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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20). 두번째 광야가 필요하다

사무엘하 18:3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1-01-23

말씀내용
어느 새 우리는 다윗의 생애의 마지막 부분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다윗의 생애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뉘어지는 분수령은 밧세바 사건입니다. 다윗의 전반기 생애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 사울이라면, 이제 다윗의 생애 후반기의 중요 인물은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하 13장에서 18장에 이르는 비교적 긴 본문에 해당하는 말씀을 상고할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 전반기에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그를 광야로 보내서 훈련시키셨습니다. 이제 후반기에 다시 하나님은 압살롬을 통하여 그를 광야로 몰아 가십니다. 본문은 다윗의 두번째 광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근친상간: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하다(13:1~22).
이야기는 다윗의 맏아들 암논이 이복누이인 다말을 사랑하여 상사병이 들었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다말은 압살롬의 누이였습니다. 벌써 이렇게 다윗이 많은 아내를 얻음으로써 집안과 자녀들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암논은 못된 꾀를 내어 아버지 다윗을 이용하여 자기를 위하여 다말이 자기 집에 와서 과자를 구워주면 나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다말을 암논의 집에 보내고 암논은 이복누이인 다말을 겁탈합니다. 근친상간입니다. 문제는 암논이 다말을 강제로 욕보이고 나서는 그 태도가 이전에 몹시 사랑하던 것 이상으로 미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 사람의 반응이 나옵니다. 아버지 다윗은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했습니다(13:21). 이것이 다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암논을 부르지 않습니다. 다윗은 오히려 비겁한 침묵을 선택했습니다. 다윗이 암논의 모습에서 왕의 힘을 이용하여 밧세바를 취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나단 선지자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리라”는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었을까요(12:22)? 하지만 여기 또 한 사람의 침묵하는 사람이 나옵니다(13:22). 그는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입니다. 압살롬은 이 일로 인하여 암논을 미워하게 되었지만 이 일로 인하여 시비를 가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의 침묵은 무서운 침묵이었습니다. 이렇게 2년이란 세월이 흘러갔고(13:23), 다윗은 이 일은 세월 속에 묻혔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경의 시간 언급을 보면 다말이 암논에게 강간을 당한 것은 압살롬이 죽기 11년 전의 일입니다.

2. 형제살인: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다(13:23~37)
옳고 그름이 가려지지 않은 채, 비겁하게 세월 속에서 사건을 묻으려고 했던 다윗의 생각은 착각이었습니다. 2년 후, 압살롬은 다시 아버지 다윗 왕을 이용하여 형 암논이 자기 양털 깍는 축제에 오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결국은 2년간 계획했던 살인을 실행하게 됩니다. 근친상간에 이어 이번에는 형제 살인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알았지만, 형 암논을 죽이고도 아버지를 뵐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살인은 살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압살롬은 아내의 고향인 그술로 도망하여 거기서 3년을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살아있는 아들 압살롬을 향한 아버지 다윗의 그리움은 깊어만 갔습니다. 형제 간의 강간에 이은 살인 사건이 일어난 이 집안의 가장인 다윗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비록 왕, 성공한 왕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자식들의 문제로 인하여 갈기 갈기 찢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다윗의 마음을 알았던 것은 교활한 요압이었습니다. 다윗의 누이의 아들로서, 다윗에게는 조카였고 수많은 전쟁에서 생사를 나눈 군대장관이기도 했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마음을 읽었고, 압살롬이 다윗 앞에 돌아올 수 있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일을 조작하게 되고 결국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성공합니다.

3. 용서가 아닌 용서: 다윗이 압살롬을 사면하다(13:38~14:33).
압살롬이 아버지 곁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정작 다윗 자신은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수많은 감정이 교차합니다. 그토록 압살롬을 그리워했건만, 그리고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했건만 정작 그 아들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습니다(14:24). 그래서 압살롬은 비록 사면을 받아 아버지 앞에 왔지만, 정작 아버지의 얼굴을 대하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2년이 또 흘러갔습니다(14:28). 압살롬의 마음은 견딜 수 없었고 자기를 불러온 요압에게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다윗의 심기를 읽은 요압도 점점 압살롬을 피하지만 결국은 압살롬의 말을 왕에게 전하게 됩니다.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느니 죽여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압살롬을 부르게 되고 두 사람은 만나 입을 맞추게 되는데 이것은 5년 만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끝이 난게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 감정이라는게 참 묘한 것입니다. 다윗의 용서는 결코 진정한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다시 만나 입을 맞추기는 했지만, 이미 압살롬의 마음에 일어난 감정적 반감은 해를 지날수록 통제하기 힘든 지경으로 성장해버렸습니다. 다윗의 용서는 사법적 행위였지만 매우 비인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2년 후에는 입을 맞추었지만 그것도 역시 진정한 받아들임의 표시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마지 못한 행위였을 뿐입니다. 지난 2년도 그렇지만, 압살롬이 이 입맞춤을 통해서도 경험한 것은 용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거절이었습니다. 아버지인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이것은 억울한 해석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런 모든 과정을 보면 죄가 어떻게 죄를 낳게 되고 또 죄로 이어지는가 하는 죄의 연쇄 작용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말을 암논이 강간했습니다. 압살롬은 이 일로 인하여 형제 암논을 무참히 살해합니다. 이 사건은 다윗의 마음에도 완고함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런 완고함과 무정함으로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꽤 길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여기서 다윗을 동정할 수 있습니다. 어느 아버지의 마음이 편해서 그런 아들을 쉽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사건 만큼이나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반응하고 살지 못하는 죄인 다윗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법적 용서 그러나 비인격적인 용서 즉 용서 아닌 용서를 통해서 아들 압살롬의 마음에 또 다른 죄의 씨앗을 심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다윗은 장차 자신이 받게 될 고통의 원인을 직접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다윗 생애의 세번째 중대한 죄이고 가장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가장 많은 대가를 지불하게 된 죄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그토록 풍성히 받았던 것을 아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오랜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결연하게 거부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완고함이 결코 우리 인생에서 드물게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가 당하고 살아가는 아픔이나 상처들이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완고함과 무정함으로 몰아가곤 합니다. 우리도 용서해야 할 대상을 사법적으로는 용서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비인격적인 용서가 되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말 무서운 일이요, 죄라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고 다윗 자신의 마음은 점점 은혜에서 멀어지고 더 굳은 완고함에 익숙해져간 것입니다.

4. 배신: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다(15:1~12).
결국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다윗 생애에 가장 처절한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와 입맞춘 후에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왕자로서 전략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왕에게 재판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가로채고 겸손히 그들을 대하여 재판을 해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이러기를 4년을 했습니다(15:7). 거사를 일으킬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 헤브론에 가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헤브론은 아버지 다윗이 처음에 유다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던 유서 깊은 곳이었습니다.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왕에 오르게 되고, 자기 사람들을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로 보내 압살롬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게 합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 질수록 더 많은 백성들이 압살롬에게로 왔고 다윗의 친구요, 모사였던 아히도벨 마저도 압살롬에게로 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단지 먹을 것만 가지고 사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은혜와 자비 그리고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압살롬에게 필요했던 것은 왕자의 지위 회복이 아니었고 왕궁에서의 윤택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것 이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만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와의 5년만의 입맞춤에서 그가 얻은 것은 아버지의 거절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했듯이 갚아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결국은 그것을 실행하게 된 것입니다. 은혜가 없을 때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를 압살롬의 삶이 그대로 보여줍니다.

5. 광야와 회복: 다윗이 마하나임까지 도피하다(15:13~16:14; 17:24~29).
대세가 압살롬에게로 기우는 것을 본 다윗은 차마 아들과 싸우는 길을 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소수의 신하들 그리고 600명의 용사들과 피난길에 오르게 됩니다. 여전히 왕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대성통곡 소리를 들으면서 왕은 기드론 시내를 지나 광야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15:23). 우리는 여기서 ‘광야’라는 단어에 귀가 솔깃하게 됩니다. 광야는 다윗의 신앙과 경건이 형성되었던 곳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단어를 통해서 다시 다윗이 영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을 가지게 됩니다. 압살롬에게 무정하게 대하였던 지난 10여년, 정확하게 다말이 암논에게 강간을 당했던 일로부터 11년이 지났고 다윗은 그동안 그 마음이 완고하고 무정한 채 지냈던 것 같습니다. 자식들이 이렇게 서로 강간하고 죽이는 집의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정말 아버지 답지 못한 아버지로서 다윗은 그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아버지 답지 못하다는 것은 영적으로 좋은 징후가 아닙니다. 어머니 답지 못한 어머니가 되고 있는 것은 완고함과 무정함에 자신의 마음을 내던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다윗의 마음은 은혜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에게서도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인생의 두번째 광야로 집어넣고 계시는 것을 보십시오. 이제 광야에서 다윗은 다시 왕노릇과 궁전생활의 모든 껍데기들로부터 자유로운 왕 다윗 이라기 보다는 인간 다윗이 됩니다. 그래서 광야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A. 기도가 회복되다(시 41; 55)
이 광야에서 다윗이 드디어 회복되기 시작하는 여러 징후들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제일 먼저 그의 겸손이 회복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다음에 큰 주제로 다룰 것입니다. 그의 기도도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친구요, 모사인 아히도벨이 자기를 배신하고 압살롬에게로 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아마 이것은 압살롬의 배신만큼이나 다윗에게 심각한 상처를 준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히도벨은 다윗의 옆에서 언제나 가장 신실하게 그리고 가장 지혜롭게 조언을 주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사람 때문에 외롭지 않았고 이 사람 때문에 힘이 났었던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때에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 저의 모든 모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이와 같더라(16:23).” 어쩌면 이런 사람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아히도벨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아히도벨의 배신은 10만 대군이 압살롬에게 붙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으로 압살롬은 궁전에 남겨진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게 되고 백성들은 이 일로 인하여 더 압살롬을 따르게 되었는데(16:21~22), 이것은 전적으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일이 성취된 것입니다(12:11). 아히도벨의 배신 소식을 들은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때 다윗은 드디어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15:31b).” 이것은 오랜만의 기도였을 것입니다. 기도가 회복되는 것은 우리의 거칠고 완고하고 무정한 마음에는 아주 좋은 징조입니다. 기도의 마음이 회복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다윗이 이때 쓴 것으로 짐작되는 시편이 있습니다. 41편과 55편입니다. 다윗의 기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편들입니다.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시편 55편을 함께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1~8).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12~13).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22).”

다윗은 이렇게 기도가 회복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광야에서 말이지요.

B. 부드러운 마음이 회복되다(18:5).
두번째로 다윗은 광야에서 부드러운 마음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은 요단 강을 건너 마하나임까지 피난을 간 후에, 이제 자신을 추격하는 아들 압살롬의 군대를 마주대하게 됩니다. 이때 군사들은 왕 다윗은 친히 전쟁에 나가지 말 것을 요청하고, 다윗은 나가 싸울 군인들에게 자기를 보아서 아들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할 것을 명령합니다(18:5). 죽이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싸구려 감상주의에서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인됨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는데서 나온 말입니다. 다윗은 젊은 시절 광야에서 가졌던 그 마음을 되찾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찾는 원수 사울에게 가졌던 마음입니다. 이제 그 부드러운 마음은 적장인 아들 압살롬을 향한 간절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드러납니다.

6. 죽음 그리고 슬픔: 압살롬이 요압의 칼에 죽다(18:1~18, 33).
이런 다윗의 마음 그리고 명령과는 달리, 아니 언제나 다윗의 마음을 읽으면서도 자신을 중심으로 일을 처리했던 교활한 요압은 전장에서 나무에 달려 저항할 능력을 잃은 압살롬을 창으로 찔러죽이고, 그 부하들 10명이 쳐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의 군대와 전쟁을 나간 군인들로부터 다윗이 듣고 싶은 소식은 전쟁의 승패가 아니라 압살롬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이제는 용서하고 압살롬과 화해하고 그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는 그래서 더욱 지난 날 갖지 못했던 아들과의 그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서 그렇게 아들의 생존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들은 다윗은 문루에 올라가 슬피 웁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한 절 말씀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7. 교훈
본문의 이야기는 사실상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죄에 대하여 선지자 나단이 하나님의 징계를 선언했던 그 내용들이 다윗의 생애에서 그대로 성취되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죄값이나 형벌은 아니지만, 다윗이 죄의 결과들과 관련하여 징계를 받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상고했습니다. 이것을 가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발견하는 것은 그 ‘가혹하고도 잔인한’ 징계가 사실상 은혜였구나 하는 피할 수 없는 결론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성경 전체가 그런 것과 같이, 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인생의 두 번째 광야로 데리고 가셔서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회복시켜주고 계십니다.

A. 다윗과 메시야
그런데 제가 이 본문에서 놓칠 수 없는 것 하나는 꼭 지적하고 가야겠습니다. 다윗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경험하신 것을 1000년 전에 경험함으로써 그가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고 주님이 하셔야 하는 고백을 삶을 통해서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압살롬에게 쫓겨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으로 올라갑니다. 울면서 맨 발로 갔다고 했습니다(15:23, 30). 1000년 후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가셨던 바로 그 길입니다. 그가 아히도벨에게 배신을 당하고 쓴 시편은 우리 주님께서 제자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을 언급하실 때 인용하신 바로 그 말씀입니다(시 41:9; 요 13:18). 다윗은 주님께서 경험하실 일들을 놀랍게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인생을 통해서 그런 일을 겪게 하심으로써 메시야를 놀랍게 예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의 그 고통 속에서 지은 시들과 기도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아들에게 쫓겨 광야로 도피하는 다윗의 모습은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인생의 광야에서 모든 조롱과 비참을 경험하신 주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B. 탕자의 아버지와 다윗
오늘 본문이 돌아온 탕자와 그를 기다리던 아버지의 이야기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다윗과 압살롬의 이야기이고, 또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탕자와 그 아버지가 그랬듯이, 아버지는 아들을 되찾고 아들은 아버지를 되찾을 수 있었더라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용서는 용서여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마음을 완악하고 무정하게 만든 범인들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범인을 지목하면서 우리 자신이 그렇게 용서할 수 없었고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노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식을, 부모를, 사랑하는 이들을 다 잃어버리고 있으며 그들의 가슴 속에 깊은 상처와 반감과 증오를 키워가고 있는, 또 하나의 죄를 키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우리는 이해합니다. 그도 별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도 죄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의 죄를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나는 이럴 수 밖에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답지 못하신 아버지들, 어머니 답지 못하신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의 무정하고 완고한 마음을 회개하십시오. 비인격적인 용서도 용서라면서 자신을 정당화하지 마십시오. 자식들은, 아니 모든 사람은 인격적인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사람은 먹고 사는 것, 집과 먹을 것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은혜를 필요로 하고, 용서와 자비 그리고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나도 이만하면 많이 양보해서 용서한거야”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진정으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진정으로 입을 맞추십시오.

C. 광야가 우리를 회복시킨다.
고통은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때론 우리가 왕궁에 오래 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전에 내 인생에 고통을 보내주셨을 때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지를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두번째 광야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싫지요. 아무도 광야를 왕궁보다 좋아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때론 이런 광야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찰스 스미스 박사처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제가 좋아하는 그리스도인 작가인 래리 크랩의 은사입니다. 래리 크랩은 그의 명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다>를 그분에게 헌정했습니다. 그의 헌정사가 이렇습니다. “암이 재발해서라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분이 계십니다. 말년에는 하나님을 더욱 새롭게 발견하여 기쁨을 누리다가 결국 암으로 소천하신 찰스 스미스 박사님, 그분께 이 책을 드립니다.”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감사하지 못할 고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고통을 인하여, 그 광야를 인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잔인하고 혹독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너무나도 너무나도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주어지는 두번째 광야는 결국 은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