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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19). 징계하시는 은혜

사무엘하 12:10-2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1-01-16

말씀내용
오늘 본문은 때론 우리를 당혹케 하는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자신의 범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했고,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너무나 분명하게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로는 용서하시고 벌은 벌대로 주시는 하나님이신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죄에 대해서 언제나 형벌을 면치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 하나님을 선하다 말할 수 있으며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섬길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기 보다는 무서운 하나님이기도 하며, 때론 선하심과 무서움이 교차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로 말미암아 혼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의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거기에는 신앙의 성장도 성숙도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왜 인생의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 좋던 신앙이 무너지게 되는가? 바로 이런 문제,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혼란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지식과 그 지식으로 인한 확신을 더하시기를 구합니다.

1. 그리스도인에게 형벌로서의 고난은 없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형벌로서의 고난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복음 안에 너무나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형벌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로 말미암아 겪어야 할 모든 죄의 대가와 형벌을 조금도 남김없이 다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담당하지 못하신 죄의 형벌이나 남아있는 것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형벌이 대속의 형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모든 신자가 당해야 할 형벌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 부족하다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생활로는 신앙을 부인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들은 “내가 처녀 때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 이런 벌을 주시는거야!”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치룰 죄값은 남은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2.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신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먼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우리야의 가정을 칼로써 망가뜨렸으니, 하나님게서도 칼이 다윗의 집을 영영히 떠나지 않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다윗의 집에 재난이 일으키시고 다윗의 처들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백주에 그와 동침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듣기만 해도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합니까? 이것을 굳이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구절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성경 전체가 주는 일관성 있는 메시지의 큰 틀을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일종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변덕스러움을 보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징계는 일차적으로 치료책, 고치는 약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징계는 우리의 잘못과 죄와 악을 고치는 역할, 교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대원리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십자가 대속의 성격이 그리스도인이 받을 형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도 대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오늘 본문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3.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 죄용서는 죄의 결과들로부터의 구원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또 하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그냥 ‘용서한다’는 말 한 마디로 싸구려 용서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벌하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줍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신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먼저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게 하심으로써 영적으로 죽음을 경험하게 하셨고, 후에는 육신의 죽음으로 그 결과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징계의 차원을 조금 더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의 삯이 사망임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시고 그 벌을 다 주고 나서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차원을 오해하거나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죄를 용서해주셨다면 모든 영적, 육체적 죄의 결과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지 않는가 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가르침은 죄용서가 죄의 결과들로부터의 구원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는 분명히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인정했을 때, 그리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자복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구한대로, 구원의 즐거움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죽지 않은 것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입니다. 왜냐하면 다윗 자신이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미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가 죽어야 할 죽음은 십자가를 지러 오실 그리스도에게 다 넘기셨습니다. 하지만, 그가 감당해야 할 죄의 결과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죄의 결과라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한 값, 형벌과는 다릅니다. 그 벌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의 결과는 형벌은 아니지만, 죄의 결과로서 우리가 짊어짐으로써 우리로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하는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인생을 사는 동안에 이루어가는 성화는 결코 영광 그 자체는 아닙니다. 우린 구원받은 자로 신분으로는 이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앉혀진 존재입니다마는, 아직은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바라보는 하늘의 소망도 여전히 영생 자체와는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용서받았지만, 죄로 말미암아 짊어져야 하는 땀흘리는 삶은 감당해야 했습니다.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은혜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분하기 싫어하는 부분입니다. 은혜는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다 면제해준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은 그런 은혜는 결코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순진한 낙관주의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현실적인 분이십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거룩해지는지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는 성공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성화를 원하십니다. 다윗은 더 이상 이런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식으로 살아갈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범죄의 결과로서 가장 합당한 것을 징계로 주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바라고 은혜를 사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지 않으면서 본문을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어떤 신자들의 끔찍한 죄의 공개)

4. 하나님은 당신의 영예를 반드시 드러내신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징계를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데려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 아이, 자신의 행동과 무관하게 일찍 하나님의 데려가심을 입은 이 아이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에 맡겨야 합니다. 본문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왜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생명을 데려가시겠다고 하시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회개도 있었고 죄용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아이를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 사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 그들의 나라가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성전은 무너져 훼파되고 백성들은 다 제국의 여러 곳으로 사로잡혀갔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은 뭐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은 이런 방식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자기 백성을 심판하여 망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움직이지 못하는 목석우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범죄하는 자기 백성을 때리시고 고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열심으로 다루어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반드시 이루고야 마십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똑 같은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밧세바의 사이에 죄로 말미암아 태어난 아들을 치심으로써 당신께서는 죄를 다루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윗 자신과 그의 주변에 그리고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 회개하기만 하면 되니까”라고 겁없이 말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다윗이 범죄하고 이런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들을 대할 때에 어떻게 그런 어리석고 무지한 말 따위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나, 우리로 죄에 머물러 살지 않도록 죄의 결과와 관련한 징계로 우리를 다루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범죄하지 마십시오. 죄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죄는 그 결과를 남기는 법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예가 세상 사람들의 목전에서 무시를 당하도록 허용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5. 다윗의 범죄를 성경에 기록하신 이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드러내심
다윗의 범죄를 성경에 기록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다윗 같은 사람이 범죄했습니다. 그것도 추악하고 더러운 성격의 죄였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척하고 살지라도 누구나 다 이렇게 넘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은 이로 말미암아 조금도 손상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죄로 다루심으로써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를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의 죽음이었습니다.

6.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받으라(히 12:5~11).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이런 하나님,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심으로써 당신의 자녀로 손색없게 길러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품을 생각할 때, 징계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게 됩니다.

A. 주의 행하신 일은 선하십니다!(20)
다윗은 아이를 데려가시겠다는 말씀이 떨어지자 엎드렸습니다. 그는 금식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밤새도록 간절히 아이를 살려주시기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7일만에 아이를 데려가셨습니다. 아이가 죽자 신하들은 그 소식을 금식하며 기도하는 다윗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아이가 살아있을 때에도 힘들어했는데, 죽었다는 것을 알면 왕이 견딜 수 없어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곁의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 아이가 죽은 것을 눈치챈 다윗은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뜻밖에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베풀게 하는 것입니다. 신하들에게 이 모습은 의아하게 비춰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혹시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아이를 살려주실까 하여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아이를 데려가셨으니 이제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 놀라운 대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 대목에서 넘어지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다윗은 아이를 살려주시기를 원해서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램과 달리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때 어떻게 하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원하는대로, 우리가 기도하는대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 때가 종종, 아니 많이 있습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달랐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때가 중요합니다. 이때 다윗이 보여준 행동은 “주의 뜻은 선하십니다. 주께서 하신 일은 옳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범죄했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비록 내 뜻과 달라도, 비록 나를 아프게 해도, 비록 마음이 상하는 것이더라도 선하시고 옳은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수준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이 어려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이런 신앙의 수준이며, 이토록 신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그 하나님은 실로 얼마나 선하시며 그런 신뢰를 받으시기 합당한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신앙의 자리로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B. 징계와 장래의 은혜(24~25)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밧세바를 통하여 한 아이를 주셨는데, 그가 솔로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그에게 ‘여디디야’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할 말이 있습니다. 이전의 그 아이를 안 데려가시면 되지, 왜 데려가시고 나서 새 아이를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이런 질문에 만족스런 대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징계는 비록 당시에는 아프고 힘들지라도 그 징계를 잘 받으면 징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래의 은혜를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는 징계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모든 징계는 자녀들이 징계를 잘 받을 때, 피하지 않을 때, 반드시 장래의 은혜를 낳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도 주를 바라보며 주께서 베푸실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선포했습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4~5).”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백의 의미를 여러분도 아십니까? 여러분도 이 고백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 깊은 의미의 고백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어떤 자리에 처해있든지 우리로 이런 고백을 가지고 선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C. 악을 보내시는 하나님 그리고 은혜?모든 고통, 모든 환난은 목적이 있다.
제가 주일 아침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강의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은 ‘악을 보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포함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6문에는 “(하나님이) 이 눈물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당하게 하시는 어떠한 악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악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어떤 종류의 악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떠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악은 없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슬픔과 아픔 심지어 악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압니다. 그리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눈물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당하게 하시는 어떠한 악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목적,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없는 고난과 고통은 신자의 삶에 결코 주어질 수 없습니다.

D.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합 3:2)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하나님을 알았기에, 유다를 향한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우리의 삶의 모든 고통과 슬픔 속에서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랬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징계가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풀어주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럴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나의 간구와 달리 주께서 정하신 뜻을 이루실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주의 뜻은 그리고 주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선하시고 옳습니다.”

E. 오직 그리스도!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고 고백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으며 찬송할 수 있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이지요?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가능한 것입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오늘 주께서 주시는 이 말씀들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고백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논리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한 가지 근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우리의 모든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다 쏟아부으셨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으며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을 압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잘 풀려서가 아닙니다. 내가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의 가정이 화목하고 좋은 가정이어서가 아닙니다. 비록 일이 안 풀리고, 실패하고 있으며, 깨어진 가정을 경험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이 날 사랑하심을 아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는 것입니다. 오, 여러분, 이런 은혜를 다윗은 알았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오시기 1000년 전의 인물인 다윗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가 알았던 것을 아십니까? 그가 고백한 것을 고백하십니까? 오, 주께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