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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13) . 주님을 사모했던 사람

역대상 13: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12-05

말씀내용
다윗이라는 인물을 살펴볼수록 제 마음에 점점 더 깊이 새겨지는 그의 인상은 하나님을 몹시도 사모했던 사람, 하나님을 너무나 원했던 사람,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했던 사람, 자기의 삶의 형편보다 하나님의 존영과 위엄을 더 크게 생각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시편이 구구절절이 그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이 그렇습니다.

1.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의 긴 여정
오늘 읽은 본문은 다윗이 블레셋 시글락에 피신했던 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때입니다. 시글락에서 잃었던 처자식들을 아말렉으로부터 찾아오던 바로 그 때,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길보아 산에서 사울은 자기의 세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는 슬픈 노래로 사울과 요나단을 기억합니다. 활의 노래로 알려진 이 애가는 사무엘하 1장(19~2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사울의 죽음을 이렇게 슬퍼했다는 것은 이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잘 지키고 왔는가를 보여줍니다. 여느 사람 같으면 사울의 죽음은 기쁜 소식일 뿐 아니라, 자기가 왕위에 오르는 기회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놀라울 정도로 이 상황 속에서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합니다. 조금도 그는 서두르거나 왕이 되기 위해서 애를 쓰지 않습니다. 무려 7년 6개월이 더 지나서야 그는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이 사이의 기간에 사울의 군장이었던 아브넬은 사울의 남은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고 나라를 내전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다윗은 그저 유다 지경에 속한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으로 7년 반을 지내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 그의 나이 십대였다고 한다면 다윗은 이제 서른이 되어 유다 지파의 왕이 되기까지 쫓김을 당하였고, 이로부터도 7년 반이나 기다려 나이 서른 일곱이 넘어서야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니, 다윗은 거의 20년 이상의 시간을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다윗의 삶처럼 기다림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주권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삶은 없을 것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그는 제일 먼저 나라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에도 베냐민 지파나 유다 지파가 점령하지 못하고 그곳에 살던 여부스 족속은 이스라엘 땅에 남아있었다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 도성이 얼마나 난공불락의 도성이었든지, 높은 산 언덕 위에 세워져 있어서 공격하여 점령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예루살렘만큼은 여전히 여부스 사람들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다윗이 이 도성을 점령하고 그곳을 다윗성, 시온이라고 이름하고 그곳을 왕도로 정하였습니다. 이제 드디어 다윗의 인생에 안정이라는 것이 찾아왔습니다. 사람이 고생할 때와 고생이 끝나고 평안한 시절을 맞을 때가 다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윗의 마음이 변했다고 읽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의 왕이신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가 안정된 삶에 이르렀을 때 그 마음에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였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2. 언약궤: 복음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구약의 상징
언약궤는 높이가 약 60 cm, 폭이 약 60 cm 그리고 길이가 약 120 cm 정도 되는 궤였습니다. 이 언약궤는 모세가 지은 성막의 가장 중심인 지성소 안에 두어졌습니다. 그 안에는 세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십계명 두 돌판이었고, 둘째는 하나님의 인도를 상징하는 아론의 지팡이, 그리고 세번째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상징하는 만나가 들어있는 항아리였습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백성의 언약을 상징하는 십계명 돌판이었고, 그래서 이 궤는 언약궤 혹은 법궤라고 불리워졌습니다. 언약궤의 덮개는 시은소 혹은 속죄소라고 불리웠습니다. 1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은 이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반드시 속죄일에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고 그 피를 바로 이 언약궤의 덮개인 시은소 혹은 속죄소에 뿌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이스라엘은 그 안에 있는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에서 속죄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속죄일의 제사 절차를 통해서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될 언약을 덮고 있는 시은소에 뿌려질 때,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그리스도의 피에 다 부어지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를 입게 된다는 복음의 내용을 보여주는 구약의 그림입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를 얻게 할 뿐 아니라, 저주 대신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하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뿌림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언약궤와 속죄일의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이 언약궤의 덮개를 시은소, 은혜를 베푸는 자리 또는 시은좌라고 하여 은혜를 베푸는 보좌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는 이 언약궤 덮개인 시은소에 연결되어 두 개의 그룹이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은좌는 하나님의 보좌이기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두루 지키는 천사인 그룹 둘을 그 위에 만들어 세우라고 모세에게 지시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임재는 결코 사람들에게 쉽게 이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오직 경외와 예배의 대상이실 뿐입니다.

3. 오용된 언약궤는 오늘날의 타락한 기독교회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언약궤를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을 힘입는 도구로 사용하고 싶어했습니다. 언약궤는 결코 어떤 특별한 능력을 그 자체로서 발휘하게 해주는 마술적 도구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였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이 언약궤를 두려워했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언약궤가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서 보여준 역할 때문에 이스라엘은 종종 언약궤를 오용하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을 가장 앞에서 인도한 것은 언약궤였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갔을 때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에도 백성들의 앞서 행한 것은 바로 언약궤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기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잊어버릴 때마다 언약궤를 엉뚱한 능력의 출처 정도로 생각하고 그렇게 이용하고 싶은 유혹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식이 점점 사라져가게 되면 기독교는 그저 인생을 살아가는 어떤 능력의 출처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심, 아니, 하나님의 인격성을 알고 그분 자신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교회는 언제나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결여하게 될 때,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에서 성장하고 있지 않을 때, 그에게 기독교는, 하나님은 그저 자기의 삶을 이롭게 하는 어떤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나 그 사람의 기도의 모든 초점은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그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4. 언약궤의 궤적: 사람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
언약궤가 어떻게 오용되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언약궤가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에어떻게 옮겨지게 되었는지 그 궤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언약궤는 처음 가나안에 들어올 때, 길갈에서 벧엘로 그리고 실로로 옮겨져 사사시대에는 실로에 있는 모세의 성막 안에 계속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엘리 제사장 때에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면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 전투를 하면 이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가지고 나갔다가 에벤에셀 전투에서 크게 지고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이 전투에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함께 죽었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까지도 당일에 다 죽게 됩니다. 그리고 언약궤는 무려 7개월 간이나 블레셋의 수중에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빼앗은 것을 좋아하였지만, 다곤 신전에 놓여진 언약궤로 인하여 이유없이 그들의 신상이 깨어지고 무너지는 것을 본 후에 자기들의 도성들로 이리 저리 옮겨보지만 가는 곳마다 독종이 발하고 점점 더 심한 재앙이 임하자 결국은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자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 벧세메스로 보냈고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 안을 들여다본고로 70명이나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벧세메스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으로 보내게 되고, 기럇여아림에서 언약궤는 아비나답이란 사람의 집에 보관되게 됩니다. 이렇게 사무엘 시대까지 20년이나 언약궤가 이렇게 방치되어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삼상 7:2). 사무엘의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의 마음 속에 이 언약궤에 대한 마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한 구절, 사무엘상 14:18에 보면 사울이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다가 급히 하나님께 물어야 할 일이 있자 그가 언약궤를 가지고 오라는 말을 하였던 실용적 이유 외에 언약궤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가지고 오려고 하기까지 언약궤는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계속 있었습니다. 거의 50년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아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잊혀진 것이 되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왜 그렇죠? 왜 이렇게 되었지요?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언약궤가 그들이 바랬던 마술적 능력의 도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에 나가면 이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들어오면 좋은 일이 생겨야 하는데 벧세메스에서는 70명이 그것을 들여다봤다고 죽고 말았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의 말처럼 누가 그 언약궤를 원하겠습니까?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아무 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아무 유용함이 없는 그대신 두려움만 던져주는 그런 언약궤를 누가 원하겠습니까?(삼상 6:20) 그들은 실상 언약궤를 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을 달라고 요청을 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원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 왕을 달라고 사무엘에게 요구한 것은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더 편리하고 반응을 할 줄 아는 인간 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결국, 인간 왕 사울이 세워졌고 언약궤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에서 잊혀진 채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 언약궤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다윗은 그 언약궤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예루살렘에 도읍을 정하자 제일 먼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일을 행하였다는 것은 그의 마음 속을 그 동안에도 채우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언약궤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5. “나는 언약궤가 아니라 주님을 사모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은 모든 용사들과 장수들을 다 불러모으고 의논을 합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자고 그는 제안합니다. 왜 다윗은 언약궤를 가지고 오기를 원했을까요? 오늘 읽은 본문에서 그가 보여주는 동기는 단순합니다.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3).” 다윗의 말은 장수들과 신하들에게 다 좋게 여겨졌고 그들은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습니다. 여기에 비록 매우 단순하게 다윗이 언약궤를 기억했고 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기를 원했던 동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마는, 사실 다윗의 동기는 훨씬 더 깊은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남긴 수많은 시편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읽게 됩니다. 단순하게 하나님께 국가의 중대사 또는 전쟁에 관한 일들을 묻기 위한 실용적인 용도로 다윗이 언약궤를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 중심에 있던 생각, 그의 평생 특별히 왕으로서 살아가는 시절에 그의 마음에 지배적이었던 생각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셨으며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당신의 나라를 높이셨다는 생각이었습니다(삼하 5:12; 대상 14:2). 그는 많은 시에서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비록 자신이 왕이었지만, 자신은 왕중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세운 종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러니 비록 예루살렘이 왕이 거하는 왕도요, 다윗성이라고 일컬어지지만 이 나라는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며 예루살렘은 그 왕이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거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임재의 상징으로 주신 것이 바로 언약궤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언약궤를 당연히 예루살렘에 모셔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나라는 없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정치의 중심이기에 앞서 참되고 유일하신 왕이신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언약궤는 정치적 혹 군사적 이용가치가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언약궤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것은 복음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신약적 개념으로 보자면 바로 십자가의 은혜였습니다.

언약궤에 대한 다윗의 마음이 가장 잘 나타나있는 시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132편입니다. 이 시는 다윗 자신이 쓴 시는 아닙니다. 아마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를 마친 후에 지어진 시편이 아닌가 싶습니다. 솔로몬이 완성된 성전의 지성소 안에 언약궤를 안치하게 될 때 불렀던 노래일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윗이 언약궤를 그리고 성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다윗의 마음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맹세하고 서원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2). “여호와의 처소를 발견하기까지는 내가 내 장막에 들어가 침상에 올라 편하게 자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3~5). 하나님이 거하실 곳, 즉 언약궤를 둘 장소를 찾기 까지는 자기가 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20여년이나 기다려서 왕이 되었습니다. 정말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 하고서야 이제 비로소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대한 부담이었습니다. 모두에게 버림을 받았고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진 언약궤를 그는 찾아야 했고 그리고 그 자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부담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모든 근심한 것’이었습니다(1). 다윗의 마음은 언약궤, 하나님을 위한 마음 때문에 편치 않았습니다. 결국 다윗은 예루살렘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면서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실 곳이라고 생각했고 드디어 잊혀진 언약궤를 찾아오겠다고 한 것입니다. 왜 그런 마음을 가진 것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했습니다(7). 하나님, 자기의 왕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을 높이고 싶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평생 예배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고자 했던 다윗의 마음 중심이었습니다.

6. 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든 사람인가?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당신의 마음에 든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본 그대로입니다.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그는 오랜 고통의 세월을 기다려 드디어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꿀맛 같은 평안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평안이 찾아오자, 다윗은 그동안 마음은 있었지만 할 수 없었던 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아니, 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곁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이제 그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할만한 여유가 있습니다. 이제 그는 그 마음에 두었던 생각을 실행에 옮깁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의 왕, 이 나라의 왕이 되시고 그렇게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이용가치가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왕이셨습니다. 자기가 숫한 고생과 역경을 거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언제나 왕이셨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에도 그 하나님은 여전히 다윗에게는 왕이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에게 기도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 다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비상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비상전화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특권이었고, 기도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당대의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고 할지라도 다윗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언약궤는 언제나 부담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고 그에게 안정과 능력을 허락해주셨을 때, 그는 마음에 있던 일을 행하였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고작 12km 떨어진 기럇여아림에 있는 조그만 상자인 언약궤를 모셔오기 위해서 몇 명을 동원했는지 보십시오. 사무엘하 6:1은 그가 3만명을 뽑았다고 했습니다. 그냥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니라, 3만명이나 되는 사람을 고르고 골라서 뽑았습니다. 하나님, 그 마음에 사모하는 하나님을 모셔오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다윗의 모습이고 그의 마음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의 성공과 실패 여부는 우리가 왕이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사느냐 살지 못하느냐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의 성패를 가늠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든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모하십니까? 여러분의 지금 상황이 고난과 역경의 연속일지 모르겠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는 이미 안정과 평안을 누릴만한 상황 가운데 계신 분도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모하십니까? 주님을 예배하고 싶고 주님과 함께 살고 싶고, 주님을 높이고 싶고, 주님의 이름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소원입니까? 여기에 인생 성패의 열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복된 은총을 더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