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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21). 비방과 저주가 찾아올 때

사무엘하 16:5-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1-05-01

말씀내용
1. 부당한 비난을 당할 때가 있다.
살다 보면 욕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잘잘못 여부를 떠나서 사람들이 나를 비방하고 심지어 저주까지도 서슴지 않는 그런 경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잘못이 분명해도 그런 비방이나 저주를 마음으로 견뎌 내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 어떤 이유나 잘못도 없이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참 억울하고 살기 싫다고 느낄 만큼 사람의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최근 십여 년에 걸쳐 많은 젊은 연예인들이 자살하는 것을 우리는 뉴스에서 보고 들어왔습니다. 그 중 많은 이유가 인터넷에 올린 익명의 그리고 무책임한 비방의 글들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비방과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이야기는 그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나서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을 때 당한 작은 사건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만나게 될 때, 믿음으로 반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구약의 이야기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의 삶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신약 성경이 가르쳐주는 복음의 진리의 실제적인 예들을 무수하게 증거해줍니다. 복음은 머리 속에 이해된 진리가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때 과연 복음은, 믿음은 어떻게 역사하는가, 일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2. 시므이의 비난과 저주
다윗이 아들의 반란으로 궁을 떠날 때, 감람산 마루를 넘어 베냐민 지파의 지경에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요단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성입니다. 거기서 베냐민 지파였던 사울 가문에 속한 시므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아마도 사울 왕가의 몰락과 함께 몰락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그것에 한이 맺혀 있는 인물로 등장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불신앙적인 인물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 그는 조용히 한을 품고 살아왔지만, 이제 다윗이 아들의 반역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되자, 이 기회를 이용해서 다윗을 맞아 돌을 던지면서 저주와 욕설을 계속했습니다. 그가 한 말이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7).” 피를 흘렸다고 비난한 것은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다윗이 전쟁의 사람이었고 전쟁터에서 많은 피를 흘린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도 다윗을 향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대상 28:3).” 그러나 지금 시므이가 말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 왕가와 관련된 것이고, 시므이는 다윗이 사울 왕가의 몰락을 만들어낸 주범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사울 왕가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의 석연찮은 죽음에 대한 책임을 다윗에게 돌리는 것이고(삼하 3), 심지어는 사울의 아들로 왕위를 이었던 이스보셋의 죽음의 책임도 다윗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삼하 4). 아브넬은 자기 형제 아비새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다윗의 심복인 요압에 의하여 비열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죽음 후에 장군인 레갑과 바아나에 의해서 암살을 당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지고 투항한 레갑과 바아나를 왕을 죽인 죄로 사형에 처했고, 아브넬을 죽인 요압에 대해서도 결국은 자신의 유언을 통해서 다루게 됩니다. 하지만 이 두 죽음이 다 다윗과 관련이 없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것 때문에, 시므이는 다윗을 향해서 ‘피를 흘린 자’라고 비난과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는 ‘비루한 자’라고 욕을 했는데 이 말은 ‘쓰레기 같은 놈아’라는 욕입니다. 그리고는 ‘꺼져버리라’고 연달아 저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다윗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해석까지 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8).” 시므이가 이미 견딜 수 없는 슬픔과 비애를 지고 피난길에 오르는 다윗을 저주하고 비난하는 것은 다윗에게는 더욱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시므이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들으라는 듯이 다윗을 비난하고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심지어 다윗의 피난길을 따라가면서 까지 돌을 던지고 티끌을 날렸습니다(13). 이것은 왕 다윗에게는 말할 수 없는 수치였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시므이가 하고 있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다윗을 부끄럽게 만드는 행위였습니다. 시므이의 비난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말은 다윗의 뼛속 깊은 곳을 도려내는 것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전혀 사실과는 다른 것이었고, 다윗의 진심과는 너무나도 먼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악의에 찬 거짓이었고 모함이었습니다. 다윗을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3. 믿음이 일하는 방식
이런 부당한 비난을 받을 때, 심지어 저주까지 받게 될 때 당사자의 마음은 매우 지치고 힘들 것이 당연합니다. 이때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를 어떤 면에서 다르게 만드는 힘이며, 능력이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깨닫고 은혜를 알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실제를 보여주는 너무나 선명한 실제 상황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로써 그의 믿음을 알아볼 것입니다. 한 사람이 성경에 대해서, 영적인 일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영적 실력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이 어떻게 역사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살펴야 하는 주제입니다. ‘이렇게 하라’가 아니라, 신자는 ‘이렇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A.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주목하라.
먼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의 정의대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하게 하는 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신자가 이런 상황 속에서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도대체 이런 일을 통해서 내게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묻게 됩니다. 물론 믿음이 있다고 해서 이 대답을 분명하게 알고, ‘아, 이것이구나!’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에는 그 일이 지나고 나야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언제나 특히 이렇게 신자를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만들 수 있는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주목하게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보이게 되는 반응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났을 때, 다윗의 영적인 상태는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을 제가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게는 이 압살롬의 반역을 통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두번째 광야를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그의 영적인 삶을 회복시켜주시게 됩니다. 이렇게 영적인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일어난 아들의 반역을 통해서 다윗은 드디어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게 된 첫번째 특별한 사건이 바로 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므이가 비난과 저주를 하면서 따라올 때, 다윗의 주변에는 여전히 그의 신복 장군들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아비새가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라고 다윗에게 구합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이 손에 직접 피를 묻힐 필요도 없었고, 아비새의 말대로 시므이 같은 자는 그저 죽은 개에 불과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아비새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말에 나오는 주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쉽게 보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10),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11),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12).” 이것이 바로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언제나 모든 상황 속에서 믿음의 사람, 신자가 가지는 태도는 ‘너와 나’가 아니라, ‘너와 나 그리고 하나님’입니다. 언제나 모든 상황 속에서 신자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이 일을 통해서 하고 계시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B. 믿음으로 대응하면 감정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믿음으로 대응을 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감정으로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의 감정이란 것은 너무나 반사적이고, 즉각적이기 때문에 사실상 아무리 머리로 이해를 한다고 해도 상처를 받게 되고 또 힘이 주어지기만 하면 그 상처에 대해서 반응을 하게 됩니다. 때론 우리가 우리를 음해하고 중상모략하며, 부당하게 비난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갚아줄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다윗과 같이 시므이를 죽은 개 정도로 여길 수 있고 그를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면 상황은 매우 다를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 반응을 하지 못하거나 그 비난의 근거가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에 반응을 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으로 반응을 하는 것과는 절대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을 할 때에만 우리는 감정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믿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의 영적 상태가 매우 저조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미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정신적인 파탄에 이르렀을 다윗의 입장에서 엉뚱한 화풀이의 대상이 되기에 너무나 적합한 사람이 시므이였지만, 다윗은 그런 식의 감정적 대응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C. 갚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신뢰하라.
신자가 이런 일들 속에서 감정으로 반응하지 않을 수 있음은 그 신자가 가진 믿음의 내용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믿음의 내용이란 것은 원수를 갚으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 강조해서 말씀하시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하나님이 모든 원수를 갚으시고 심판을 통해서 공의를 이루실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한 나쁜 일에 대해서 그대로 갚아주어야 직성이 풀린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결국은 나 자신을 파괴하고 망가뜨리는 결과를 보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했습니다(롬 12:19). 원수가 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는 것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두는 것입니다(롬 12:20). 아마 이 말씀은 원수를 부끄럽게 만들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게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갚으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으실 것을 우리가 알고 믿기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심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D. 이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수단이다.
그러나 믿음이 하는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나쁜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수단이라는 인식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말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이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 이 나쁜 일이 하나님의 축복의 수단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2절입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다윗은 자신의 원통함 즉 당하는 고통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하는 고통스러운 저주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선을 베푸실 것에 대한 기대를 가집니다. 이 사건이 하나님께서 나를 가르치시고 연단하셔서 데리고 가실 은혜의 자리, 축복의 자리에 이르는 계단이 될 것이라고 그는 이해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장래에 주실 장래의 은혜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신자 안에서 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스토리 라인을 보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저 표면적으로 일어나는 게 다가 아닙니다. 그 밑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스토리 라인이 있습니다. 우리로 그것을 주목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요셉이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가 형제들이 자기를 팔아서 그 숱한 고생 끝에 애굽 총리가 되어서 형들과 재회했을 때, 형들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바로 이 하나님의 스토리 라인을 보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나를 위해서 만들어놓으신 특별한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용서할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어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E. 신자의 위로: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
이런 부당하고 억울한 상황, 부당한 비난과 저주를 받아야 하는 신자에게 위로는 오직 하나입니다. 뒤에서 나를 욕하는 사람, 앞에서 나를 저주하는 사람, 공개적으로 나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사람에게 갚아주는 것이 위로가 아닙니다. 신자의 위로는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나를 알아주시면 됩니다. 만인이 나를 오해하고 나를 둘러 치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알아 주시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천만인이 나를 알아준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이 나를 모르시면 최종적으로, 궁극적으로 나는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의 영생에 필요한 조건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나를 알아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라는 고백에서 다윗은 이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비새가 자기를 알아주고 제안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아시면 된다. 하나님께서 갚으실텐데, 아비새야, 네가 애쓸 것 없다.”는 담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언제나 억울한 것이 문제입니다. 억울하면 이제 더 이상 들을 말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억울한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도 다 뒷전으로 밀어놓는 것이야말로 신자에게 있어서 제일 못되고 악한 죄입니다. 억울해서 앞이 안 보이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는 억울할 게 없는 사람입니다.

A. 내가 죽은 여부는 내가 받는 대우에 대한 나의 반응이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람입니다. 그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죽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죽은 존재는 자기 이름을 비난하고 자기 인격을 저주하는 부당함 앞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우리의 고백은 다윗이 만난 것과 같은 상황 속에서 그 진정성을 드러내주게 됩니다. 즉, 내가 남들로부터 받는 대우에 대한 나의 반응이 옛 자아의 죽음 여부를 드러내주는 가장 민감한 테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입니다. 이제 신자 안에 사는 분은 그리스도십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실 때,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부당한 처사를 많이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압살롬의 반역으로 겪고 있는 일과 더불어 시므이와 같이 천한 자가 자신을 부당하게 비난하고 저주할 때, 그것을 받을만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11)?” 다윗은 자기가 이런 일을 당할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하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11). 그는 내가 지금 당하는 모든 대우는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며, 내가 당할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 자아의 죽음을 인정하는 신자의 안에서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을 가장 참지 못하게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누가 뒤에서 여러분을 비난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입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여러분의 얼굴 앞에서 여러분에게 모욕을 줄 때입니까?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하는 일을 당했을 때입니까?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D.L.Moody의 이야기가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가 어느 지역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 지역 신문들이 무디를 무시하고 깍아내리는 비난성 기사들을 썼다는 소식을 집회를 준비하는 스탭을 통해서 듣게 됩니다. 그 때 무디는 “그 사람들이 그 정도로 나에 대한 이야기를 쓴 것은 나를 몰라서 그런 것일세. 그들이 내가 진짜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그 정도로 쓰고 만족하지는 않았을걸세.” 그가 캠브리지 대학의 젊은이들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영국에 가서 캠브리지 대학 집회를 인도할 때 학생들은 그를 미국 촌뜨기로 여기서 그가 영어 문법이 틀릴 때마다 발을 구르고 그를 조롱했지만, 그는 집회 내내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집회를 통해서 귀한 하나님의 종들을 불러내셨습니다. 이 집회에서 한 학생이 무디에게 빼곡히 쓰여진 종이를 내밀면서 틀린 문법 사용을 다 교정했다고 말할 때, 무디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젊은이, 나의 그 엉터리 영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써주시는데, 젊은이의 그 완벽한 영어를 주님께 드려보게나. 하나님께서 얼마나 영광스럽게 젊은이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겠는가?”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사람의 말입니다. 다윗이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태도가 본질적으로 이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B. 인류 역사상 일어난 가장 부당한 일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일어난 일이다.
여러분이 억울하다고 생각이 될 때,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인류 역사상 일어난 가장 억울하고 부당한 일은 바로 2000 여년 전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자들은 바로 이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아는 것만이 아니라 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고상한 지식으로 인하여 모든 부당하고 억울한 일들, 우리 자신을 향한 부당한 비난과 저주를 넉넉하게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 비난과 저주, 조롱과 멸시, 수치를 담당하심으로 내가 얻은 영화로운 구원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당하는 비난과 저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일로 인하여 여러분을 빚어가고 계신다는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