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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9). 선이 악으로 돌아올 때

사무엘상 25:1-4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10-31

말씀내용
1. 최악의 매치, 나발과 아비가일
이렇게 맞지 않는 커플이 또 있을까요? 본문에 등장하는 나발과 아비가일 말입니다. 나발은 큰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성품은 완고하고 행사가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성경 기자의 평가입니다. 그의 종과 부인은 한 목소리로 그가 ‘불량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17, 25). 이것은 무가치하고 악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뜻이 ‘미련한 자’라는 것을 볼 때, 이것은 그의 부모가 붙여준 이름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이 지어준 별명 같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였고, 분별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화를 돋을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악한 자입니다. 반면 부인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윗에 의하면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33). 자기 집의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한 여인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었을까? 이 부부를 보면, 부부는 똑같다는 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아비가일의 부모가 나발의 재산을 보고 딸을 주었을 것 외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2. 선이 악으로 돌아올 때
다윗은 쫓기는 신세였지만, 그일라를 블레셋에게서 구해주었듯이 주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도와주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나발의 양떼들을 지켜주었습니다. 양털 깎는 철이 되었는데 이것은 농부들이 수확을 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대개 양털 깎는 때에는 주인들이 너그럽게 주변의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고 베푸는 도량을 보이곤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부하들을 보내 겸손히 은혜를 구했습니다. 왜냐하면 600명의 군대가 나라의 군대도 아니고 쫓기는 산적과 같은 입장이었기에 늘 먹을 것이 부족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할 뿐 아니라, 나발로부터 모욕을 당했습니다. 다윗을 주인으로부터 도망친 노예 정도로 보고 멸시한 것입니다.

A. 큰 시험의 승리 뒤에 찾아오는 작은 시험
이것이 진짜 어려운 일입니다. 다윗은 이미 자기 손 안에 들어온 사울을 살려준 바 있습니다. 그는 선으로 악을 갚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예상 밖의 인물인 나발로부터 선을 기대하였으나 악이 돌아왔습니다. 이때가 힘든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서 뭘 기대했겠습니까? 기대한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처가 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나발에게서 먹을 것을 풍성하게 얻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베푼 것이 있었으니까 이것은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심한 모욕까지 당했습니다. 대개 큰 시험에서 승리하고 난 뒤에 오는 이런 작은 시험이 무서운 법입니다. 갈멜 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던 엘리야가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숨고 도망하는 모습을 보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는 인도네시아에 선교사로 갔을 때 제 마음 속에 쌓였던 분노를 인도네시아 교회 지도자에게 표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제가 선교사로 간 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홀대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의 무슬림들이 저에게 어떻게 하는 것은 다 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지도자가 그렇게 하는 것에는 참지를 못했던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큰 승리 뒤에 오는 작은 시험이 언제나 우리를 넘어지게 하곤 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 찾아올 때 우리는 넘어지기 쉽습니다.

B. 오해: 광야는 자기 힘을 증명하는게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발견하는 곳이다.
다윗은 지금 인생의 광야 가운데 있습니다. 아직 그는 왕의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고 왕궁에 거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는 쫓기는 사람이고, 나라의 공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왕답게 행동했고 지금까지 참 잘 참아왔고 견뎌왔습니다. 그런데 나발의 이 예상치 못한 반응에 화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발에게 속한 모든 남자를 하나도 남김 없이 죽이겠다고 하면서 자기의 군대 400명을 이끌고 길을 나섰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광야는 자기 힘을 증명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광야는 오직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발견하는 곳입니다. 광야를 인생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인생은 내가 얼마나 잘 견디는지, 내가 얼마나 센지 보여주는 곳이 아닙니다. 인생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발견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기 힘을 한 번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못나서 지금 이렇게 거지처럼 너한테 음식을 구걸한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C.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본성만 나온다.
이 다윗은 우리가 24장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 맞습니까? 이 다윗은 지금 끓어오르는 혈기를 어찌하지 못하고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이 다윗은 우리가 이전 장에서 보았던 바로 그 다윗입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한 원리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본성만 나오는 법입니다. 그동안 다윗의 훌륭함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을 감싸고 있었고 흘러넘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다윗은 그 은혜가 지금 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의 삶을 감싸고 있지 못합니다. 은혜의 수위가 낮아지니까, 다윗의 본성이 다 드러납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게 다윗입니다. 이게 진짜 다윗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사람이 성숙해져도 그 사람을 끌고 가는 결정적인 힘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리 성숙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지면 본성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하면 은혜의 유무에 따른 변화의 폭이 조금씩 줄어들겠지요. 그러므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매우 훌륭하게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고,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훌륭하지’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내가 어떻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알게 하십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받은 은혜는 헛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증명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나의 나됨, 나의 어떠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증명하라고 부름을 받은 소명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고백한 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한 말의 의미입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그토록 놀랍게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지만, 바울 사도는 이 또한 마게도냐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증명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D. 소명을 망각하면 육신을 따라 행한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원리가 있습니다. 소명을 망각하면 육신을 따라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소명을 기억했기에 비록 쫓기는 삶이었지만, 그일라 성을 구하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소명을 기억하고 산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자기의 소명을 기억했더라면 이렇게 칼을 차고 400명을 데리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소명 없이 살면 육신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예외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던 그런 종류의 무가치하고 어리석고 나발과 같은 삶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명을 의식한 사람은 비록 넘어질 때는 있어도 육신대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육신대로 사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든 지속적인 성향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의 모든 생각은 다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원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한 정직한 고민이 없고,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알아도 삶으로 그리고 가슴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 습니다. 영원히 죽 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윗이 보여주는 것은 비록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소명을 망각하고 살게 되면 이렇게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명을 기억하고 살지 않으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분은 하셔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어쩌다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이런 삶의 근본적 태도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결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속성이 아닙니다.

3. 자녀의 혈기를 막으시는 하나님: 아비가일
A. 아비가일의 분별력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가 이렇게 혈기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가는 길을 막아주십니다. 특별한 간섭하심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이 바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기본적으로 분별이 있었던 여인입니다. 다윗이 누구냐 하는 문제에서 나발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가졌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임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이 바로 이런 분별에서 비롯되는지를 아십니까? 그래서 저는 늘 신앙은 결국 분별력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물론 이 분별은 100% 사람의 영적 신분과 상황을 파악하는 초능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분별이 무엇인가 하면 형제를 알아보는 분별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똑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요소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세상은 전부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고 십자가를 지고(자기 죽음을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바로 이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삶의 태도를 버릴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분별력은 아비가일로 하여금 급히 음식을 풍성하게 준비하여 다윗이 오는 길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B. 용서를 구함: 잘못을 고백함(24), 보상(27), 용서를 구함(28)
아비가일이 군대를 거느리고 칼을 차고 오는 다윗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태도에서 우리는 용서를 구하는 원리를 보게 됩니다. 먼저 아비가일은 자기 남편의 일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의 잘못으로 여겨달라고 하며 잘못을 고백합니다(24). 변명은 더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비록 아비가일 자신은 모르는 상태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화를 누그러뜨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아비가일은 보상을 합니다(27). 준비한 예물을 드립니다. 적절한 보상은 잘못을 회개하는 마음의 진정성을 드러내줍니다. 삭개오가 회개한 후에 자기의 재물로 모든 지난 날의 잘못을 후하게 변상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아비가일은 용서를 구합니다(28).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보노라면 아비가일이 얼마나 지혜롭고 진실한 여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C. 소명을 기억하게 함
그러나 그녀의 지혜를 정말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녀가 다윗이 망각한 소명을 다시 기억하게 해주는 장면입니다. 그녀는 용서를 구하는 일을 마치면서 자연스럽게 다윗의 소명을 기억하라고 겸손히 말합니다.

i. 하나님의 전쟁을 싸우실 분(28)
첫째로 그녀가 한 말은 “내 주께서는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는 것입니다(28).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다윗이 지금 싸우려고 하는 싸움은 여호와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싸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싸움에 부름을 받으신 분이 지금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서 전쟁을 하시려고 하시는군요 하는 말입니다.

ii.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생명을 보호하시는 분(29)
두번째로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기억하게 한 소명은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호해주시는 특별한 분이 아니십니까? 하는 말입니다(29). “당신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생명싸개로 보호하셔서 결코 아무도 그 생명을 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라고 아비가일은 말합니다. 이 말은 지금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사울로부터 피하며 살아가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이고 안전보호의 약속과 같이 들렸을 것 같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그렇게 특별한 사람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장래에 흠이 되지 않는 삶(30~31)
끝으로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한 말은 “나중에 왕이 되실텐데, 그때 부끄럽게 느낄 수 있는 일은 행하지 않으셔야 합니다”라는 것입니다(30~31). 즉, “평생에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을만큼 흠이 없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라는 말입니다(28). 지금 당장을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근시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눈을 좀 크게 뜨고 멀리 바라볼 것을 말합니다. 멀리 바라보고, 장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는 결코 오늘을 더럽히고 살지 않을 것입니다. 후에 주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더러운 죄악들로 더럽히지 않을 것입니다.

4. 듣는 지혜, 듣는 용기(시 141:5): 다윗
이 아비가일의 말이 먹혔습니다. 다윗이 그녀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내대장부로 칼을 뽑아 나발의 집에 속한 모든 남자를 내일 아침까지 남겨두지 않겠다고 공언을 하고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왔는데, 이 한 여인의 말 앞에서 자기의 뜻을 철회하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것도 400명의 군사들이 있는 앞에서 말입니다.

A. 나발과 다윗의 차이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여인, 혈기로 끓어오르는 군인의 마음에 평정심을 주고, 자아로 충만한 사람을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이 여인의 지혜가 왜 함께 사는 나발이라는 인물에게는 통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한 가지입니다. 듣고 안 듣는 차이입니다. 아비가일은 나발에게도 많은 말을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발은 그 이름이 보여주듯, 미련하여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지혜로운 마음은 듣는 마음입니다.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약 1:19). 이것이 지혜입니다. 다윗은 들을 수 있는 지혜가 있었고 나발은 듣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말을 듣는 분들이십니까? 여러분에게 주는 진심어린 말을 들으십니까? 아니면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사람입니까? 괴로운 말을 듣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분노하고 성내는 마음으로 가십니까? 이것이 나발과 다윗의 차이입니다.

B. 악인 때문에 마음 상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기뻐하라(시 37)
우리가 살다보면 나발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예상 밖의 반응 가령, 선이 악으로 돌아오는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악인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지 마십시오. 다윗은 마음이 상했기에 지금 칼을 뽑아들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상하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은 본질적으로 칼을 뽑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안할지라도 말입니다. 다윗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시편 37편이 아마 그 교훈을 기록한 것 같습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1~6).” 이것이 바로 이런 일을 당할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5. 교훈
오늘 말씀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여러분, 몇 가지만 정리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A. 주님의 은혜를 증명하는가, 나를 증명하는가?
핵심은 주님의 은혜를 증명하고 사는가, 나를 증명하고 사는가 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증명하고 싶어하는가, 나를 증명하고 싶어하는가 입니다. 나 잘난 것을 사람들이 몰라주는게 속상합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사람들이 좀 더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까? 내 수고와 봉사를 사람들이 인정해주었으면 좋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면서 죽어야 하는게 바로 이런 것이란 사실을 아십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런 마음, 자기를 증명하려는 마음을 가지고는 주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이 많아서 교회가 늘 시끄러운 시장 바닥처럼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자기를 증명하는게 아닙니다. 나는 안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아니었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뜻도 아니고 주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주님의 은혜, 내 인생에 그렇게 놀랍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말하고 싶어서, 증거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주시기를 구합니다. 오, 주님!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B. 소명을 기억하라.
그리고 두번째로 소명을 기억하고 사십시오. 그리스도인은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해 살 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익하고 악한 삶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자기의 외모와 껍데기를 꾸미면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게 아닙니다. 그런 천박한 삶을 벗어던지십시오. 그럴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소명,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명, 내게 인생을 주시면서 이렇게 살아라, 이것을 위해서 살아라 하고 주신 소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소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생각과 사상과 태도와 말과 행동에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나쁜 습관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돈을 제대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를 고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명을 기억하십시오.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운 일일랑 골방에서라도 하지 마십시오.

C. 들으라.
마지막으로 분별하십시오. 무엇이 참된 말인지, 거짓인지를 분별하십시오. 그리고 들으십시오. 시편 141:5입니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하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시 141:5). 잘 들을 줄만 안다면, 우리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D. 오, 아비가일!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비가일이란 참 지혜로운 여인을 보았습니다. 남자, 여자를 떠나서 이런 아비가일 같은 존재는 얼마나 귀합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일터에서,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이런 존재는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아비가일에게 주셨던 그런 참된 지혜를 주시기를, 그리고 여러분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아비가일 같이 자기로 충만한 사람들을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회복시켜주고, 소명을 망각한 자들에게 소명을 일깨워주며, 혈기가 끌어 오르는 자들의 혈기를 가라앉히고 은혜를 흘려보내주는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