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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11). 낯선 은혜

사무엘상 27:1~28: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11-14

말씀내용
성경은 우리에게 영웅담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영웅의 삶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대리만족을 할 여지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 인물들의 삶을 보면서 당혹감을 느끼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사람, 도대체 뭐야? 믿음이 있는거야, 없는거야?”라고 묻기도 합니다. 당연합니다. 성경은 이것이 인간이며, 이것이 신앙의 실재라고 가르쳐줍니다. 아무리 성경이 그렇게 가르쳐도 우리는 신앙을 오해하고, 실수 없이 내 힘과 노력으로 빈틈없는 경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유혹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그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신앙은 그런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너무 부담같지 마세요. “사람들이 나를 믿음이 대단한 줄 알거야”라고 착각하지도 마십시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 여길게 아닌가?”라는 두려움도 버리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이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신앙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1. 낙심(27:1): 낙심은 분별력을 흔든다.
사울을 두 번씩이나 살려주고,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는 다윗, 우리의 영웅이 오늘 보여주는 태도는 예상 밖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이러다가는 결국 사울의 손에 죽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살려면 다시 블레셋으로 가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27:1). 사울의 뉘우침이 영의 회개가 아닌 것을 아는 다윗은 그가 결코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정확하게는 몰라도 다윗의 도피생활은 10년 정도가 흐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600명이나 되는 군사들, 그리고 다윗은 두 아내를 거느리게 되었고 자식들도 낳았으니 그 삶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져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낙심은 영적 거인에게도 찾아옵니다. 영적 정상의 자리에 올라갔을 때에도 찾아옵니다. 다윗의 낙심은 그가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사울의 손을 보고 있다는 말로 드러납니다. 낙심은 다윗의 분별력을 흔들었습니다.

2. 거짓 평안의 유혹
결국 다윗은 블레셋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가드 왕 아기스가 이전에 다윗이 찾아갔던 그 동일인물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다윗의 이 태도와 결정에 대해서 매우 동정적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 결정에 대해서 뚜렷한 책망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뚜렷한 책망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 시기의 다윗을 다루시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이 결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결정일 수 없다는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번에는 아기스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하게 되고 왕도에서 멀리 떨어져있고 유다 남방 경계에 있는 시글락이란 도성을 얻어서 살게 됩니다. 여기서 다윗이 보낸 시간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특이합니다. 1년 4개월이었습니다(27:7).

이 기간에 다윗의 마음은 지난 10년의 어느 때보다 편안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더 이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피하자, 사울도 다윗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27:4). 이 기간, 다윗은 주변에 있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아말렉과 그술, 기르스 족속들을 치면서 살았습니다(27:8). 그리고 아기스 왕에게는 자신이 유다 사람들을 치고 있노라고 거짓말을 하고 전리품들을 갖다 바치는 생활을 했습니다(27:10). 그는 거짓말이 아기스에게 발각되면 자신의 편안한 삶이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신이 친 모든 성 사람들은 다 죽였습니다(27:11). 비록 이 와중에도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공격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리고 다윗의 처지와 상황을 생각할 때 그를 향한 동정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지만, 거짓과 두려움 위에 기초한 그의 삶의 평안함은 결코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이 살아갈 삶은 아니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성경을 우리가 주의깊게 읽을 때, 27:3은 조금 특이합니다. 다윗과 그 무리들이 블레셋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면 다윗의 두 아내인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이 당연히 함께 했을 것인데, 성경이 그것을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다윗이 나발 사건 이후에, 두 아내를 맞은 사건을 성경은 기록했습니다(25:43). 그리고 여기서 다시 그 두 아내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이야기, 다윗이 군사들을 이끌고 대 이스라엘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서 블레셋 군대와 함께 아벡에 간 사이에 아말렉은 시글락을 침략하고 남아있는 다윗과 군사들의 처자식들을 다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거기서도 다윗의 두 아내의 이름이 약간은 불필요하다 싶을만큼 다시 등장합니다(30:5). 아더 핑크는 이런 언급은 다윗이 여러 아내를 얻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것은 물론, 이제 그런 처자식들을 거느린 아버지로서 처자식과 함께 누리는 안정된 삶을 추구하게 된 다윗을 성경이 지적하고 있다고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결코 과도한 해석이 아닐 것입니다. 처자식, 내가 책임지는 가족들과 함께 누리는 안정된 삶을 바라보는 것을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합당한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고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목적과 사명은 분명히 이전에 내가 가졌던, 혹은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이 가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짓 평안은 언제나 우리를 유혹한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3. 은혜: 아기스에게서 건지시다(28:1~2; 29:1~10).
이런 거짓 평안의 삶 속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대전투가 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다윗을 신임하게 된 아기스 왕은 다윗을 앞장 세우려고 하고, 경호대장 자리를 약속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참아주시는 시간이 다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태도는 여전히 엉거주춤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거짓 평안을 떨쳐낼 것인가, 아니면 거짓 평안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 민족, 사울의 군대와 전쟁을 할 것인가 하는 갈등이 다윗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다윗이 살던 시글락에서 50마일 이상 떨어진 아벡에서 모든 블레셋 군대가 모여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데, 다윗이 거기까지 갔다는 것이 다윗의 주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은혜롭게 다윗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함께 모인 블레셋의 장수들은 하나같이 다윗이 이 싸움에 참가했다가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적으로 돌변할 것이라고 우려하여 아기스 왕을 설득합니다. 결국 아기스 왕은 자신에게 충성을 표한 다윗에게 몹시 미안해하며, 다윗을 시글락으로 돌려보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늘 이렇게 선히 우리의 위기를 해결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어쩌면 이 은혜는 예상된 은혜일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기에서 이렇게 건져주시는 것을 종종 보기 때문입니다. 참된 은혜요,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지적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이런 은혜를 경험하지만, 그가 자신의 거짓 평안을 누리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기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면서 그 50마일이나 되는 길을 가볍게 걸어서 그들의 집이 있는 시글락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4. 낯선 은혜(30:1~6)!
그런데 낯선 은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시글락에 가까워졌을 때, 다윗과 그의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피어오르는 연기였습니다. 시글락의 집들은 불타버렸고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시체도 없었습니다. 침략자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다 포로로 잡아간 것입니다. 이들의 심정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렸네” 하면서 그 고단하고도 먼 길을 한 걸음에 달려왔는데, 막상 그들을 기다린 것은 잿더미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처자식들의 생사 조차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이 원수의 손에 넘겨진 것입니다. 이때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30:4).” 이것은 각성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의 방패가 되지 못할 때 경험하게 되는 비참함을 깨닫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가르쳐주는 교훈이 여기 있습니다. 시글락을 침노했던 아말렉은 원수 마귀를 상징하는 족속이요, 군대입니다. 얼마나 교활하고 얼마나 정확하게 하나님의 백성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존재들입니까? 멀리 아벡까지 가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한다는 사실을 안 아말렉은 이 빈틈을 결코 놓치지 않고 들어온 것입니다. 다윗과 그 군대가 시글락을 비운 것은 불과 3일이었습니다(30:1). 일은 그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다윗은 아마 이때 경험하고 배운 교훈을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한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을 깨어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 다윗이 여기서 경험하게 된 것은 각성의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은 배우고 깨달아야 할 것은 충분히 배웠는가 하는 것은 아직 아닙니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당황스러운 곤란을 당할 때, 다윗처럼 그리고 그의 군사들처럼 울 기력이 없을만큼 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배웠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은 배울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각성을 촉구하십니다. 함께 울고 있다가 다윗의 군사들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린 자식들로 마음이 상한 이들이 다윗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돌로 치자는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어지지가 않는 일이지만, 성경의 정직한 기록입니다. 그들의 충성이 한 순간에 적대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다윗에 대한 그들의 충성은 지도자가 승리하고 있을 때까지만이었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언제나 우리가 사람 지도자를 보게 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지적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악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은 참 피할 수 없는 두려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윗의 각성을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체적으로 행하시는 일을 보면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하는 지경까지 이르자, 다윗은 크게 당황하고 엄청난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조금의 숨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말합니다. “(다윗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 30:6).” 다윗은 드디어 1년 4개월에 걸친 하나님의 방패가 없는 거짓 평안의 삶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됩니다. 이 고통과 당혹스러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의 메가폰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잠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정확하게 지금 다윗에게 일어난 일이 이것입니다. 다윗은 거짓 평안 속에서 자신을 속이는 삶, 자기 죄를 숨기는 삶이 형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죄를 자복하고 버리며 하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하시며 그에게 자비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30:7입니다. 그는 현대적으로말하자면 자신의 목사라고 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한 후에 하나님께 나아가 물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쫓아가면 잡을 수 있는지 묻자 하나님은 쫓아가라고, 잡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회복의 증거는 언제나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대한 복종으로 나타납니다. 다윗은 자기를 돌로 치려고 하던 군사들에게 일어나 담대하게 말하고, 그들은 고단한 몸을 일으켜 적들을 추격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낯선 은혜입니다. 다윗을 대 이스라엘 전투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은혜는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방식의 은혜일 것입니다. “하나님, 제발 저를 이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벗어나게 해주시는 경험을 우리는 많이 하며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그렇게 기대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선 은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지가 않은 것입니다. 아말렉이 시글락을 공격해서 다 불태우고 처자식들을 잡아간 일은 결코 은혜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야말로 다윗을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다윗을 거짓 평안의 삶 속에서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때로 고통과 비참함의 경험은 우리를 거짓 평안에서 인도해내시는 하나님의 낯선 은혜입니다. 이 참담한 비극 앞에서 울기만 하는 다윗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자 하나님은 그의 부하들의 충성을 적대감으로 바꾸시면서까지 그를 부르십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낯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낯선 은혜는 종종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더욱 흔들어대지만, 결국은 당신의 자녀들을 이기시는 은혜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감사요, 담대함이요, 믿음이요, 참 은혜입니다.

5. 교훈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함께 두 가지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A. 광야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라.
첫째는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자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에 피하여 살던 1년 4개월의 시간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참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빠지게 되는 오해가 있다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삶이 편안할 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행하시는 일과 행하실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내가 하나님 때문에 사울을 두번이나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기 보다, 하나님께서 이 광야에서도 나를 보호하시는 방패가 되신다는 은혜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시는 광야가 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 교회를 형성해가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백성들은 자기들이 누구인지를 뼈저리게 보게 됩니다. 그의 군대는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억울한 자들이었습니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유진 피터슨의 표현대로 교회는 소곤소곤대는 자, 불평하는 자, 변덕스런 자, 의심많은 자, 죄에 찌든 자, 따분한 도덕주의자, 세속주의자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질 때, 그들은 보게 됩니다. 그리고 희생적 겸손, 믿을 수 없는 용기, 영웅적 신앙의 미덕, 거룩한 찬양, 고난 중의 기쁨, 끊임없는 기도, 견디는 인내의 삶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여러분의 인생의 광야에서, 그리고 교회의 광야 시절을 통하여 행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삶도 아기스 왕 아래서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는 상황 아래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시는 것은 아닙니까? 다윗이 그랬습니다. 저는 그것이 옳고 잘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담대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지혜와 방법으로 다윗을 거기서 건져내셨듯이 건져내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가 그저 가족의 안위와 물질적 평안과 같은 것들이 되어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블레셋의 손에서 평안을 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결코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대로 여러분을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당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그 손길을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배우십시오. 그리고 제대로 반응하시기를 바랍니다.

B. 낯설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주목하셨으면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낯선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당할 때 피할 길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고전 10:13). 그러나 그 피할 길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상하고도 낯선 피할 길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채십시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설상 가상으로 어려움이 닥치는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낯선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비록 나에게는 낯선 방식으로 일하시고 계시지만, 그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은혜로 저와 여러분을 이기시는 분이시기에 여기에 우리의 삶의 담대함과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