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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16). 헤세드를 베푸는 사람

사무엘하 9:1-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12-26

말씀내용
1. 이야기의 초점: 하나님을 위하는 다윗이 아니라 다윗을 위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지난 주일에 상고한 말씀은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에 관한 본문이었습니다. 거기서 다윗은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뭘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8장에는 다윗의 승전 기록들이 나옵니다. 이 승전기록은 그냥 쓰여진 것이 아니라, 바로 다윗이 그 앞에서 배운 교훈을 그대로 경험하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전쟁을 잘 싸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서 전쟁을 싸워주시고 승리를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6절, 14절에 나옵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구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길래 다윗이 이렇게 되는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은혜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공이십니다. 다윗은 전쟁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어쩌면 이렇게 백전백승할 수 있는가? 누가 이 전쟁들을 이기게 해주는가?” 바로 하나님이다 하는 결론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전리품의 대부분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습니다(삼하 8:11). 그러나 그가 생각한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대로 그는 젊을 때, 자신이 사울에게 쫓기던 때, 요나단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2. 역사에서 잊혀질 뻔한 한 사람의 이야기: 므비보셋의 증오와 한, 그리고 두려움(삼하 4:4)
사울이 왕이었고 다윗이 도망자였던 것은 이미 어제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사울은 죽었고 가문은 몰락했으며 다윗은 왕입니다. 이 속에서 거의 잊혀질 뻔 했던 한 인물이 성경에 소개됩니다. 므비보셋입니다. 그는 사울가에 유일하게 남은 자손이었고, 요나단의 아들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대개 몰락한 왕가의 후손들이 그렇듯이 불행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5살 때 이야기를 성경이 적고 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을 포함한 세 아들이 전장에서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완전히 진멸되었다는 소식이 왕궁에 전해졌을 때 그는 5살이었습니다. 이제 블레셋 군대가 왕궁으로 밀려들어와 남은 왕손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사울의 원수 다윗이 이제 왕권을 주장하고 밀어닥칠지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고대 근동의 풍습은 새로운 왕권이 확립되면 왕권 전복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이전의 왕손들을 다 제거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어린 므비보셋을 안고 유모는 황급하게 도망을 하다가 그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므비보셋은 두 다리가 다 부러졌고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기회마저 잃어버리고 두 발을 다 저는 절뚝발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목발도 짚을 수가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유모와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블레셋과 다윗에 대한 증오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자라났을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된다면 그는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증오와 한, 그리고 두려움이 그가 자라면서 경험한 것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불구의 몸이 된 것도 그렇지만, 그의 정신세계 마저도 사실상 건강하게 자라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윗이 보낸 사람이 그의 집에 나타났습니다. 다윗의 원수였던 사울의 자손인 그가 죽음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3. 하나님의 헤세드
A. “므비보셋이여, 무서워 말라.”(6~7a)
이야기의 장면은 이제 다윗의 궁입니다. 다윗은 엄위로운 보좌에 앉아있고 그 앞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머리를 땅에서 떼지 못하는 므비보셋이 엎드려 있습니다. 침묵을 깬 것은 다윗이 므비보셋을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므비보셋이여!” 므비보셋의 이름을 부른 것은 다윗이 그를 인격으로 존중한다는 표시였습니다. 므비보셋은 이런 존종을 얼마나 받으면서 자란 사람일까요? 왕손이기는 하나, 두 발을 저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고, 한 사람의 인격으로서 존중과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원수였던 사람,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생사 결정권을 가진 다윗 왕이 자기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그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은 떨리는 목소리로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무서워 말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다윗은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아마 오랜만에 불러보는 요나단의 이름을 말할 때, 그의 어조가 어떠했을지를 상상해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의 이 말 속에는 그냥 무서워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다윗의 마음에 묻혀있던 요나단과의 우정과 언약 그리고 그를 향한 깊은 연민이 우러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므비보셋에게 은총 곧 헤세드라는 말을 했을 때, 그 말은 므비보셋의 마음에 어떻게 들려졌을까요? 헤세드는 환경이나 감정상태나 개인적 취향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어느 것도 헤세드를 변개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에게 속한 단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 왕이 므비보셋을 향하여 그 헤세드를 베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B. 신분과 기업의 회복: 사랑은 느낌이나 말이 아니라 내용이다.
므비보셋이 이쯤 느끼고 있을 때, 다윗의 말은 쉬지 않고 계속됩니다.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찌니라.”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다윗은 먼저 므비보셋의 신분을 회복시켜주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왕손이었습니다. 다윗은 다시 그를 자기 식탁에 다른 왕자들과 함께 앉게 함으로써 그의 왕자의 지위를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가끔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모든 왕자들과 조금도 차별이 없는 권리를 회복시켜준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속했던 기업을 다시 그에게로 돌렸습니다. 기업의 회복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그리고 왕가의 몰락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므비보셋에게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실상 므비보셋은 일반적 관례로 볼 때, 사형이 집행되어야 할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므비보셋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므비보셋은 다시 절을 하면서 말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이것이 은혜를 받는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말입니다. 다윗은 바로 사울의 사환이었던 시바를 불러 므비보셋에게 속한 토지를 경작하여 므비보셋을 공궤할 것을 명합니다. 다윗이 베푼다고 말하는 은총과 사랑은 결코 느낌이나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내용, 므비보셋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는 것입니다.

4. 헤세드의 근거: 요나단과의 언약(삼상 18:3; 20:14~15,42; 23:16~18)과 사울에게 한 맹세(삼상 24:20~22)
헤세드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 3번 등장하는데 모두 다윗이 하는 말 가운데서 발견됩니다(1,3,7). 이것은 은총이라고 본문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두번째로 말했을 때, 다윗은 분명하게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절대로 변함없고, 실패할 수 없는 사랑이며,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다윗은 갑자기 왜 이런 은혜를 므비보셋에게 베푸는 것입니까? 그가 그냥 사랑을 베푼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헤세드를 베푼다고 한 것은 분명히 의도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는 언약적 사랑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언약에 근거한 사랑입니다. 그 언약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입니다. 왜 성경이 이전에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언약의 관계로 설명했는가 하는 이유가 선명해집니다. 사무엘상 18장에서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성경 기자는 특별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3절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라는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사무엘상 20장에 상세히 나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한참 쫓기던 때입니다. 14~15절에서 요나단은 다윗에게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성경 기자는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찌어다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삼상 20:16). 요나단은 여호와의 인자를 베풀라는 내용의 언약을 다윗과 맺습니다. 42절에는 다윗과 요나단의 또 한 번의 만남이 기록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맹세하기를,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고 합니다. 그들의 마지막 만남에 대한 기록은 사무엘상 23:16~18에 있습니다. 여기서 요나단은 드디어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 두 사람은 다시 언약을 맺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다윗은 요나단과만 이런 언약을 맺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다가 사울의 생명을 구해주었을 때, 사울도 다윗의 왕될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 그때 자기 후손을 끊지 않겠다고 맹세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다윗은 사울에게도 그것을 맹세하였습니다(삼상 24:22). 다윗이 지금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찾아 그에게 은혜, 하나님의 헤세드를 베푸는 것은 바로 이 언약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푸는 것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헤세드인 것입니다. 이 헤세드를 통해서 다윗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이 아닙니다.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5. 므비보셋과 아무 상관도 없이 주어지는 헤세드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므비보셋에게 주어진 헤세드는 사실상 므비보셋과는 전혀 무관하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므비보셋 자신의 인품에 끌려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이 그냥 불쌍했기 때문에 그를 도와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므비보셋에게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이 헤세드는 그와는 전혀 무관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아버지 요나단이 다윗 왕과 맺었던 언약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혜택입니다. 므비보셋이 받았던 헤세드, 다윗이 베풀었던 하나님의 헤세드 처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예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는 전혀 무관하게 주어진 이 구원의 은혜는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맺어지신 영원한 구속의 언약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썼습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6. 교훈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다윗이 왕위를 받고 나라의 평안을 얻은 후에 한 첫번째 일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고 성전을 짓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그가 하고자 한 것은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헤세드를 베푸는 일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번째 한 일을 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성경에서 그냥 지나가는 에피소드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구약 성경이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입니다.

A. 복음: 무가치한 존재에게 주어진 조건 없는 은혜
여러분, 오늘 이야기에 등장하는 므비보셋이란 인물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증오와 한 그리고 두려움을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의 비참함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게다가 그는 두 발을 저는 사람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목발 조차 사용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오늘날과 같이 장애를 지닌 분들을 위한 많은 기계 장치들이 개발되어 있는 현대에는 다른 이야기이겠습니다마는, 당시의 형편으로 그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치유의 기적을 기다리는 38년된 병자와 마찬가지로 자기 힘으로는 꼼짝도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요 5). 그는 네 친구에 의해 침상채로 메워져서 예수님께 왔던 중풍병자와 상황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막 2). 아무도 그를 눈여겨 보거나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도리어 바뀐 세상에서 숨을 수 있는대로 숨어 사는 것이 지혜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다고 두번이나 반복됩니다(4,5). 여기 로드발이라는 것은 지명인데, 그 뜻은 ‘목초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지명 역시 매우 상징적입니다. 므비보셋이 사는 세상은 목초지가 없는 광야 즉 평안이 없는 세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의 육신 뿐 아니라 정신의 상태가 건강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가 사는 환경 역시 평안이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헤세드는 어떻게 찾아왔습니까? 그가 헤세드를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까? 어느날 그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았습니다. 왜 찾았다는 것입니까? 언약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기억했기에, 그 언약에 따라서 므비보셋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아무 조건도 없이 그 언약 때문에 헤세드를 받는 대상이 된 것입니다. 다윗 왕 앞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러져 있는 므비보셋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은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일 뿐입니다. 그는 왕 앞에서 실로 죽은 개와 같은 존재라고 자신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름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사람, 그 스스로가 말하듯이 죽은 개 같은 신세인 므비보셋을 이름으로 불러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을 표현합니다. 주님께서는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3).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냥 회중 속에 묻혀있는 일개인으로 다루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들 각자의 이름을 불러서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대주재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온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께서 우리를 이름을 불러 대해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믿겨지지 않는 그리고 황송한 은혜입니까? 다윗은 또 요나단과의 언약 안에서 주어진 모든 축복을 그에게 베푸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약속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그 눈 앞에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이런 저런 요구 조건을 제시하면서 거기에 부응하면 잃어버린 신분과 기업을 회복시켜주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날 저녁부터 왕의 식탁에서 다른 왕자들과 함께 밥을 먹게 된 것이고, 이 순간부터 다윗왕이 회복시켜준 할아버지 사울이 소유했던 기업을 다시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므비보셋은 더 이상 목초지도 없는 땅 로드발에 거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헤세드는 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 조건 없이, 오직 언약에 기초하여 죽은 개 같은 존재들, 아무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리는 구원의 은혜인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이제 항상 다윗의 상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누리는 삶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것이 신자의 특권인 것입니다. 복음은 이처럼 무가치한 존재에게 주어진 조건없는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므비보셋처럼, 내가 누구길래 죽은 개 같은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까 라고 말한 적이 있으십니까?

B. 부르심: 하나님의 헤세드를 베푸는 삶
이제 문제는 이런 헤세드,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아 누리는 사람이 어떻게 합당한 반응을 하면서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말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고 반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거저 주시는 조건 없는 은혜를 경험한 신자는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의 그 은혜를 베풀고 드러내고 행하는 삶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헤세드를 드러냄으로써 그는 자기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이런 삶에 부응하여 살아가십니까? 이사야 32:8은 “고명한 자는 고명한 일을 도모하나니 그는 항상 고명한 일에 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고명하다는 말은 ‘훌륭한, 고결한’ 혹은 ‘아량있는, 관대한’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고결하고 훌륭한 사람은 너그럽고 관대한 사람입니다. 바로 다윗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드러냄으로써 보여주는 것이 이런 태도입니다. 사람이 그냥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한 사람만이 이렇게 하나님의 헤세드를 드러냅니다. 이것이 모든 신자의 부르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전하면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이런 부르심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집니다. 저물어 가는 금년 한 해를 돌아볼 때 부끄러운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희로 그 헤세드를 더욱 알게 하시고 느끼고 누리게 하사, 그 하나님의 헤세드를 풍성하게 드러내는 복을 부어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