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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12). 브솔시내의 교훈: 은혜가 다스리는 교회

사무엘상 30:7-3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11-28

말씀내용
블레셋 시글락에서 보낸 1년 4개월의 시간은 하나님의 낯선 은혜가 아니었더면 얼마나 더 지속되었을런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결코 자기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고,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안정된 삶,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양심이 편안할 수만은 없는 시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종 이런 시간들이 우리 인생에 있다는 것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그때 하나님은 낯선 은혜, 은혜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은혜로 자기 자녀를 건져내십니다. 처자들이 다 붙잡혀가고 남은 자리에서 울다 울다 지친 다윗의 백성들, 다윗의 군사들은 다윗에게 그 책임을 돌리면서 돌로 치자는 이야기까지 오갈 정도가 되었다고 성경은 묘사했습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의 낯선 은혜를 깨닫고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서 적의감을 드러내고 있는 자들에게 일어나 적들을 추격하여 처자들을 도로 찾자고 격려합니다. 이미 아벡의 전투 현장에서 돌아와 지칠대로 지친 군사 600명을 이끌고 다시 다윗은 막연한 광야의 추적을 시작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 중 200명은 브솔 시내에 이르렀을 때, 지쳐서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200명을 남겨두고 400명을 데리고 추격을 계속합니다. 이스라엘 남방 광야의 지리적 상황을 잘 아는 학자들은 말하기를, 이 추적이 얼마나 가능성이 희박한 추적인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도무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를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섭리: 삶 속에 스며있는 하나님의 은혜
A. 애굽 소년을 만남(11)
그러던 중 광야에서 다윗의 군대는 죽어가게 된 애굽 소년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를 발견하고는 떡과 물, 그리고 많은 소중한 식량을 나누어주어 살렸습니다. 사흘 밤 낮을 그가 먹지 못한 상태였다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애굽 소년으로서 아말렉 사람의 종이다가 사흘 전 병이 들어 광야에서 버림을 받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전 행적까지를 밝힙니다. 바로 이 소년이 속해 있던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침략하고 처자들을 데리고 간 장본인들이었습니다. 막막한 광야에서 하나님은 아말렉 사람들의 종 하나를 병들게 하여 이 광야에서 버림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낯선 은혜만이 아니라, 이렇게 주도면밀하시고 살펴주시는, 삶 속에 스며있는 은혜가 또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무리는 이 죽어가는 소년에게 선을 베풂으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얻게 됩니다.

B. 하나도 잃은 것이 없이 다 찾음(19)
결국 이야기는 소년의 도움을 얻어 아말렉을 추격했고, 아무런 방비도 없이 한참 승리의 축제를 벌이고 있던 아말렉을 쉽게 쳐서 이기고 처자들을 다 찾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 찾았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기적인지 모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한 사람도 잃지 않았고 심지어 잃어버린 물질 까지도 다 찾아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윗은 아말렉을 치고 그들의 소떼와 양떼 등 수많은 전리품까지 얻었습니다.

2. 승리의 찬가(20)
이 승리는 다윗의 군사들의 마음을 다시 180도 바꾸어놓았습니다. 20절에 보면, 이들은 전리품으로 얻은 양떼와 소떼를 몰고 가면서 말합니다.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이런 이야기를 보면 마음은 씁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정한 마음으로 가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백성들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돌로 칠 생각까지 하지만, 다시 승리와 함께 잃은 처자들을 되찾자 그들은 다시 다윗을 칭송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가벼운 행동이요, 언사입니까? 오히려 가만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은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이렇게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3. 은혜의 위기
이제 모든 위기가 다 지나간 것일까요? 아니지요, 교회의 삶 속에 다 지나간 위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귀를 하나님께서 불못에 던져 넣기까지는 결코 교회는 영구적인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큰 기쁨으로 노래부르면서 다윗을 칭송하면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 은혜가 다시 깨어질 위기는 브솔 시내에 다다랐을 때 찾아왔습니다. 브솔 시내에서는 어떻게 될지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200명의 지친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승리하고 모든 처자들을 찾아오는 동료 병사들의 노래 소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그들 앞에 몰고 오는 커다란 양떼와 소떼를 보았을 때, 얼마나 놀라고 기뻐했겠습니까? 그들은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잃었던 처자들을 안고 기뻐하고 또 자기들을 대신해서 싸워준 병사들에게 수고했노라고 감사를 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기 시작합니다.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병사들 가운데 몇 사람이 “이들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았으므로 전리품은 나누지 말고 처자들만 돌려주자”고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이들을 성경은 ‘악한 자와 비류들’이라고 말합니다. 불량한 사람들, 불평하는 사람들,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다윗을 돌로 치자고 까지 한 사람들이기에 이런 반응이 우리를 새삼 놀라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들이 대다수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 몇이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말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만일 영향력을 재보고 싶다면, 이렇게 부정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역행하는 말 몇 마디를 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력을 가지는지를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교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미 이런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아왔습니다. 이들의 말이 왜 이렇게 힘이 있는가 하면 첫째는 이들의 말이 일면 옳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수고한 만큼 얻으라는 원리를 그들은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평의 원리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성경은 매우 예리하고도 단호하게 그런 식의 공평의 원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지배하는 가치나 원리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서 교회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하고 시의성이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A. 관점: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22) vs.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23)
여기서 대립되는 두 개의 관점이 있습니다. 이 불평불만을 하는 자들의 관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전쟁을 해서 얻은 이 전리품은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이다라는 관점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우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때로 이것은 ‘내가 수고해서 얻은 것’이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좋게 말해서 공평의 원리였고 자신들이 이 전리품을 나누어가지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제기가 다윗의 공동체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자 다윗은 그것은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불평하고 이기적 욕심을 드러내는 자들에게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고 다윗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것은 ‘다윗이 탈취한 것’이라고 말했던 이들이 이렇게 얼굴 색을 바꾸어가면서 자기 주장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들 몇몇 사람들의 말을 누가 과연 듣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다윗이 주장한 것은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몫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몫이 같으므로 똑같이 분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B. 사랑의 대상: 돈(물질) vs. 사람
이런 일들은 종종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 문제의 실상을 좀 더 분석하고 깊이있게 본다면 이것이 결국은 돈(물질)이냐 하나님이냐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돈을 사랑할 것이냐, 사람을 사랑할 것이냐 하는 우리의 사랑의 대상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공평의 원리를 주장하면서 불평을 하던 자들의 중심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 보다 돈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돈, 사람 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것은 위험한 죄입니다. 관계가 깨어지더라도, 중요한 것은 내가 내 몫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정신은 세상의 정신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무관하며, 하나님의 교회의 원리와는 더욱 무관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예리하게 지적하는지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마지막 주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하여 삼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가 말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 얼마나 합당해보이고 그럴듯한 말입니까? 여기에 누가 논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가룟 유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예리하고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요 12:6).” 완전히 허를 찌르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유다는 돈을 사랑한 사람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문제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으로 다시 소개됩니다. 왜 성령님께서는 성경에 이런 사건들을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오고 오는 모든 시대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경고를 이토록 무섭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가룟 유다도 스스로 목매어 죽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악한 자와 비류들의 중심에는 하나님보다 돈, 사람보다 돈이라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최첨단의 자본주의국가인 미국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이 유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성경의 경고를 우리는 두려움으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이들의 중심을 보았고 단호하게 원칙을 세워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원칙은 공평의 원리가 아니라 은혜의 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도 다스리는 원리는 오직 은혜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찌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24).” 이후 이 원리는 다윗 왕국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이 뿐 아니라, 다윗은 이 전리품을 여러 지역에 있는 유다의 장로들에게까지 보내어 나누게 합니다.

4. 교훈
우리는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들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적용해야 하는 매우 실제적인 원리들이고, 특별히 공동체인 교회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원리들입니다.

A. 공평이 아니라 오직 은혜다.
먼저, 교회를 지배하는 원리는 공평이 아니라 오직 은혜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깍이고 순응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는 원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경험을 가지고 조직을 운영해본 사람이라고 해도 이 원리를 깨닫기 전에는 절대로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세상의 원리로 운영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독특하고 세상과는 정반대되는 원리로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여기서는 공평이 아니라 은혜가 지배합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시사하는 말씀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군대는 짬밥이 우선이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교회에서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자신이 어떤 대우를 받아야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만일 내가 교회에서 적어도 이만한 대우는 받아야 한다고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생각하시게 된다면 그 결과는 여러분의 마음 안에 불평과 원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나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로 이 교회의 일원이 된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여기신다면, 여러분은 좀체 불평과 원망의 시험에 넘어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거기에는 은혜가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기부금을 내고 들어오는 조직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써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입되는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B. 감사치 않는 인색한 마음은 공동체를 깨뜨린다.
두번째 교훈은 바로 이 첫번째 교훈에서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감사치 않는 마음,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은 반드시 인색함으로 이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인색함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지 못하고 공동체를 깨뜨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워지는 토대는 오직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C. 관대한 나눔은 공동체를 풍성하게 한다.
반면에, 관대한 나눔은 공동체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다윗은 관대한 나눔을 자신의 왕국의 원칙으로, 하나의 정책기조로 설정을 한 셈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 다윗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게 되신다면, 여러분은 이 ‘관대한 나눔’이란 것이 단지 그의 통치의 기조일 뿐 아니라 다윗이라는 사람의 삶의 정신이었음을 보실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그는 그것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다윗이 통치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그것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5.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대상 12)
저는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하나님의 솜씨를 보게 됩니다. 다윗의 군인들은 다 충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충성스럽기도 했지만, 또 어떤 위기의 순간에는 태도가 돌변하기도 하는 인간들이었을 뿐입니다. 또 그들 중에는 정말 자기 본색을 숨기며 불평을 하는 악한 비류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피난살이를 하는 다윗의 군대의 실상이었습니다. 역대상 12장은 다윗이 블레셋 시글락에 있을 때 다윗에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멀리 요단 강 건너에서 온 갓 지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의 얼굴이 사자와 같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그 용기를 칭찬합니다(대상 12:8). 사울과 같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서도 사람들이 다윗에게 나아왔습니다. 이들은 다른 자기 지파 사람들 대다수가 사울을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파와 지방색, 혈연을 단호하게 끊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기로 작정한 자들이었습니다(대상 12:29). 또 잇사갈 지파에서도 족장들이 200여명이나 다윗에게 나아왔는데, 이들은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대상 12:32). 그리고 스불론 지파에서 다윗에게 나아온 자들을 성경은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대상 12:33). 이들은 다윗이 시글락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보내준 많은 사람들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성경이 왜 이런 기록을 우리에게 남겨주는 것입니까? 수없이 많은 환난 그리고 아픔을 겪는 와중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가고 계셨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준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인간의 생각으로는 아무 일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다윗은 지금 블레셋 진영에 피신을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도대체 시간이 정지해버린 느낌이 드는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성경은 이 기간이 1년 4개월이었다고 밝혀줄 뿐 아니라, 이 기간이 결코 헛되게 지나가버린 시간이 아니라, 이런 산전수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군대, 당신의 교회를 만들어가고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전율할만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정지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우리 인생의 시간 속에서도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가고 계시다는 이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교회의 지난 4년간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물을 때, 하나님은 오늘 이 본문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같이 부족하고 흠이 많고 시험에 들기도 잘 하고 세상 영광에 취하기도 하며, 원망과 불평을 하는 우리 같은 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당신의 성품으로 만들어가시면서 당신의 교회를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우리는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6. 때가 차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는 하나님의 때가 차서, 다윗이 블레셋의 시글락을 떠날 날이 다가왔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낯선 은혜가 아니었다면 떠날 수 없는 시글락을 떠날 때가 온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교회도, 역사도 다 이 하나님의 때를 따라 가고 있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비록 지금은 시글락에 있을지라도 그리고 상황이 복잡하고 처절하게 꼬여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당신의 때에 우리를 떠나게 하실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보다 더 큰 소망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때가 차매 그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역시 때가 차매,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