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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14).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

사무엘하 6:6-15, 역대상 15:1-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12-12

말씀내용
1. 하나님을 조심하십시오(6~9).
어떤 성경학자는 오늘 본문을 들어 “하나님을 조심하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조심해야 할 분으로 기억하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또 이것은 설교자들에게 불편한 본문이 되어왔습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못 믿을 분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피해가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도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저의 확신은 이 사건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은 참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은 모든 자들에게 선포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럼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의미와 의도가 무엇일까요?

A. 분위기를 깨시는 하나님(6~7)
다윗은 오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언약궤를 가지고 오기 위해서 전국에서 3만 명을 뽑았고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으로 언약궤가 돌아오는 큰 행렬을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혀서 백성들과 함께 행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고가 터졌습니다. 나곤의 타작 마당에 언약궤를 실은 수레가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는 바람에 수레가 흔들렸고 언약궤가 넘어질 것을 우려한 웃사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언약궤를 붙들었는데 그만 즉사하고 만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웃사의 잘못함에 대하여 진노하셨다고 쓰고 있습니다. 3만 명의 거대한 행렬의 감격과 기쁨은 졸지에 이 사고로 인하여 찬 물을 끼얹은듯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분위기를 깨신 것입니다.

B. 다윗, 시험에 들다!(8~9)
다윗은 분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말하자면 시험에 든 것입니다. 3만 명이나 뽑아서 거대한 준비를 했고 이제 그 일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분위기를 깨신 것이 정말 분했을 것입니다. 지도자의 위신이 추락한다고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순수한 마음이었습니다. 무슨 깨끗하지 못한 생각으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도 다 한 마음으로 기뻐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분위기를 깨시는 것입니까?

C. 이런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정말 앞서 말한 성경학자의 지적이 옳습니다. 하나님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저 육신의 생명만 죽는게 문제가 아닙니다. 영혼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조심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은 불신자들이 알면 위험한 본문인 것 같습니다. 다윗이 말한 것처럼 누구라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여호와의 궤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하나님이라면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다윗의 마음에 임했습니다. 이 난관을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어떻게 수습을 하시려고 말입니다.

2. 문제 풀이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푸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다 시험에 들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A. 죽은 종교의 위험성: 예배와 섬김에 경외함이 없다.
이 사건은 무엇보다 죽은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죽은 종교란 죄를 죄로 알지 못하는, 말하자면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무감각한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사람이 직접 손을 대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심으로써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민 4:15,19). 죄의식이 없는 것이 죽은 것입니다. 죽은 시체는 그 위에 바위를 올려놓아도 그 무게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죽은 종교는 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만져도 괜찮다’는 인식이 팽배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지면 죽는다’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만져도 괜찮다’고 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먹어도 괜찮다’고 여겼던 아담과 하와와 같이 말입니다. 죄는 언제나 이런 식입니다. 성경은 오늘도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죽고 심판을 받아 지옥의 영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여기서 사람들이란, 바로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주일 여러분에게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의 영원한 생사를 가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은 종교입니다. 죽은 종교는 언제나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향하여 분노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없는 형식, 위선, 거짓이 죽은 종교의 특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죽은 종교를 가지고 사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실상 죽은 종교의 예배와 섬김에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경외함,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의 감정이 없습니다. 좋은 뜻으로 할 수 있고, 열심을 낼 수도 있으며, 즐겁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없습니다. 예배와 섬김 모두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웃사 사건을 통해서 이것을 다루신 것입니다. 경외감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없다면 하나님은 이 예배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진노하신다는 사실을 저는 말씀드려야만 합니다. 죽은 종교를 가지고 사는 자는 결국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라(민 4:15,19).
웃사 사건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막과 기구들을 지을 때 이미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민 4:15,19). 그 말씀에 의하면 언약궤는 수레에 실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덮개로 잘 덮어 보이지 않게 하고 채로 껴서 레위 지파 중 고핫 자손이 메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처음 대제사장인 아론의 네 아들 중 장자와 차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법을 상세하게 지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가지고 들어가 분향함으로 또한 즉사하였습니다(레 10:1~2). 하나님의 명령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동기만 순수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법에서도 아무리 동기가 선하다고 할지라도 실정법을 어겼으면 정상참작이 될 수 있을지언정 죄의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우리는 세상 법만도 못하게 생각하면서 섬기기가 쉽습니다. 동기의 순수함이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 다 씌어져 있습니다. 다윗 시대만 해도 그 시대가 얼마나 말씀에 대해 무지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웃사의 사건입니다. 우리 시대가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C. 의논해서 (효과적으로) 할 일인가(대상 13:1), 말씀대로 순종할 일인가?
다윗은 이 일을 행함에 있어서 말씀을 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음만 앞섰고 들떠있었지 실상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한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를 가져오는 일을 위해서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장수로 더불어 의논”했다고 했는데(대상 13:1) 이 일은 의논해서 효과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때로 교회를 섬길 때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논을 해보니, 말씀에 대해서 무지한 천부장, 백부장들은 과거에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벧세메스로 돌려보낼 때 새 수레에 실어서 보낸 것을 생각했고 그것을 말했을 것이고 그것이 모두에게 좋게 들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의 문제입니다. 효율과 효과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대로, 말씀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D.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섬기시는가?
웃사 사건에서 하나 더 생각할 점은 근본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섬기시는 것인가 하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그랬습니다. 출애굽에서도 그랬습니다. 십자가에서도 그랬습니다. 역사의 종말에도 그렇다는 것을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웃사 사건의 본문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웃사는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 내가 하나님을 받들어드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내 힘으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한다는 생각을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때로는 무너져가는 교회를 내가 받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생각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대로 너희 영혼을 위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요구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섬겨주시는 것입니다.

3. 시험에서 벗어나는 다윗
A. (하나님 편에서)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시 보여주신다(10~12).
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됩니까? 다윗은 마음이 상해서 언약궤 가져오는 행사를 중단시켰고 언약궤는 근처의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안치되었습니다. 모두가 다 두려워하는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들어온다고 했을 때 오벧에돔은 그것을 환영할 수 있었을까요? 오벧에돔은 여기서 매우 수동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적극적으로 환영을 했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결국 그의 집에 언약궤가 들어가 있는 3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다는 말씀을 볼 때 그는 이 위험한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었을 때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 편에서 해주시는 일로 우리는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을 축복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뭇 백성들로부터 나쁘고 까다로운 하나님이라는 오해를 사기 위해서 웃사 사건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신 분이며 인애와 자비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결코 훼손될 수 없습니다. 다윗과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다윗은 하나님은 오해했습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어떤 좋지 않은 일을 당하고 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여전히 다윗과 백성들을 향하여 보여주십니다. 오벧에돔의 온 집에 복을 베푸심으로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해를 푸시기 위해서 하시는 일이 있으십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드러내주십니다.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B. (사람 편에서)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복종하라(대상 15:2,13~15).
그러나 단지 이것만으로 다윗의 마음이 풀린 것은 아닙니다. 시험을 벗어나기 위해서 사람 편에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면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했습니다. 그냥 감정에 묻어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그는 생각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역대상 15장은 그것을 잘 설명해줍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소가 모는 수레에 실을 수 없다는 사실과 레위인 중 고핫 자손이 채에 꿰어서 메고 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만지는 자는 죽는다고 말씀하셨고 웃사에게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대상 15:13).” 다윗은 그 말씀을 깨닫고 순종합니다. 오벧에돔의 집이 언약궤로 말미암아 복을 받음을 들어서 안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시 확인하고 언약궤를 메어오려고 합니다. 첫번째에 조금도 손색없이 성대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을 준비시킨 다윗은 다시 언약궤를 메어오게 됩니다. 여러분, 시험에 들 때 어떻게 이겨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 편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여정
우리도 살다보면,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이렇게 다윗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이 언짢아지는 일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했는데,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기는커녕 도리어 이해할 수 없는 사고나 사건으로 나를 맞이하게 하시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틀리셨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그는 말씀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되고 다시 그 말씀 속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A. 하나님을 더 알아왔는가?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열망이 있는가?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더 알아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웃사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떠나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지식을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웃사 사건 같은 화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배웠는가입니다. 다윗도 화가 났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그는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아가는 사람이었는가를 그가 남긴 수많은 시편이 증거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고, 점점 더 알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일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B. 참된 예배는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에 달려있다.
이런 지식,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예배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에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웃사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긴 죄입니다. 웃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이렇게 대해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이 팽배한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없이 참된 예배는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살아갈 때, 여러분은 점점 더 좋은 예배자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 열망은 모든 믿는 자의 심령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열망이 불타오르게 하십시오. 나의 하나님, 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열망, 그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가는 삶의 여정을 걸어가고 싶은 열망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해지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