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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18). 애통하는 은혜

사무엘하 12:1-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1-01-09

말씀내용
1.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오해: 기쁨이냐, 슬픔이냐?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뿌리깊은 오해가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삶인데 거듭남과 회심의 문제가 현저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현대교회에서는 고치기 힘든 질병이라고 말해야 할 만큼 뿌리 깊이 심겨진 오해입니다. 교회 안에 실제로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채,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때 이런 오해는 만연하게 됩니다. 두 가지 극단적 오해가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애통하는 사람, 늘 얼굴이 눈물로 덮여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60~70년대의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모습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가난과 고난이 유난히 인생 가운데 많았기에 눈물이 많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의 한이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써 풀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친 것은 이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우리의 인생의 한을 가지고 애통하는 문제가 아닐 뿐 아니라, 성경은 명백하게 기쁨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고, 주님도 기쁨을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애통하는 기독교는 기독교 전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반면, 오늘날에는 이런 모습의 기독교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기독교인은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반대의 견해가 등장을 만연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형통의 복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에서 기뻐하라고 하신 말씀을 의지로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슬퍼도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장례식장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슬퍼하면 안 된다고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이 부인될 수 있거나 억압될 수 있고 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성경이 가르친 기쁨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이 주장하는 기독교 희락주의가 말하는 기쁨은 이런 종류의 기쁨이 아닌 것이지요. 물론 우리 교회의 이름에 나타난 ‘죠이’도 그런 종류의 피상적 기쁨이 아니며, 우리 교회의 사명인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확산하는 것’이라고 할 때의 기쁨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피상적 기쁨은 아닙니다.

A. 슬픔과 기쁨의 불가사의한 이중창
그리스도인의 삶을 ‘슬픔과 기쁨의 불가사의한 이중창’이라고 표현한 말은 참 적절하고도 바른 묘사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슬픔이 있고 그러나 그 슬픔은 언제나 기쁨에 의해서 삼켜지게 됩니다. 이 두 정서의 조화는 그리스도인이 이 땅을 사는 동안 계속해서 교차되는 것입니다.

B. 즐거움에 대한 열심으로 타락한 기독교(J.I.Packer)
우리 시대의 영적 거인이라고 할 제임스 패커는 오늘날의 기독교를 이미 ‘즐거움에 대한 열심으로 타락한 기독교’라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왜곡된 기쁨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지 기독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어느 정도로 보장된 부가 가져온 독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한 바, ‘즐거움’은 결국 기독교 복음이 가르쳐주는 기쁨이 아니라, 이 한 세상을 살면서 놓칠 수 없고 놓쳐서도 안 되는 모든 세상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강박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미국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 자신이 여기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 스스로가 더 이상 감각하지 못할 만큼 거기에 젖어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의 세대는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는 성경을 자신들의 삶에 맞추는 기술까지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성경을 보거나, 교회 역사 속에 하나님의 교회가 영광스러웠던 시대를 한 번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어떤지를 금방 알아차리는 것이 어려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성경도, 교회의 역사도 덮어놓고 우리 시대의 옆만을 보고 사는 한, 우리는 우리 시대의 한계와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한 교회의 시대에 타락한 일원으로 종교 생활을 하면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 마저도 그들이 원하는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예배도, 설교도 모두가 그 즐거움에 포로가 되어 있고 그 즐거움만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는 이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다시 이 표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삶은 슬픔과 기쁨의 불가사의한 이중창이다.”

2. 도구(무엇이 애통하는 마음을 만드는가?): 하나님의 말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과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애통하는 마음을 만들어내는가? 우리가 너무나 잘 알다시피 다윗은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라고 고백합니다. 본문이 다 밝혀주지 않고 있지만, 이때 다윗은 철저하게 상하고 깨어진 마음?이것을 애통하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시편 51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시편 51편의 표제에는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시는 회개의 모범을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그는 여기서 애통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오늘날의 교회가 현저하게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 애통함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피상적 즐거움과 기쁨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 애통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애통할 새가 없는 없는 것입니다.

A. 애통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은혜다.
애통하는 마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은혜로운 마음입니다. 물론 다 듣고 있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자는 소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수많은 사람이 주님의 말씀에 감탄하고 권세있는 가르침이라고 하는 평가는 내릴 줄 알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듣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있습니까? 지난 수년 간 여러분은 김형익 목사의 말을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지 못하면, 사람의 말만을 들을 줄 안다면, 심지어 설교를 비평하고 평가할 수 있을만큼 실력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그는 주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목자가 자기 양을 아는 것 뿐 아니라, 목자에게 속한 양은 그 목자의 음성을 듣는 법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데 어찌 그분의 양일 수 있습니까?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의 논지를 아시겠습니까? 애통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마음이다라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며, 애통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인 적이 없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는 매우 강력하고 충격적일 수도 있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거나, 성경의 한 부분을 확대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그렇게 가르친다는 것을 얼마든지 논증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강퍅한 마음을 애통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주는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없습니다. 어떤 대단히 말을 잘하는 설교자라 할지라도 강퍅한 마음을 애통하는 마음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간혹 좀 더 부드럽게 만들 수 있고, 끓는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애통하는 마음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이 일이 다윗에게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보십시오. 그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전해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이라고 하면서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은 나단 선지자입니다. 그가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증거가 그의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때 하나님은 애통하는 마음을 우리 속에 창조하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애통하는 마음의 은혜로 인도하는 것입니까?

B. 하나님의 말씀은 죄와 하나님께 대한 감각을 자극하고 회복시켜준다.
두 가지 차원에서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죄에 대해서 우리를 각성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 자신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언제나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게 해주시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과 빛에 대해서 깨닫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깨달았다면, 그 순간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죄성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거울에 비추어진 우리 자신의 배은망덕한 죄성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구원얻는 믿음을 창조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그 믿음이 자라게 하십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십시오. 나단 선지자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한 후에, 계속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어떻게 선하신 분이셨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려고 기름을 붓고 또 사울의 손에서 구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주인이었던 사울의 집(나라)을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과 유다 족속을 모두 다윗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뭔가 부족하다고 하면 구하는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주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나단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던 한 목동을 하나님의 백성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지금 다윗이 누리고 사는 것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이 이야기 후에, 나단 선지자가 말하는 주제는 다윗의 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겼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긴 행위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두 가지 악을 지적합니다. 헷 사람 우리야를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은 일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긴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업신여긴 행위라고 말합니다. 이 악행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가 어떻게 주어질는지에 대한 말씀을 나단 선지자는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말한 것은 두 가지 주제, 하나님의 선하심과 다윗의 죄성과 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복음의 설교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다루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우리 마음에 불처럼 역사하고, 돌처럼 딱딱한 마음을 부수어뜨리는 방망이처럼 역사하는 것입니다(렘 23:29). 그리고 우리 안에 애통한 마음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는 것을 들었지만 그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든지 아직 자신들의 죄 때문에 심령이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경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애통하는 마음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3. 반응: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애통하는 마음이다(시 51:17).
그렇다면 그렇게 만들어지는 애통하는 마음이 왜 중요합니까? 다윗 자신이 그의 참회시 시편 51편에서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하나님께서 범죄한 다윗에게 원하신 것은 번제나 속죄제가 아니라 상한 심령 즉 애통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습니다. 구약의 경건한 종교인이라면 속죄제사를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자신을 만났고 그분의 선하심을 깊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직감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 제사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지은 죄로 인하여 애통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것은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 말씀은 우리의 죄를 보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A. 죄 때문에(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4)
주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애통하거나 눈물을 잘 흘리는 기질이 있는 사람의 기질을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일곱 개의 복과 마찬가지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징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훈련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자녀의 본성입니다. 무엇보다 죄로 인해서 애통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기독교인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보게 될 때 반응할 수 있는 독특한 반응인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 인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 밖에는 받을 것이 없는 영원한 자신의 운명을 보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다”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는 밧세바에게 그리고 우리야에게 범죄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충성스런 신하들에게도 그의 거짓된 삶은 배신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식하고 자신의 죄를 보는 자는 바로 이렇게 밖에는 고백할 수 없을만큼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모독했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애통함의 회개는 오직 그리스도인만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인식하고 애통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B. 무력함 때문에(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3)
한 가지만 더 생각할까요? 애통하는 자의 복 이전에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마 5:3). 애통함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이르게 되는 자연적 귀결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비로소 하나님만을 신뢰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심령이 가난한 자만 천국을 얻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구원에 있어서의 철저한 무력함은 우리를 더욱 큰 은혜로 인도합니다. 그것이 애통하는 은혜입니다.

4. 결과: 기쁨, 경외함, 영광돌림, 힘, 또 회개, 자기 부인의 능력…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냥 이런 애통함 가운데 늘 머무르는 것인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애통하는 자들 뿐입니다. 죄로 인하여, 자신의 무력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도우심 밖에는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애통하는 자들이고 이들에게 하늘의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위로는 매우 포괄적입니다. 기쁨과 경외함, 하나님께 영광 돌림, 영적 능력, 계속적인 회개의 삶, 자기 부인의 능력을 포함하는 위로입니다.

A. 참된 기쁨에 이르는 길은 애통하는 마음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기쁨, 성경이 말씀하는 기쁨에 이르게 되는 길은 오직 애통하는 마음 뿐입니다. 다윗은 참회의 기도에서 자신에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합니다(시 51:12).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해보았던 애통하는 죄인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구원의 감격, 구원의 즐거움, 구원의 행복감입니다. 시편 51편과 함께 다윗의 참회시로 알려진 시편 32편에서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시 32:1). 하나님의 진노의 무게를 경험해본 사람은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와 정죄가 없는 은혜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로마서 7장 말미의 그 깊은 죄로 인한 고통 속에서 가진 번민을 로마서 8장 1절의 놀라운 선언으로 종결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이보다 더 감격적인 고백과 선언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경험한 애통하던 신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언, 최고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이렇게 찾아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쁨이 슬픔을, 즐거움이 애통함을 이기는 경험입니다.

B. 애통하는 마음의 틈새로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을 넣어주신다(렘 32:40).
애통하는 마음이 주는 또 하나의 축복은 그 깨어진 마음의 틈새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넣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약속대로, “나를 경외하는 마음을 그들의 마음에 두시겠다(렘 32:40)”고 한 것을 이루시되, 어떤 마음에 이루시는가 하면 애통하는 마음, 상한 마음의 틈새로 그런 하나님의 경외함을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통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이르는 길입니다.

C. 영광 돌림, 힘, 또 회개, 자기 부인의 능력..
이것 뿐 아닙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부터 유순해진 성도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 순히 굴복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병자만이 의사의 가치를 존중하고 필요로 하듯이, 애통하는 마음의 소유자만이 그리스도를 자기 영혼의 의사로 존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높이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기도에 힘을 얻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깊은 마음을 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내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절박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또 애통하는 마음을 경험한 자들은 쉽게 자신의 작은 죄라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회개하게 됩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경험한 성도는 실로 자기를 부인하는 능력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어떤 지식으로보다도 더 깊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5. 도전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받는 도전은 분명합니다. 나는 과연 애통함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서 본적이 있는가? 이 애통하는 마음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한 번도 이런 애통함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가?

A.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는 일을 중단하지 말라(시 139:24).
제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께 촉구하듯이 권면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는 일을 중단하지 마십시오.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4).”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합당한 자세입니다.

B. 애통하는 마음을 구하고 회개하라.
잠깐 여러분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반응하는 것을 애통하는 마음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잠깐 양심이 찔림을 받지만, 예배가 끝남과 동시에 찔림 받은 우리의 양심의 불편함도 끝나고 마는 것은 애통하는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할 때, 그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되,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리까지 가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마음이기에 곧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잃어버린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C. 은혜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애통하지 않는 사람은 은혜의 문이 닫히는 날 반드시 애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드릴 말씀은 이것입니다. 은혜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애통하지 않는 사람은 은혜의 문이 닫히는 날 반드시 애통하게 될 것입니다. “화있을진저 이제 너희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 주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비열함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핑계 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죄를 인하여 슬퍼하고 애통해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무한한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이내 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인하여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신 애통하는 마음의 은혜와 함께 하늘의 기쁨,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여러분의 남은 삶에 풍성하게 경험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