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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17). 죄와 은혜 - 1

사무엘하 11:1~12: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1-01-02

말씀내용
1. 다윗의 이야기: 죄와 은혜가 뒤엉켜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재
다윗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가지는 이유는 아마 그의 삶이 정직하게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재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사람들의 오해처럼 경건하고 은혜롭고 흠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결코 아주 미숙하고 영적으로 어릴 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성숙한 그리스도인도 추잡하고 치졸하며 더럽기가 짝이 없는 그런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윗의 삶이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경이 보여주고 가르쳐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오래 도를 닦으면 좀 훌륭해지고 죄와는 거리가 있는 고상하고 품격높은 삶을 살아야 할텐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믿음의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래 믿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윗의 삶이 가르쳐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재는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와 은혜가 뒤엉켜 있는 삶이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느끼십니까? 그런데 이걸 인정하고 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이런 수준에 있는 사람이라고 볼 것이라는 착각 때문에 신앙 생활을 오해 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형제들이 적어지고 결국 외로움 속에서 은밀한 범죄 속에 숨어 미끄러지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걸리면 죄고, 걸리지 않는 동안에는 위장된 경건함에 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서는 도무지 생명이 느껴질 수 없고 발산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죽은 삶입니다. 이런 삶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지면, 교회는 심각하게 손상을 입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윗의 인생에 가장 유명한 두 인물이 있습니다. 하나는 골리앗이고, 하나는 밧세바입니다. 골리앗은 다윗의 인생에 가장 영예를 안겨준 인물입니다. 그러나 밧세바는 다윗의 이름에 영원한 부끄러움이 된 이름입니다. 골리앗을 만났을 때 다윗은 미숙한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을 가장 놀랍게 드러냈습니다. 밧세바를 만났을 때 다윗은 신앙에 있어서 아주 성숙한 인물이 되었지만,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범죄에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생을 이보다 더 정직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죄와 은혜가 뒤엉켜서 날줄과 씨줄처럼 짜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와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2. 죄의 이야기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죄의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갑자기 추악한 범죄의 주인공이 됩니다.

A. 죄가 찾아오는 시간: 안정이 가져오는 불안
죄가 찾아오는 시간이 특별히 있습니까? 참 이상한 것은 이렇게 더러운 죄를 짓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은혜 받은 후에는 변화되어서 이런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고 말해야 될 것 같은데, 골리앗을 믿음으로 이겼던 사람,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의 생명을 두 번씩이나 살려주었던 사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특별했던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인정된 사람이 그 후에 이런 간통과 살인교사와 거짓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믿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는 분명히 광야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경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성경에 많은 인물들이 다윗과 비슷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두 번이나 동생이라고 속였던 일은 그의 신실한 순종 후에 나타나는 일들이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는 위대한 순종 이후에, 술에 취하여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모세가 화를 발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한 일은 그의 인생 초기의 일이 아니라, 거의 마지막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죄가 언제 찾아오는 것입니까? 죄는 죽는 순간까지 우리를 방문합니다. 하지만,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안정이 찾아왔을 때가 가장 위험한 한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제 다윗이 전쟁터에 친히 나가지 않아도 될만큼 안정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하 장수들과 군인들은 나가 싸우고 있지만, 다윗은 그 전쟁도 승리할 것이 너무나 분명한 것을 알기에 마음을 졸이는 대신, 편안히 낮잠도 즐기고 날이 어둡기 전 초저녁에 궁의 발코니를 거닐고 있는 것입니다. 안정이 가져올 수 있는 불안이라면 죄에 대한 불안이라고 성경은 경고하는 것입니다.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정되고 편하고 시간이 많고 돈도 많고 힘도 많을 때는 더욱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B. 죄와 힘(Power): ‘보내는’ 다윗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보냈다’는 단어를 통해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죄는 육체의 정욕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육체의 정욕은 과도한 힘을 가진 강한 사람 안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죄를 지을 기회만 주어지면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상황, 처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내가 저 사람처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보냈다’는 단어와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하면, 오늘 본문에 아마 가장 많이 나온 동사가 ‘보냈다’는 단어일 것입니다. 1절에서 다윗은 요압과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전쟁터인 랍바로 보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힘과 권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절에서 다윗은 자기가 보았던 목욕하던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는 그냥 보내면 다 되는 힘있는 사람입니다. 4절에서 그는 또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 밧세바를 자기 방으로 불러오라고 합니다.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되자, 다윗은 다시 6절에서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기별하여) 우리야를 자기에게 보내라고 명합니다. 다윗은 우리야가 그의 아내인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려는 자기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자 다시 우리야를 전쟁터로 보냅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요압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냅니다. 이 죄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다윗은 ‘보내는’ 다윗입니다. 그는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척척 말을 들어줍니다. 더 이상 그는 직접 칼을 손에 잡을 필요가 없고, 직접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갈 필요가 없습니다. 말만 하면 됩니다. 그는 힘이 있는 왕입니다. 이렇게 죄의 이야기는 힘, 권력의 이야기와 함께 가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경향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힘이 없으면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 힘이 생기면 사람이 스스로 신이 된 것처럼 생각하기 쉽고, 자기 삶을 제멋대로 하려고 하는 마음이 더욱 부추겨지기 쉽고, 다른 사람의 삶을 지배하려는 마음도 생기게 되는데, 죄는 이런 마음의 성향과 관계가 깊습니다. 왜냐하면 죄란 본질상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C. 죄의 은밀성과 점진적인 과정
우리는 이 죄의 이야기에서 죄가 가진 또 다른 성격을 읽게 됩니다. 바로 그 은밀함과 점진적으로 커져가는 과정입니다. 죄는 은폐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외로움과 고독이 깊어지면 사람이 범죄하기 쉽습니다. 저는 클린턴 대통령이 대통령 재직시에 범죄한 일이나, 때론 세상적 관점에서 볼 때 성공한 목사님들이 동일한 죄로 넘어지는 것이 바로 이런 은밀함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것도 은밀하게 이루어진 범죄였습니다. 하지만 밧세바의 임신 소식은 자기의 죄를 은폐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에는 그녀의 무고한 남편 그리고 다윗의 충성스러운 신하인 우리야를 적의 손에 죽이게 되는 일까지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저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던 일이 다윗의 속에 있던 육체의 정욕을 불러일으켰고, 그 여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알아보도록 시키는 단계로 넘어가고, 알아본 후에는 자기 부하의 아내니까 자기가 왕으로서 어떻게 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데까지 가게 되고 결국은 여인을 자기 방으로 불러오고 범죄를 하는 것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 욥은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라고 말했습니다(욥 31:1). 오늘날처럼 우리의 안목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온갖 그림과 상상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욥이 자기 스스로에게 했던 언약처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손이 가는대로 클릭하고, 눈이 가는대로 가게 하는 것에서 우리의 도덕적 선은 무너지고, 하나님에 대한 감각은 무뎌지고, 결국 나는 다윗처럼은 가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미 우리의 마음은 다 다윗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만큼 무너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이 이 자리에 계신 대부분의, 아니 모든 형제님들에게 심각하게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개함과 동시에 여러분의 눈과 마음을 지키는 언약, 그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D. 넘어지는 성숙한 신앙: ‘다윗의 범죄 후 1년’?여러 신앙 인물들의 사례
우리야, 너무나 충성스러운 부하입니다. 비록 그는 자기가 충성을 바쳤던 왕의 배신에 의해서 비참한 죽음을 당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는 참으로 인정받을만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야와 몇 사람의 신복이 함께 죽었다는 전갈을 받은 다윗은 이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비록 최측근 몇 사람이 이 일을 알고 있고 요압도 결국은 알게 되기는 하겠지만, 그들은 결코 발설할 사람들은 아닌 것을 아니까 그는 이제 자연스럽게 밧세바를 자기 합법적인 아내로 불러들입니다. 밧세바는 결국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범죄 이후 적어도 10개월 정도는 더 지났습니다.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범죄한 일로 인해서 무슨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윗의 회개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자, 이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11:27).”

생각해보십시오. 이 1년에 가까운 시간이 되도록 다윗이 그냥 살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회개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밧세바를 사랑했을 테니까, 그들은 서로가 좋았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야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것도 점차 사라져갔을 것이고, 마치 너무나도 정상적인 부부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들이 이 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상상할 수 있는 다윗의 그 1년여의 시간은, 과연 그의 지난 날 받았던 은혜와 조화를 이룬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과연 그가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던 사람입니까? 아니, 정말 그 사람 다윗이 거듭난 것이 맞는 것입니까? 거듭난 사람도 그렇게 죄가 은폐되고 넘어가기만 하면 아무 일 없단듯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저는 적어도 이 기간 동안의 다윗을 우리가 본다면, 그에게서는 도무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증거와 열매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그는 아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감격도, 아무 느낌도, 아무 교감도 없이, 그냥 기도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럴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도 이런 자리까지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오늘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들 가운데도 이런 분들이 계시지 않은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 여전히 종교적 의무를 다하고 계시지만, 예배도 참석하고 기도도 하고 하지만, 그것이 명백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고, 하나님께 대한 조금의 감정도, 사랑도, 느낌도 없다면 여러분은 바로 이런 자리에 계신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른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했고(사 59:1~2), 이 죄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감정을 메마르게 하는 것입니다.

3. 은혜의 이야기
은혜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한 감정이 죽어버린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형식 밖에는 남아있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죄의 이야기가 사람에게 속했다면 은혜의 이야기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은혜가 다윗의 이야기 속에 찾아오기 전에도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는 다윗의 죄 이야기 속에도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놓칠 수 없습니다.

A. 다윗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있었다!
다윗은 ‘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밧세바의 임신한 태였습니다. 밧세바를 불러올 수도 있었고, 밧세바를 범할 수도 있었지만, 밧세바의 임신하는 태는 다윗의 손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한 번의 사건으로 밧세바의 태를 열어 임신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윗 편에서 볼 때,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은혜입니다. 밧세바가 임신하지 않았다면 우리야가 죽는 일이 없었을까요? 다윗은 죄를 그쳤을까요? 그는 더욱 담대해졌을 것이고, 그의 죄를 짓는 담대함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일이 커지는 것이 오히려 은혜였습니다. 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은 저주입니다. 죄짓는 일에 담대해지는 것처럼 저주가 없습니다. 전도서의 말씀대로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전 8:11)한 것입니다.

두번째로 다윗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은 요압의 교활한 마음이었습니다. 결국 요압은 다윗이 요구한대로 우리야를 사지로 몰아넣어 죽이지만, 다윗의 죽는 날까지 그는 다윗의 약점을 가지고 다윗을 조종하는 자리에까지 가려고 합니다. 요압은 자신의 교활함으로 인하여 결국 악역을 감당하지만, 다윗 자신에게는 이것마저도 은혜였다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의 절대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있었던 것입니다.

B. ‘보내시는’ 하나님, 즐겁지 않은 사명
‘보내는’ 다윗의 과도한 권력 사용이 어디서 끝나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보내시는’ 행위로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범죄하고 1년여를 지내는 동안에 침묵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시간이 꽤 흘러 밧세바의 아이가 태어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나단 선지자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즐거운 사명은 아니었습니다. 나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 경건한 왕, 다윗이 그런 범죄를 저지르다니 말입니다. 적어도 영적인 감각이 있는 나단 선지자가 지난 1년여 다윗을 보았을 때 이상한 점들을 느끼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추악한 은폐된 범죄가 다윗에 의해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또 어떻게 이 말씀을 다윗에게 전한단 말입니까? 충신 우리야도 아낌없이 죽인 다윗이라면 자기 같은 선지자 죽이는 일 쯤이야 얼마나 더 쉽겠습니까? 나단 선지자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윗의 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C. 설교의 힘
나단 선지자는 지혜롭게 비유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부자가 자기 손님을 대접하겠다고 딸처럼 귀하게 여기는 암양 새끼 하나 밖에 없는 가난한 자에게서 그 양을 빼앗아 접대를 했다는 나단 선지자의 고발에 다윗은 그 부자는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판결을 내립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단 선지자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설교, 하나님의 말씀의 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3인칭으로 이야기하다가, 그것이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2인칭으로 말했을 때, 이 말씀을 듣던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라고 1인칭으로 고백을 합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설교는 3인칭으로 자기방어망을 뚫고 2인칭으로 찌르고 그것이 1인칭 반응을 이끌어내는 힘이라고 한 말이 옳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준 이 역사상 최고의 표적 설교는 적중했습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 죽었던 생명이 소성되게 된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이 은혜의 이야기,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바로 이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이야기 속에 살아가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하나님의 이야기, 그것도 은혜의 이야기 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오늘 우리는 죄와 은혜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이야기일 수만은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다 이 죄와 은혜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다 죄의 이야기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게 되었을 때, 주님을 만났을 때에는 다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죄의 이야기를 완전히 몰아내고 은혜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동안, 우리는 죄와 은혜의 뒤엉켜 돌아가는 속에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몇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A. ‘죽는 순간까지’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간구를 압니다. 왜 주님께서 그 짧은 기도 속에서 그것을 언급하셨을까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죽는 순간까지 구해야 할 중요한 간구이기 때문입니다. 성숙할 때까지가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시험에 들지 말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심각한 죄는 그들의 경건이 증명된 후에, 성숙한 상황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동행이나 오랜 세월에 걸친 탁월한 경건 마저도 성도 안에 내재하는 죄의 본성을 근절하거나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성은 죽는 순간까지 거룩한 성도의 경건 속에서도 살아있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경건이 아무리 깊은 수준에 들어간다고 해도 말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간구는 우리의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드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권했습니다(고전 10:12).

B. 힘의 결핍을 감사하라!
두번째로 힘의 결핍을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이 사람을 ‘보내는’ 다윗이 아니라면 그것을 인해서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보내는’ 사람의 입장이시라면 그것도 감사하되 더욱 조심하십시오. 이것이 없어서 불평하는 자리에서 이것이 없는 것이 감사하다는 고백의 자리로 가십시오. 만일 왕궁에서 더러운 죄를 짓는 삶을 살게 된다면, 사울에게 쫓기는 광야에서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매일 맛보고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왕궁에서는 있어서 죄를 짓고, 광야에서는 없어서 죄를 짓는 일을 주의하십시오.

C.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께 주시는 명령은 “내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들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것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아멘으로 응답하고 무슨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 그 표적 설교를 들었을 때 반응한 것처럼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노라.”

혹시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과 너무나 오래도록 감정적인 애정없이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회개하셔야 할 것을 주님께서 그 말씀으로 깨닫고 보게 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주일 선포되고, 여러분이 기회있는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말씀 앞에 머리를 조아릴 때, 그 말씀으로 여러분의 돌 같은 심령이 물같이 녹아질 수 있는 은혜를 구하고 구하고 또 구하십시오. 그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여러분의 그 무딘 심령이 언젠가 살아나리라는 헛된 기대를 버리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시 19:7).”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범죄하고 1년여 다윗의 화석화된 영혼을 깨우고 소성케 한 것은 바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잘 살고 잘 하고 있는지를 확인받기를 기대하십니까? 저는 이날 하나님의 은혜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윗에게 찾아온 날, 다윗은 자기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다윗이 썼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시편 119편의 고백이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9).”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25).”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29).”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34).”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75).”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133).”

이렇게 우리 모두가, 죠이선교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복된 새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