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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5). 광야의 은혜

사무엘상 21:10~22: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0-09-26

말씀내용
1. 배경: 라마 나욧 체험(삼상 19:18~24)
다윗이 사울의 살해 기도에서 벗어나 도피처로 선택한 곳은 은퇴한 사무엘이 있는 라마였습니다. 거기는 나욧이라고 이름하는 선지자들을 길러내기 위해서 만든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거기까지 군사들을 보내서 다윗을 잡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게 되었는데, 군사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그들이 다른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울 자신이 다윗을 잡으려고 왔지만 사울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예언을 하며 무아경에 빠져서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는 말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이쯤 되면 다윗이 어떤 생각에 이르러야겠습니까? “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지켜주시는구나”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사무엘에게까지 왔다는 사실을 보면서, 여기도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고 다시 라마 나욧에서 도망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20:1). 다윗은 요나단을 만나서 다짜고짜 사울이 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느냐고 따지듯이 묻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나’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서 나의 죄가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뇨?”(20:1) 이렇게 말 속에 ‘나’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갈 때에는 필시 그가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지금 큰 그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주시는 것도 보고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라고 요나단에게 말을 하는데, 이 말은 그가 얼마나 지금 불신앙의 상태 가운데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2. 광야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다.
결국 다윗은 사무엘이 거하는 라마를 떠나서 유랑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유랑생활이 다윗의 삶 가운데서 정확하게 몇 년이었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나이 30세가 되어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먼저 기름부음을 받을 때까지 적어도 다윗의 청년 시절을 다 앗아간 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사무엘과 함께 있었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유랑 생활을 시작한 것은 직접적으로는 다윗의 결정이고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단편적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과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광야로 들어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들어가게 되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길러내시는데 쓰시는 현장도 광야입니다. 아브라함의 광야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가나안이었습니다. 야곱도 하나님은 아버지 집을 떠나 광야로 끌어내사 벧엘 광야에서 만나주시고 그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장소로 먼 밧단아람을 사용하셨습니다. 요셉에게도 애굽이라는 광야가 필요했습니다. 모세를 준비시키시려고 하나님은 그를 바로의 왕궁에서 이끌어내사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 40년을 살게 하셨습니다. 욥과 같은 사람에게도 고난이라는 광야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광야에서 철저하게 홀로됨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어떤 환경과 상황을 통해서이든지 이런 광야가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선택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 자신의 실수와 우리 자신의 잘못된 선택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실수 조차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유익하게 쓰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3. 광야: 한가함, 수동성, 외로움 그리고 하나님을 찾음.
광야에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광야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환경이 아닙니다. 광야는 뭘 차분하게 쌓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하던 모든 일상적인 수고와 노력을 다 내려놓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광야에서는 능동적으로 인생을 건설해나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은 하나님께서 하시게 되고 사람은 한없이 수동적이 됩니다. 광야에서는 해야 할 임무도, 숙제도, 끝마쳐야 할 마감날짜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그를 옭아매는 것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광야에서 그들 자신이 어떤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생존해야 했고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광야에서 그들을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목자로서 보낸 40년 동안 계획을 가지고 지도자로서의 훈련을 쌓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도자로 훈련시키셨지만, 모세가 의식적으로 그런 훈련을 한 것은 아닙니다.

아주 분주하게 살던 사람이 광야에 들어오게 되면 갑자기 주어진 무일정에 당황하게 됩니다. 언제나 15분 단위로 일정 관리를 하던 사람에게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 동안 아니 그 이상 일정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광야에서 삶의 단순함과 깊이를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다윗이 이렇게 그의 젊은 시절의 거의 10년에 해당되는 기간을 정처없이 그리고 무한정 쫓기면서 살았다는 것을 보면서, 이 시간이 그의 남은 평생의 왕으로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데 얼마나 필요한 시간이 되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외부 관찰자만이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낭비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시지 않으십니다. 광야의 특징은 한가함 뿐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사람은 외로움을 경험합니다. 옆에, 주위에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외로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속에서 사람은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살아온 것에 비하면 삶이 너무나 단순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고, 또한 삶이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광야가 우리에게 유익하게 작용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게 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광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좀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광야에서 하나님만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광야에서 사람의 마음이 더 강퍅해지는 것도 일어나는 현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예 마음의 문을 꼭 닫아걸게 되고 매우 냉담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완전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사셨을 때, 광야로 나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거기서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거기서 마귀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유혹을 했습니다. 광야는 이런 점에서 유혹이 많은 곳이고 그 어느 때보다도 유혹에 대해서 예민하게 될 수 있는 때입니다. 어쩌면 광야에서 한 없이 넘어짐과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세 가지 유혹에 대해서 다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처럼, 광야에서 사람은 가장 놀라운 믿음의 승리를 거두게도 되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되기도 합니다. 어떻든 광야는 사람이 하나님을 부르고 만나게 되는 특별한 영적 은혜를 얻게 되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다윗의 삶의 광야 생활은 그에게 엄청난 믿음의 승리와 또 비참한 영적 실패를 모두 경험하게 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승리와 실패를 통해서 다윗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4. 광야의 은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무엇을 가르쳐 주시는가 하면 바로 하나님 자신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 보다 더 귀한 광야의 은혜는 바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책상에서는 머리를 써서 배웁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사람은 가슴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광야의 은혜입니다. 죽은 지식이 산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과 요셉이 경험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철저하게 경험했던 것은 그들이 광야로 나갔을 때였습니다. 다윗은 어쩌면 이미 작은 광야들을 경험한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아버지 이새의 집에서 막내 아들로서 받아야 했을 사랑이나 귀중함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도 광야였을 것입니다. 그가 사울 왕에게 말한 대로 밤낮으로 양을 치느라고 들판에서 보낸 많은 외로운 시간들도 그에게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광야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또 다윗에게 이런 더 길고 힘겨운 광야가 필요한 것이었을까요? 자칫 우리 입술에서 ‘이건 불공평해!’라는 말이 튀어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앞으로 왕으로서 살아가야 할 40년의 시간을 생각해볼 때, 그는 보통 사람보다 더 많고 깊은 하나님 체험과 은혜가 필요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광야가 없이 주어진 권력과 편안함은 때로는 그 사람 자신에게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많이 보지 않습니까? 사울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5. 다윗의 실패(21:10~15)
성경은 다윗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신뢰하지 못하고 사무엘이 있는 곳을 떠나 도망했습니다. 결국은 그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한 곳은 블레셋 진영이었습니다. 제 정신이라면 도무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다윗이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원수였고, 다윗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할례받지 않은 골리앗의 나라인 블레셋으로 피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정상적이고 일상적 환경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 이런 광야에서는 벌어질 수 있으며 또 벌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한 실패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사무엘을 떠날 때부터 예견된 것이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울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입니다(21:10). 하나님을 경외했다면 사무엘과 함께 머물렀을 것이지만, 사람인 사울을 두려워했기에 그는 이런 잘못된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의 진영으로 들어갔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일단,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사람은 계속해서 사람을 두려워하게 마련입니다. 사울이 두려워서 아기스 왕에게 갔는데, 이제 자기 신분을 알아보는 그 신하들 때문에 다시 아기스 왕이 두려워졌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은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그 대상이 수없이 많이 바뀌기 때문에 하나를 피하면 또 다른 존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살아가게 되지 않습니까? 결국 다윗이 결정한 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행위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미친 척이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는 그들 앞에서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문짝에 그적거리고, 침을 수염에 흘렸습니다. 그의 연기는 훌륭했습니다. 아기스 왕은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해서 이 자를 내게 데려왔느냐”고 하면서 다윗을 내쫓았습니다. 사실, 이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떤 왕이 적장이 미친 척을 하면서 들어왔는데 그것을 그냥 살려서 내보내겠습니까? 자기들의 원수인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에서도 당신의 기름부어 세운 종을 보호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쨌든 다윗은 살아서 나왔습니다.

6. 다윗의 회복(22:1~5; 시 34)
그리고 그가 간 곳은 아둘람 굴이었습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로 숨어들어갔을 때 어떤 연고로 다윗의 가족들이 이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이미 사울에 의해서 역적이 된 다윗의 가족이기에 결코 편할 수가 없었던 다윗의 가족들이 다윗에게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회의 약자들이 다 다윗에게로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모두 약 400명이나 되었고, 다윗은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다윗이 체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그는 블레셋으로 도망갔다가 도리어 미친 척을 해서 간신히 살아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아둘람 굴로 피신을 했는데, 어떻게 알고는 부모 형제들 그리고 이런 저런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들이 몰려와서 큰 부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이 때 썼던 시편을 통해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시편 34편입니다. 시편 34편은 이런 표제로 시작됩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아비멜렉은 애굽의 바로와 같이 블레셋 왕의 칭호로 이해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송합니다(1절). 그리고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영혼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읽게 해줍니다(2절). 곤고한 자들이 듣고 기뻐하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둘람 굴의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이 자기를 통해서, 자기의 이야기를 듣고서 기뻐하고 힘을 얻으리라는 기대입니다. 다윗은 혼자서가 아니라 자기를 찾아온 이들과 함께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을 높이고 싶어합니다(3절). 그가 찬송하고 싶어하는 내용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것이 4~10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너무나 두려워서 미친 척을 하는 동안에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사울에 대한 두려움, 아기스에 대한 두려움에서 하나님은 그를 건지셨습니다. 이제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건짐을 받은 다윗은 하나님 경외함이 되살아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할 대상이 없다는 사실을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를 그는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얼굴에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의 광채가 있습니다(5절). 그는 드디어 하나님은 당신의 천사들을 통하여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건지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7절). 그리고는 그의 찬송은 절정에 달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8절).” 그는 이제 머리로 알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슴으로, 그리고 삶으로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맛보아 알았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더 이상의 표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가슴 뛰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경험하고 맛본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34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혼자서가 아니라 자기에게로 온 400명의 사람들과 함께 그 선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9절).” 이것은 권면이고 충고이고 설교입니다. 자기 자신이 깊이 경험한 진리를 다윗은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젊은 사자가 궁핍하여 주리는 일이 있을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결코 부족함이 없이, 모든 좋은 것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10절). 시편 34편 전체를 다 읽으면 좋겠습니다마는, 여러분께서 집에 가셔서 다시 한 번 이 시편을 읽으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이렇게 뼈아픈 실수, 도무지 제 정신으로는 저지를 수 없는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디어 맛보아 아는 수준으로 자라난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한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사람의 믿음은 훌쩍 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경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일이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광야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훈련시켜 가시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해주시는 장소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광야가 꼭 필요합니다.

7. 광야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라. 이것이 광야의 은혜다.
여러분도 다 인생의 광야를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지금 광야를 걷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배웠는가, 경험했는가, 맛보아 알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윗처럼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송축하고 노래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경험을 하셨습니까? 여러분이 만나고 배운 하나님은 정말 선하신 하나님이십니까? 두려움 속에서 구하였더니 기도에 응답하사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신 분이십니까? 그 분은 자기에게 피하는 자를 건지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만족함이 되어 주시는 분이심을 여러분도 맛보셨습니까? 이것을 배우게 하시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인생에 광야를 주시는 이유입니다.

사무엘서는 다윗의 외면을 보여준다면, 시편은 다윗의 내면을 비추어줍니다. 이 두 이야기가 만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피난처라는 단어입니다. 광야는 다윗이 피난처라는 단어의 의미를 발견한 사전이었다고 유진 피터슨은 말합니다. 광야가 없다면 피난처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광야에 아무 도움도 없이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는 피난처를 필요로 하는 법입니다. 다윗이 처음에 정한 피난처는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곧 배웠습니다. 우리도 수없이 많은 이런 잘못된 선택과 결정을 내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사 우리의 참된 피난처는 바로 하나님, 그 선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십니다. 다윗이 발견한 피난처의 뜻은 거의 다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피난처는 원래 장소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점차 장소보다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단어로 바뀌게 됩니다. 광야에서 경험하고 맛보고 알게 된 하나님의 선하심은 다윗으로 하여금 유일한 피난처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또 고백하고 평생 고백하게 한 것입니다. 광야는 다윗을 하나님께로 더 깊이 인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인생에서도 이런 광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만 하신다면, 우리의 광야는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비록 성공이 아니라 실패, 올바른 결정이 아니라 잘못된 결정을 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인 것입니다. 그 선하심을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저 자신은,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아직 광야에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