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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10). 분별

사무엘상 26:1-2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11-07

말씀내용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살아갑니다.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대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는 삶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기준이 언제나 등장하게 되고, 그것에 따라서 선택하며 결정을 하며 살게 됩니다. 특히 신앙 생활에서 분별은 우리의 신앙이 죽고 사는 매우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분별력이다 라고까지 말하게 됩니다. 분별할 줄 아는 만큼이 그 사람의 신앙의 정도라는 말일 것입니다. 분별이 중요한 이유는 어떻게 분별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그런 분별의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부분을 보게 됩니다.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은 아비가일을 아내로 얻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윗 개인의 아픔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의 첫번째 아내요, 사울의 딸이었던 미갈과 헤어져서 도망자의 신세가 된지도 몇 해가 지났을 것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시간의 흐름을 기록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짐작만 할 뿐입니다. 그 합법적인 아내를 사울은 발디라는 사람의 아내로 주었습니다(25:44). 이것은 다윗에 대한 분명한 모욕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볼 때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몹시 상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와중에 십 사람들은 다시 또 사울에게 다윗이 있는 곳을 밀고하게 되고(26:1), 사울은 다시 삼천 명의 군사를 일으켜 다윗을 잡으러 왔습니다. 다윗은 정탐을 보내어 사울과 그 군대의 움직임을 파악한 후에, 밤이 되자 그들 진영으로 들어가 볼 생각을 합니다. 함께 가기로 자원한 아비새를 데리고 사울의 진영에 이르렀는데, 사울은 물론이거니와 왕을 지켜야 할 장수들과 군인들도 하나같이 다 깊은 잠에 들어있었습니다. 다윗과 아비새는 잠자는 사울 왕의 곁에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한참 다윗의 마음을 상할 대로 상하게 했던 사울 왕 그가 이번에는 누워 자고 있습니다.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난 번에 살려주었을 때는 소리높여 울면서 뉘우쳤었는데, 결국 이 인간이 그에게 돌려준 것은 더 큰 상처였습니다. 그 원수가 지금 눈 앞에 누워있습니다.

1. 분별1: 두번째 기회인가, 두번째 시험인가?(8~12)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다윗의 심정을 아는지, 아비새는 이렇게 다윗에게 속삭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나이다(8).” 이미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 사울을 향해서 가진 원칙을 아는지라, 아비새는 다윗이 직접 죽이지 않아도 자기 손으로 처리하겠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때가 분별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시는 두번째 기회입니까, 아니면 다시 한 번 주시는 시험입니까? 어떻게 분별해야 합니까? 기준이 있습니까?

A. 나는 무엇을 기대했는가?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다윗이 처음에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했을 때, 사울에게서 무엇을 기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때 분명히 사울은 많은 군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큰 소리로 울면서 말했습니다. 그는 뉘우쳤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그에게 기대할만한 것은 사울이 다시는 자기를 좇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될 것도 안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사울은 다윗의 아내인 미갈을 다른 남자에게 주었고, 다시 다윗을 잡으려고 삼천 군사를 데리고 나와있습니다. 분명히 다윗의 기대는 깨졌습니다. 사울은 악으로 선을 갚았습니다. 사울을 향해서 가진 비현실적인 기대가 큰 만큼 다윗은 이 두번째 기회 혹 두번째 시험을 이기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는 믿음은 비현실적인 기대가 아닙니다. 믿음은 그냥 사람을 잘 믿어주는 차원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믿음이 그럴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리고는 속고 또 속습니다. 성경은 그런 걸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믿음은 속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매우 현실적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믿음은 성경이 보여주고 설명하는 하나님에 대한 현실적 기대요, 거기에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오히려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는 쪽으로 가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기대했던 어떤 사람의 잘못된 행동으로부터 충격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때에도 믿음을 바르게 적용한다면 그 놀라움과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에게는 이런 지혜가 요구됩니다.

B. 말씀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 전부다(벧전 2:23; 잠 24:29; 롬 12:14,17,19~21).
이 상황 속에서도 다윗이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알고 확신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상황 속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무엇을 더 할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 이상 뭔가를 더 하려고 하는데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것이 마침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상황에서 다윗이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언제나 절대 권위를 가진 것은 나의 생각이나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원리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 원리가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9) 다윗은 아비새에게 “네 손으로 죽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어냐? 오히려 네가 죄를 짓는 것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다윗의 그 다음 말이 그것을 입증합니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10).”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처리하시리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다윗에게는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대로, 사울은 다윗이 믿은 것처럼 전장에서 죽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보여준 것을 분별하는 신앙의 자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이 두번째 기회이든, 세번째 기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적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지만’이나 ‘그러나’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면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기 부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부인을 거의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말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본 적이 없고 경험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 생각, 자기 고집, 자기 성질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깁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요. 성경이 12절에서 한 가지 해설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주신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은 결국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사울의 진에서 물러나왔습니다. 여러분, 다윗의 태도에 대해서 뭔가 답답하다고 느끼십니까? 사실은 그것이 육의 욕구입니다. 다윗이 보여주는 태도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태도인 것입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매순간 하나님의 권위를 철저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그 권위를 존중하여 선택하고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분별이 쉬워지는 것입니다.그래서 분별은 사실 순종의 문제인 것입니다.

2. 분별2: 원인이 하나님인가, 사람인가?(19)
두번째 분별은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이 모든 상황이 하나님께로부터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못된 몇몇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난 일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즉, 지금 내가 이렇게 쫓기고 있는 이런 비참한 상황이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추겨서 그렇게 하게 하시는 일인가, 아니면 그저 사울의 주변에 있는 간신배들이 부추겨서 이렇게 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다윗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19절에서 사울에게 말하는 내용입니다. “청컨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인자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날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두 가지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거기에는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것이 다윗의 태도입니다. 다윗이 자기 뜻에 맞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는 자기가 제물이 되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가져야 하는 한 가지 중요한 태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셨을 뿐 아니라 직접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셨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변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을 이렇게 쫓기게 하시고 죽게 하시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들이 악심으로 사울을 부추기는 것이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한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A. 하나님께서 악인의 소위를 허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선한 뜻이 있으시다.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상황 속에서 생각하고 분별해야 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이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하는 짓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자라면, 간단합니다. 그 뜻대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붙들고 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하실 뿐 아니라, 모든 악을 심판하시고 바로잡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것을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로 말미암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넓은 의미에서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것은 악인들의 소행이 맞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심으로 자기 자녀들의 괴로움을 더하게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서 이루실 유익한 뜻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분별은 우리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깊은 신뢰로 데리고 갑니다. 이것이 분별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하실 수가 있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어찌 영적인 일을 분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3. 분별3: 누구와 싸우는 것인가?(잠 25:28; 16:32)
그러나 여기서 끝나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 이렇게 말하는데 익숙합니다. “저 인간이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거야?” 싸움의 대상에 대한 분별입니다. 종종 우리가 인생을 낭비하고 엉뚱한 싸움에 우리 자신을 내어주게 되는 것은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할 때입니다. 지금 다윗이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태도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이 적어도 자기가 싸우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싸움 상대는 결코 사울이 아닙니다. 사울이 싸움의 상대였다면, 다윗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사울을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A. 싸움의 상대는 자신(육신)이고 세상(정신)이다.
싸움의 상대는 자신이고 세상입니다. 자신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육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본성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게 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결국은 나 자신 안에서 있는 육신이 아닌 누군가 한 사람을 지목하여 그를 비난하고 그로 말미암아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자기는 괜찮다고 말할 것입니다. 희생양을 찾는 것입니다. 다윗은 갈등도 없고, 육신의 소욕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성경이 쓰지 않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보겠지만, 그는 육신으로 말미암아 한 유부녀 그것도 자기의 부하 용사의 아내를 범하고 음모를 꾸며 그 남편을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와 똑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주어지는 절호의 기회들마다, 자신과 싸워야 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과 싸우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이런 상황 속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갑자기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육신은 ‘이 원수를 죽이라, 저 놈이 나쁜 놈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정신도 ‘용서하고 봐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당장 사울의 모습이 그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사실, 후에 하나님의 지혜를 얻었던 다윗의 아들이 잠언에서 여기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습니다. 잠언 25:28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그리고 잠언 16:32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다윗은 이 싸움, 내면의 싸움, 자기의 육신과 싸우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열지 않아도 성경은 일관성있게 이것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못 듣습니까? 성경은 못 듣는 것이 아니라 안 듣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도 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B. 싸움의 상대는 마귀다.
더 나아가서 이 싸움은 마귀와의 싸움이라는 것도 자명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하듯이 육신과 세상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는 믿는 자들의 분별 속에 들어온 새로운 존재입니다. 마귀의 존재가 여러분의 심령을 얼마나 건드리는지 느끼지 못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거듭나지 않았거나, 영적인 감각이 심각하게 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다윗이 당하고 있는 이 모든 어려움들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실로 다윗은 영적 싸움의 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싸움의 상대는 마귀입니다. 다윗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사울이지만, 그가 싸움의 상대가 아닙니다. 사울을 이기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싸움의 상대는 언제나 마귀였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국면에서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제가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리고 아직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적이 없는 여러분이 진정으로 거듭나기를 원하고 죄용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면, 마귀는 여러분의 대적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하고 살아가는 모든 사건에는 이 연관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여러분의 눈에 거슬리고,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여러분을 어렵게 만드는 눈에 보이는 인물이 여러분이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C.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길!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이것만이 우리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경험적으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실 겁니다. 만일, 어떤 특정한 사람이 내가 싸워야 하는 싸움의 상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 사람을, 아니 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마음으로 비난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외없이 이미 길을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건간에 그 사람은 여러분의 싸움의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별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싸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별하기 시작하면, 우리 안에 어떤 변화가 경험되는지 아십니까? 내가 원수요, 대적이라고 여겨서 미워하고 한을 품던 그 사람을 위해서 비로소 기도하게 됩니다. 나를 의롭게 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진짜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4, 17, 20의 말씀대로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는 말씀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분별이 필요합니다.

4. 분별4: 육의 진심과 영의 회개(21, 25)
마지막이자 네번째 분별입니다. 이것은 육의 진심과 영의 회개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24장에서도 보았지만, 사울은 다윗이 자기를 죽일 수 있는 기회에 살려준 것으로 인하여 감동하게 되고 많은 군사들 앞에서 큰 소리로 울면서 뉘우쳤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다윗을 좇지 않겠노라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실상 사울은 다윗의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주어 다윗을 모욕했고, 다시 군사들과 함께 나와 다윗을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 사울이라는 인물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 누구보다 이 일로 헛갈릴 수 있는 인물은 다윗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분별이 요구됩니다. 그 지난 번의 격정적인 태도 만큼은 아닐지라도 이번에도 사울은 자신의 범죄를 인정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 되었도다(21).” 여기에는 회개의 요소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다시 범죄치 않으려하는 결심이 있습니다. 25절에서 사울은 다시 다윗을 축복합니다.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고 했습니다(25). 이것을 믿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이것이 사울의 진심입니까, 거짓된 연기에 불과한 것입니까? 여기에 분별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A. 육의 진심이 영의 회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원리는 이것입니다. 육의 진심어린 뉘우침이 영의 회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뉘우침이 회개가 아니라는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뉘우침이 진심이며, 우리의 감정을 동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런 상황을 맞닥드린다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사울이 지난 번에 울면서 뉘우쳤던 것은 사울의 고도의 연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은 진심으로 뉘우쳤고, 진심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신의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비록 진심이지만, 육신의 행위에는 힘이 없습니다. 어떤 힘이 없는가 하면 그 사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그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사람이 변화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안 됩니다. 이 변화는 근본적인 변화,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변화를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중생과 회개는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이고 이로써 사람은 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아니고는 사람이 본질적으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종종 진심으로 뉘우치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면서 변화합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본질적인 것, 본성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사울은 다윗이 왕될 것도 안다고 말했습니다(24:20). 하지만 그 지식이 사울을 변화하게 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중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회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어떻게 해야 옳게 가는 것이겠습니까? 사울은 지금 뉘우치면서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분별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믿음은 그저 사람 좋아서 무조건 믿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다윗은 지금 사울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사울의 진심어린 말들과 뉘우침은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사울이 보여주는 것이 영의 회개가 아닌 것을 알기에 다윗은 그에게로 가지 않습니다. 비록 다윗이 사울의 악행을 용서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에게로 가서 관계를 이전처럼 회복해야 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을 불신하라는 것이 아니라, 분별할 것을 성경은 요구합니다. 한편 이 말씀은 우리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 거듭난 성도들은 단순한 반성과 진심어린 뉘우침 정도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나아갑니다. 영의 회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인 신자와 불신자의 엄청난 차이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나중에 다윗이 범죄했을 때 보여주는 태도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육의 진심어린 뉘우침 정도로 신앙 생활을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영의 회개로 여러분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신자의 전 생애는 회개라고 가르친 마틴 루터는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해 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자는 이렇게 밖에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성경의 가르침대로 말한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아니, 자신을 속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5. 무분별: 사울
다윗, 그는 분별력이 있는 사람임을 성경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 분별력은 다윗의 신앙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처럼 제공됩니다. 그러나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그와 대조되는 사울의 모습입니다. 사울은 비록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첫 왕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육의 진심어린 뉘우침 정도로 자신을 괜찮게 여기고 살았던 전형적인 인물이며 그 인생의 비참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영적인 분별이라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영적 무분별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은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찾아오는 모든 은혜의 기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예기치 않은 때에 도적 같이 그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은 수많은 기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런 날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의 치명적인 어리석음이요, 무분별인 것입니다. 결국 기회는 다 지나가고 맙니다. 세번째 기회는 사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날 사울과 다윗의 만남은 마지막 만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마지막 기회도 이렇게 지나가고 만 것입니다. 얼마나 다윗과는 대조되는 안타까운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런 어리석음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주시는 기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조금 배우고 조금 깨닫고 조금 찔리는 자리에서 만족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기에 이르기까지는 말입니다.

6. 정오의 빛 같이 빛나리라!(시 37:6)
다윗은 분별하면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성령의 감동으로 썼을 것입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 아멘, 아멘, 아멘.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아멘으로 밖에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아멘으로 대답하시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약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