망까지 가야 할 일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우리가 하나님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절망하지 않을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 이해가 바로 계몽주의가 가르쳐주었고 오늘날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간은 은혜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살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출발점을 지나서 그 길을 걷고 계신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런 절망의 지점을 통과하셨습니까? 그런데 그 절망점을 지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시작한 사람은 또 알게 됩니다. 내가 나 자신만을 본다면 결코 그 절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점점 더 알게 되는 것입니다.

8. 신자의 영원한 고백: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7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하나님의 진노는 여부스 사람인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멈추었습니다. 이 장소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야말로 구약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 자리가 바로 다윗으로부터 1000 여 년 전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그 산, 모리아산이기 때문입니다(창 22). 독자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헌신이 있었던 바로 그 산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수양을 준비하셨고 수양으로 독자를 대신하셨습니다. 역대하 3:1에서 성경은 이것을 증거합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솔로몬이 어디에 성전을 건축합니까? 바로 이 자리, 아브라함이 독자를 바치려고 했던 곳,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멈춘 곳, 바로 아라우나(오르난은 아라우나와 같은 말입니다)의 타작마당의 그 자리에 성전을 건축합니다. 아들을 대신하는 수양이 필요했던 곳이라는 말은 독자를 죽여서 번제로 드려도 인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제공하시는 흠 없는 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바로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이 드려지는 자리에서 멈추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 세워진 성전은 사실상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킬 뿐입니다. 주님은 오셔서 성전을 헐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성전 자체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로 향합니다. 다윗은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습니다.

본문의 이 마지막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복음의 진수를 확신케 합니다. 다윗의 성전 건축의 열망과 헌신이 다윗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의 독자를 바치는 열심과 헌신으로도 안 됩니다. 죄인인 다윗 그리고 그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식으로 계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어떤 것으로 안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으니,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으니 라고 말하면서 그 분께로 나오라고 말합니다. 그분을 알고 그 분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자는 영원한 죽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의 열심, 인간의 교육이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죄인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는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을 증명하고 사는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증명하고 살 자들입니다. 여러분의 자존심으로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의 삶의 고백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고백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치지 않는 고백이 되어 일평생을 하나님께 의존하고 더욱 의존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