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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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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6). 광야의 훈련

사무엘상 23:1-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10-03

말씀내용
광야는 은혜를 받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훈련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다윗을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의 광야에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 인물 강해를 하면서 본문을 꼼꼼히 빼놓지 않고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중요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다루어가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다윗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가를 살피시는 것은 말씀의 본질을 살필 때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이야기의 상황을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아둘람 굴에서 일어난 군대(삼상 22:1~2)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본대로, 다윗이 블레셋으로 피했다가 미친체하여 살아나온 후에 간 곳이 아둘람 굴이었습니다. 거기서 다윗의 가족들과 400여명의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로 찾아왔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의 삶에 사실상 엄청난 전환점이 됩니다. 말하자면, 그는 더 이상 혼자서 쫓기는 도망자가 아니라, 일단의 군대를 형성하게 되고 그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쫓기는 광야의 삶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그에게 400명의 사람을 붙여주셨습니다. 나중까지 다윗의 정예군이요, 용사가 된 사람들 중에는 바로 이 때 다윗에게 나아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2. 블레셋의 끊임없는 공격(삼상 23:1,27; 24:1)
다윗의 가족들과 함께 이런 사회적으로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들이 400명이나 다윗에게 나아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회 안에 원통한 사람, 억울한 사람이 많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내부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다윗의 부모들은 다윗이 나라의 역적이 되면서 몸을 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마는, 여기에는 당시 다윗의 집이 있던 베들레헴이 블레셋의 공격으로 빼앗긴 땅이 되어버렸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원통한 자들과 환난 당한 자들 가운데도 다윗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블레셋의 침략으로 집을 잃거나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울의 왕국은 계속해서 블레셋의 침략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상 23:1에는 쫓기고 있던 다윗에게 부하들이 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23:27에는 사울의 부하가 다윗을 쫓고 있는 사울에게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이 땅을 침로하나이다”라고 말하여 사울은 다윗 쫓기를 그치고 급히 블레셋을 치러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이고, 블레셋을 치고 나서 사울은 다시 다윗이 숨어있다고 하는 엔게디 황무지로 돌아오게 됩니다.

3. 제사장 학살 사건: 다윗을 잡는 일에 광분하여 국가의 안녕을 지키지 못하는 사울(삼상 22:6~19)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형편은 날로 악화되어갔을 것입니다.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지켜주어야 할 왕이 자기의 정치적 경쟁자인 다윗을 쫓는 일에만 급급하고 백성들을 블레셋의 침략에서 구해주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갈수록 사울의 마음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는데, 그 절정이 22:6~19에 있는 제사장 학살 사건입니다. 사울은 거의 신경증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손에 단창을 들고 신하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8절입니다.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제는 자기의 아들인 요나단 마저 믿지 못하고 역적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신하인들 그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이런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때는 이때다 하고 나타난 인물이 바로 도엑이란 사람입니다. 그는 다윗이 도망갈 때,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찾아가서 먹을 것을 공궤받고 골리앗의 칼을 가져갔을 때 마침 놉에 있어 그 광경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는 사울에게 그 일을 고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마침 누군가 내부에서 다윗과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를 필요로 하는 사울이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아히멜렉 뿐 아니라, 놉에 있는 아히멜렉의 집안의 모든 제사장들을 다 소환했습니다. 사울은 결국 아히멜렉을 반역죄로 몰아 소환된 모든 제사장들을 죽일 것을 명합니다. 하지만, 누가 감히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죽이는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하지 못하자, 도엑이 나서서 그날에 85명의 제사장들을 다 죽였고 사울은 이것도 모자라서 제사장들이 살던 놉에 가서 남녀와 아이들, 젖먹이 그리고 소와 나귀와 양까지 다 죽이는 대학살극을 자행하게 됩니다. 이로써 사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두려운 일을 한 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이렇게 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는 왕과 함께 좋은 것들을 남겨두었던 이 사람이 하나님의 제사장들과 그 모든 가족들과 짐승들까지 죽였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정도로 사울 왕이 다윗을 잡아 죽이는 일에 광분해서 날뛰고 있었으니, 나라의 꼴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블레셋의 공격을 다 막아낼 수도 없었고, 자기의 백성을 다 지켜주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에는 억울하고 환난 당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제사장들 가운데 살아남은 한 사람의 생존자가 있었습니다. 아비아달입니다. 아마도 그는 제사장들이 사울에게 소환되었을 때, 성소를 담당하는 책임을 맡았기 때문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학살극을 들었을 다윗의 마음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떡을 주고 골리앗의 칼을 주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제사장 85명과 그들의 모든 가족들이 다 몰살당한 것입니다. 이 때의 마음을 다윗은 시편 52편에 담았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아마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도엑에 대한 마음을 이렇게 표출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시 52:5).” 그는 이렇게 자신의 분노를 하나님께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명령: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삼상 22:5)
다윗이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것은 바로 이런 전후 상황들 속에서였습니다. 아마 다윗이 선지자 갓으로부터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정확한 상황은 그가 부모를 위한 거처를 부탁하기 위해서 모압 왕 앞에 갔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일단 연로한 부모님을 자기의 정처없는 도피생활에 함께 동행하게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통치하는 한, 이스라엘 안에서는 부모님이 계실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생각한 곳은 바로 자기 아버지 이새의 할머니 룻의 고향인 모압이었을 것입니다. 거기는 룻의 친족들이 있었을 것이고 아마 이런 연유로 모압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모압 왕의 환대를 받으면서 한동안의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선지자 갓을 통해서 하나님은 “유대 땅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명령이 어떤 의미로 다윗과 그의 수하에 있는 군인들에게 들려졌겠습니까? 이것은 죽음의 전쟁터로 다시 돌아가라는 말과 같이 들렸을 것입니다. 고향인 유대 땅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울의 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이런 안전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문은 가르쳐줍니다. 잠시의 휴식이 다윗에게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휴식을 가장 적절한 시간에 주십니다. 그러나 휴식은 휴식입니다. 휴식이 끝나자 하나님은 그를 다시 전쟁터로, 거친 광야로 내보내십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의도 속에서 하나님은 그를 다시 다루시기 시작합니다.

A. 영적 회복과 교제로의 부르심: “안전한 곳을 떠나라.”
유대 땅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회복과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로 부르시는 부르심이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으로 도망할 때만 해도 영적으로는 깊은 낙심의 상태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둘람 굴에서 보여준 태도는 시편 34편에 나와있듯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 몸으로 경험하고 찬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하나님은 그를 모압의 안전한 곳에서 꺼내어 전쟁터로 집어넣으시면서 다윗의 삶을 가장 높은 영적인 고지로 올려놓으시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이제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깊은 영적 교제 속으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스펄전은 다윗의 삶 속에 이런 고난이 없었더라면, 이런 전쟁터 속에서의 삶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그 많은 다윗의 시편을 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가 겪은 수많은 고난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마음과 입술을 통하여 이런 복되고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많은 기도와 고백의 시편들을 남기게 하신 것입니다. 유대 땅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안전한 곳을 떠나라”는 의미였습니다. 우리가 더 안전한 곳, 이보다 더 안전한 곳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광야 훈련의 엄청난 유익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고난을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광야를 피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하는 삶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때로는 어려움이 예상되고, 광야로 들어가서 겪어야 하는 고난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말아야 할 신앙의 이유들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우리를 빚어가시는 것입니다.

B. 왕의 신분과 사명으로의 부르심: “내 백성을 보호해라”
유대 땅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은 다윗을 왕의 신분과 사명으로 부르시는 부르심이었습니다. 비록 다윗은 쫓기고 있었지만, 왕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대관식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이스라엘의 왕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이었습니다. 다윗도 이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는 일개 도망자이거나 의적 무리의 대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 하나님이 뽑아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이런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알고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훈련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윗이 유대 땅으로 들어오는 것은 사울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비록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지만, 왕이 자기 백성들에게로 귀환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본격적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왕으로서의 훈련이었습니다.

5. 하나님의 광야 훈련 커리큘럼
다윗이 유대 땅에 들어오자, 한 부하가 다윗에게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23:1입니다.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그일라는 유대 지경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표적입니다. 그런데 그일라가 블레셋에게 노략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정작 사울은 그 일을 돌아볼 생각 조차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일라에 있는 사람들은 왕 다윗이 돌봐야 할 백성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광야 훈련의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A. “너 자신을 위해 살 것이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살 것이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도전하고 시험하신 것은 “너 자신을 위해 살 것이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살 것이냐”하는 문제였습니다. 다윗은 쫓기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능하면 숨어지내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지금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블레셋이 하나님의 백성을 농락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다윗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것이 다윗의 딜레마였습니다. 다윗은 부하가 자기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어떻게 합니까? 그는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계산이 뻔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윗은 여기서 상황을 살피고 무엇이 나에게 유리한가를 계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지금 피해서 도망다녀야 하는 형편인데, 그렇게 해달라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뜻을 정해놓고서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계산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은 더 더욱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야 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나 그렇게 하고 살아가는 세상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 위기의 상황에서,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가 너무나 뻔하게 계산되는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결정이라면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예가 걸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이런 상황을 만나지 않을까요? 우리가 한 없이 피해가려고 생각한다면 피해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상황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찾아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광야 훈련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테스트입니다.

B. “하나님 편에 설 것인가, 사람들 편에 설 것인가?”
하나님은 다윗이 묻자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본능적으로 원하는 대답과 다른 것입니다. 이제 또 하나의 테스트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윗이 부하들에게 말을 했겠지요. 그러자 부하들의 대답은 하나같이,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나마 안전한 모압을 떠나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유대 땅으로 들어오되 수백명에 이르는 그 많은 부하들을 이끌고 돌아온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에 있기도 두렵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달랐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사울도 아니고 블레셋 군대와 싸워야 한다니 부하들의 입장에서는, 아니 그 누가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적 계산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그일라를 보호하는 것은 왕인 사울이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윗과 자기들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기서 부하들이 취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일이 아니다. 사울의 일이다.” 여러분, 이것이 누구의 일이냐를 따지는 것처럼 어리고 어리석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영예가 걸린 일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일일 때 말입니다. 책임 소재를 따지고 앉아있기에는 이 일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걸린 일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이미 기름부어 세워진 왕이었습니다. 그는 “나는 아직 공식적인 왕이 아니니까, 나는 아직 취임하지 않았으니까”라고 말하면서 핑계를 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정말 어려운 훈련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설 것인가, 사람들 편에 설 것인가?” 이것은 특별히 모든 하나님의 종들, 그러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언제나 받는 훈련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받는 시험이 이것이 아닙니까? 이제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그것은 이제까지 가진 많은 관계들에 변화를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 관계들의 단절을 가져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무엇보다 사울 왕과 다윗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늘 이런 자리에서 사람들 편에 섰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을 해야 할 때, 그는 사무엘을 기다려야했는데, 사람들이 흩어지고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자, 자기가 나서서 제사를 드림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기다리지 않은 불순종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아말렉과 전쟁을 했을 때에도 사울은 왕 아각을 살려주었고 좋은 짐승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 만이 아니라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바로 이런 문제로 넘어지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아론도 그랬습니다. 백성들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고 성화하자, 그는 백성들이 원하는대로 그들의 마음을 맞춰가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편이 아니라 사람의 편에 선 것입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도 자기에게 이런 갈등이 있다는 것을 갈라디아서에서 피력했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여러분, 이것이 어떤 특별한 지도자들에게만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이런 싸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생각을 가지십시오. 이것은 광야의 훈련의 하나인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멋지게 설득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하나님께 자주 엎드렸다는 것은 그가 영적으로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은혜의 교제 가운데 들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고 승리를 약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런 승리의 보장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보장 없는 명령에 순종의 뜻을 분명히 하고 나서, 이런 승리의 약속을 보장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일어나 군사들을 이끌고 그일라로 가서 그들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해주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여 주었습니다. 다윗은 광야 훈련의 두번째 테스트를 통과했습니다.

C. 배신을 극복하고 성질을 하나님의 주권 앞에 복종시켜라.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놉의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을 학살한 사울의 광기는 이제 절정에 달했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서 블레셋 군대를 쳤다는 소식이 사울의 귀에 들리지 않을리가 없습니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그일라는 문이 하나 밖에 없는 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이 갇혔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이 군사를 이끌고 자기를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접한 다윗은 다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는 그일라 사람들이 생명을 구해준 자기를 배신하여 사울에게 넘길 것인지, 사울이 정말로 오고 있는지 알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참 서글픈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 참 비겁하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화가 나서 다윗이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았을지도 모를 사람들입니다. 이미 제사장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그일라 사람들은 사울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인간적 비애를 느낄만한 말씀을 듣고서, 조용히 자기의 군사 600여명을 이끌고 사울을 피하기 위해서 그일라를 떠납니다. 그리고는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모습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도 유하였으므로”(삼상 23:14). 그러나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여러분, 사람들이 우리를 악한 자의 손에 내어주고, 사람들이 우리를 배신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있는 보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악한 자의 손에 넘겨주시지 않으실뿐더러,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배신하시지도, 우리를 버리시지도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살다 보면 인간의 배신을 당할 수도 있고, 선을 악으로 갚는 경우도 당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지키고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일라 사람들의 배신과 인간적 비애가 다윗의 마음을 허물지 못했습니다. 이것도 광야의 훈련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배신을 극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불타오르는 성질을 하나님의 주권 앞에 복종시키는 것이야말로 광야에서 하나님이 다윗을 훈련시키시는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성질’이라는 것을 성경은 ‘육신’이라는 다른 말로 표현합니다. ‘성질을 못 이겨서’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은 ‘육신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인데,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한 말도 아니고, 합당한 태도일 수도 없습니다. 다윗은 이런 점에서 자신의 성질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두는 것을 훈련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지키는 길입니다. 한 번 두 번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이끌려가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갈기 갈기 찢어지고 거칠어질 것입니다. 그 마음을 회복하는 데에는 많은 은혜가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합니다.

6.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우리들에게 광야 훈련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사랑하신 백성들의 배신을 극복하시고 마음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광야에서 이것을 훈련시키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만들어가십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하지 마십시오. 안전지대에 영원히 머무르겠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광야의 도전을 받아들이십시오. ‘자기를 위해서’ 움직이는 삶을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알량한 ‘자기 유익’입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안전지대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안전지대를 떠나 유대 땅, 죽음의 위험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자기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했듯이 말입니다(히 11:25).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나를 등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 편에 서 있습니다 하는 마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신에 속한 모든 성질을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가져가 복종시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배움과 훈련이 어디서 일어나는가? 더 안전한 곳, 더 편안한 곳이 아니라, 바로 광야, 의지할데 없는 광야,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광야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우리를 빚어가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