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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7). 광야의 위로

사무엘하 23:13-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10-17

말씀내용
오늘 읽은 본문은 사무엘하 마지막에 나오지만, 사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었고 거기서 약 3마일 거리 밖에 안 되는 그일라 구출 사건의 와중에 일어났던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기적으로는 사무엘상 22~23장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본문 13절에서 아둘람이라는 지명이 나온 것으로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기자는 왜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 기자는 사무엘하 23장에서 다윗의 통치 기간에 그와 함께 했던 용사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충성스러운 ‘30인 정예용사’들이었습니다. 첫 부분에는 용사 중의 용사들 세 사람이 나옵니다. 요셉밧세바, 엘르아살 그리고 삼마입니다(삼하 23:8~12). 그들의 용맹무쌍함을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18절부터 39절에는 두번째 목록이 나오는데, 아비새에서 시작하여 우리아까지 모두 34명입니다. 앞의 3명과 합하면 총 37명입니다. 아마도 30인 정예용사는 죽기도 하고 보충되기도 하면서 언제나 정확한 30명은 아니었지만, 30명 용사로 불리웠던 것 같습니다. 이 용사들이 다윗에게 바친 충성과 행사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은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큰 그림에서 보면 이것은 다윗의 생애 중 가장 힘들 때 일어났던 한 사건이고 보다 큰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대강의 시기가 아둘람에서 그일라에 이어지는 때였겠지만, 정확하게 어느 시점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 본문의 상황: 고독, 배신 그리고 향수
다윗이 처해 있던 상황은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보았던 대로입니다. 그것을 고독, 배신 그리고 향수라는 세 개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둘람 굴에 오기 전, 다윗은 블레셋 지경 가드에 있던 아기스 왕에게 피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알아본 아기스의 신하들로 인해서 그는 미친 척을 하고는 급히 아둘람 굴로 피했습니다. 거기서 다윗의 가족들과 400명이나 되는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경험하면서 시편 34편을 썼습니다. 하지만, 사울에게 계속해서 쫓김을 당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삶 그리고 그를 따르는 400여명의 사람들을 인도해야 하는 지도자로서 그는 심한 고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그가 지은 많은 시편들이 그의 고독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A. 배신1: 그일라(삼상 23:12)
다윗이 그일라 성을 블레셋에서 구출해준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그일라 성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오고 있고 다윗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일라 성 사람들이 다윗이 그들을 구해준 은혜를 알고 자기를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그일라 성의 문빗장만 걸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배신하고 사울에게 자신을 넘겨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느꼈을 배신감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인생의 비애를 더 깊이 경험하게 하십니다.

B. 배신2: 십 황무지(삼상 23: 19~21)
다윗은 그일라 성에서 나왔습니다. 이제 6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딱히 숨을 수 있는 곳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울과 그의 군사들과 전쟁을 할 것이 아니라면 그는 숨어야 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것이 삼상 23:1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도 유하였으므로”. 다윗은 계속 움직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숨겨주심으로 사울은 매일 다윗을 찾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다윗이 십 황무지 숲에 거하고 있는데, 십 사람들이 기브아의 사울에게 사람을 보내어 다윗이 있는 곳을 고하게 됩니다(삼상 23:19~20). 이들이 누구입니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여인들이 환호할 때 그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에 동조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호산나, 호산나”라고 환호했던 그들이 닷새 만에 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빌라도 앞에서 소리질렀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정직하게 보여줍니다. 다윗은 주님께서 겪으셔야 할 배신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이쯤되면, 다윗이 왕이라는 것을 하고 싶었을까요? 이런 백성들의 왕이 되고 싶었겠는가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다윗을 탁월한 지도자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훈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C. 향수: 베들레헴 우물물(삼하 23:15)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옛날을 회상하지 않았을까요? 양을 치던 시절,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 감사한지 몰랐었는데 그 때의 그 평범함과 자유가 얼마나 그리웠을까요?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과 그의 삶이 꼬이기 전의 삶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에 젖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고향 땅마저 자기의 신세 만큼이나 지금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설명하듯이, 당시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삼하 23:14). 사울 치하에 블레셋은 베들레헴과 주변 르바임 골짜기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이전의 삶에 대한 향수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이상이 다윗이 당시 처해있던 상황이고, 우리가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는 다윗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2. 다윗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 다윗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정말 여러분이 지치고 힘드실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물론 하나님이 나의 위로지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정말 사랑하는 누군가, 나를 정말 잘 이해해 줄 뿐 아니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A. 요나단(삼상 23:15~18)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로하시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요나단을 만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십 황무지 수풀에서 만난 일은 그일라 사람들의 배신과 십 사람들의 배신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적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이 너무나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이 만남이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과 다윗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습니다. 요나단은 지쳐있는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힙있게 의지하게” 해주었습니다(삼상 23:16).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하지마, 다윗.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찾지도 해하지도 못할 거야.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될 사람이고 나는 네 다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라. 내 아버지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셔.” 두 사람은 다시 언약을 맺고 각기 제 갈 길을 갑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만남으로 자신의 환난을 견딜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우린 때로 이런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B. 세 용사(삼하 23:16): 마음을 읽는 사람들.. 하나님 섬기는 예.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세 용사의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로하기 위해서 두 번째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저 혼잣말처럼 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다윗의 고독감, 그리고 배신의 사건으로 인한 인생의 비애감이 깊어지면서 향수에 젖어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교묘한 부탁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다윗의 세 용사가 자기들의 주군의 말을 듣고는 그 물을 주군께 바치기 위해서 자기들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그 먼 베들레헴까지 가서 블레셋군과 전투를 하면서 우물 물을 길어왔습니다. 베들레헴은 아둘람이나 그일라에서 약 13 마일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했다고 했으니까 전투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행히 죽지 않고 무사히 다윗, 그들의 주군이 마시고 싶어하는 우물 물을 길어 왔습니다. 대단한 용사들입니다. 그들의 용맹도 대단하지만, 그들의 마음 씀과 충성심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군의 명령 때문에 목숨을 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마음을 읽었던 것입니다. 그 우물 물을 마시고 다윗이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다윗의 힘든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자기들의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다윗이 그 우물 물을 받았을 때의 심정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다윗은 자기의 사랑하는 세 용사가 떠온 그 우물 물 속에서 용사들의 자기 부인과 철저하게 이타적인, 주군을 향한 충성심을 보았습니다. 거듭되는 배신으로 인하여 상했던 다윗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로해주셨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위해서 생명이라도 내어놓는, 아니 주군이 마실 물 한 그릇을 얻기 위해서 생명이라도 아까워하지 않는 용사들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들의 왕이다. 나는 이들의 왕이 되는 것이 자랑스럽고 영광스럽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들의 왕이 되도록 기름부으셨다”라고 말입니다.

성경은 유감스럽게도 이 세 용사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그 두 사람이 이야기 뒤에 이어 소개되는 아비새와 브나야이고 또 한 사람의 이름은 생략되었다고 봅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세 사람의 이름이 모두 의도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 기자는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다윗의 왕정 마지막의 기록에 이미 과거에 있었던 이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의 충성이 아니었다면 다윗의 왕정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런 자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영웅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억하고 계셨고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 영웅들의 에피소드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용사들은 자기 부인과 철저하게 이타적인 자기를 돌보지 않는 충성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모든 관계의 모범입니다. 일차적으로는 물론 주님께 대한 성도들의 충성이 이런 것이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마는, 사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수평적 관계 속에서도 적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 15:13). 바울 사도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썼습니다(빌 2:3). 사도 요한은 이렇게 씁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들으실 때 마음 속에서 어떻게 반응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혹 무슨 꿈 같은 소리인가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바로 이 모든 신약성경의 구절들에 대한 너무나 분명한 주석이고, 실제 사례입니다. 단지 왕을 위해서 충성했다고만 이해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런 관계가 다윗의 나라가 세워지는 기초가 되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 철저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 짐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것이 기초가 되었기에,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목숨을 돌보지 않을 만큼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이 교회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고 그로써 여러분은 사랑을 아셨습니까? 그렇다면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형제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뭔가가 맞지 않으면 소원해지거나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어느 기관이나 조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들어진, 그 기원이 다른,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God-made)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부르심이고, 이상입니다. 아무도 이 하나님의 기준을 손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는 동안 이 이상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3. “하나님, 받으시옵소서!” (삼하 23:16상~17)
다윗은 용사들이 가지고 온 물을 땅에 쏟았습니다! 다윗은 이 물이 그냥 물이 아니라, 형제들, 자기의 용사들의 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생명 보다 귀한 형제들의 피였습니다. 이것이 자기가 받아 마실 수 있을만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직관적으로 알았습니다. 여느 지도자 같으면 “그래 너희 충성심을 이제 내가 알겠노라”하면서 마셨을지 모릅니다. 그는 이 값비싼 물을, 이 제물을 받으실 수 있는 유일하게 합당한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땅에 그 물을 쏟아부은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전제로 부은 행위였습니다. 그는 “여호와께 부어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A. 자신과 하나님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
다윗은 자신과 하나님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마시라고 가져온 물이지만, “하나님, 제 사랑하는 부하들의 피 보다 귀한 물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값비싼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에, 마리아는 지극히 값비싼 향유?보통 사람의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를 깨뜨려서 아낌없이 사랑하는 주님께 부어드렸습니다(요 12:1이하). 그녀는 주님이 그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그런 것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다윗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마음, 이런 태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마음에 들어하신 이유입니다. 사람이 높아지면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다윗도 후에 그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과 하나님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잘못된 범죄 후에 회개하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런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게 되는 특이한 점은 부하들의 충성심이 다윗의 충성심을 자극했다는 사실입니다. 부하들이 그런 충성심으로 다윗을 섬겼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런 충성을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자극이 되었습니다. 은혜가 흘러가는 것을 봅니다. 세 용사들의 마음 속에 흘러넘치는 은혜가 다윗에게로 흘러갑니다. 그것이 다윗의 공동체에 흘러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울하고 바짝바짝 말라가고 있던 다윗의 마음을 위로하시면서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에도 풍성한 은혜를 회복해주신 것입니다.

B. 저는 이런 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목이 마릅니다(시 42:1~2)
여호와께 물을 부어드리는 다윗의 고백은 이것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이 물이 아니라 사실 하나님 자신으로 목이 마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42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물론 이 시는 다윗이 이 시점에 쓴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마는, 다윗의 마음은 이랬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들의 위로도 필요하고 하나님도 그것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적절하게 그런 위로를 주십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람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너무나 충성스러운 부하 용사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헌신과 충성을 통해서 위로를 얻고 있지만, 결국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위로는 오직 주님께로부터 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사실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우리의 위로가 되지 않고 그런 것은 불필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를 대치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는 우리 영혼을 만족시켜주실 수 있는 분은 안 계십니다. 그것이 다윗의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이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4.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 1:3~6)
여러분은 하나님이 위로에 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니 경험하셨고 경험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지쳐있을 때 적절하게 저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하고 지친 엘리야를 위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불러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소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한 가지를 더 분명하게 하십시다. 언제 우리가 위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범죄하고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여 살다가 당하는 고통이 있어도 우리는 위로가 필요한 것입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충만하게 느끼고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위로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책망이 필요할 때에도 위로를 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십시오. 때론 고난이 찾아오고, 배신도 겪게 되고, 오해도 많이 받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여러분은 여러분이 겪으시는 고난과 고독과 배신과 오해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를 얻게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를 시작하면서 자기가 복음과 믿음을 인하여 겪는 많은 환난과 고통을 언급하면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그 위로의 하나님을 너무나 깊이 경험했기에 하는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위로는 모든 환난과 고통을 능히 견디게 합니다. 다윗의 삶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런 위로는 환난 중에 있는 모든 자들을 위로하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본문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내게 넘치는 은혜는 결코 나만을 만족시키지 않습니다. 내게서 형제들에게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위로하고, 마음이 말라붙던 사람들의 마음을 은혜로 촉촉이 적셔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의 은혜요, 주를 위하여 고난받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위로인 것입니다. 이런 위로가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생애에 충만하게 경험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