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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22). 고백, 노래 그리고 시

사무엘하 22:1-5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1-05-08

말씀내용
우리는 이제 다윗의 생애 마지막으로 훌쩍 뛰어넘어갑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감사시입니다. 자기 인생을 회고하면서 자기 인생에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을 마음 깊은 곳에서 고백하는 노래요, 시입니다. 본문 1절에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라고 되어있습니다. 아마 그가 사울의 손에서 건짐을 받고 왕이 되어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왕국을 확립하게 되었을 때 썼던 시였으리라 짐작합니다. 이 시는 시편 18편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시편 18편에는 1절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 시의 제목으로 적격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시 전체를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다윗의 생애의 마지막 부분을 설명하고 있는 사무엘하 뒷부분입니다. 즉, 이 시를 언젠가 다윗이 자기의 노래와 시로 고백했던 적이 있었는데, 성령님께서 이 사무엘하를 기록하실 때, 다윗의 노년에 가장 적합한 노래로 바로 이 시편 18편을 기록하셨다고 볼 때, 이 본문은 우리가 다윗의 인생을 평가하는데 매우 중요한 본문이라고 이해합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시와 노래들 가운데서 특별히 이 시편을 여기 기록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이 다윗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독자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그의 노년의 모습은 시인의 모습입니다. 그는 피를 많이 흘린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이든 다윗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노래와 시로 표현된 다윗의 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1. 고백이 있는가?(2~4,29,32,33)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고백은 남의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말,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르지만, 이게 정말 나의 고백인가,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인가 하는 것을 살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다윗 처럼 시인의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그렇게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다윗의 시편을 가지고 우리의 고백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게 내 고백인가 하는 것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께 뭔가를 고백하고 싶다면 그 고백은 어떻게 표현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함께 해 온 사랑하는 사람들, 배우자나 자녀들에게 뭔가를 말하게 될 것입니다. 보통 그것을 유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그는 역시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자기의 평생에 은혜를 베푸시고 함께 해 주신 하나님께 뭔가를 고백하고 싶을 것입니다. 유언을 해야되니까 억지로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 마지막 순간이 올 때,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고백도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A. 이것만은 고백하고 싶다.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우리가 살아온 세월은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이르렀음을 알게 될 때, 이것 만은 내가 하나님께 고백하고 싶다 하는 것이 무엇일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아마 일평생 하나님을 섬겨온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인생에서 드려온 모든 고백의 결정체가 될 것입니다. 수많은 말들을 압축하고 또 줄여서 표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이것만은 고백하고 싶다’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너무 추상적이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오늘 다윗의 이 고백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B. (은유와 실재) 나의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나님께 대한 고백은 너무나 실제적입니다. 조금도 추상적인 고백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많은 은유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나의 하나님은 무엇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가 은유들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과 그가 사용한 은유들을 보면 우리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실제적인 분이셨는가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개념들이 다윗이 자신의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까? 먼저 2~4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죽 열거해보면, 반석,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높은 망대, 피란처입니다. 그리고 29~33절에서는 등불, 바위, 견고한 요새라는 은유를 사용했습니다. 그가 사울의 손에 오래도록 쫓겼던 삶을 생각해보면 왜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했는지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사울을 피하여 숨었을 때, 반석과 요새와 같은 하나님을 그는 경험했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를 사울의 손에서 건지시는 분이며 피할 바위가 되어 주셨습니다. 수많은 전쟁터에서 죽음의 고비를 많이 넘겼을 다윗에게 있어서 또한 하나님은 방패가 되어 주셔서 모든 적들의 화살과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셨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구원의 뿔이란 고백에서 그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찬양하고 있는 듯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높은 망대가 되셔서 그가 언제든지 피하여 숨을 수 있고 원수들이 미치지 못할 피란처가 되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한치 앞도 알지 못하는 위험 천만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기의 등불이 되어주신 하나님이었다고 그는 또 말합니다. 그는 이 모든 삶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바위와 견고한 요새가 되어주셨다고 다시 한 번 반복해서 고백합니다. 이 모든 은유들은 다윗의 실존에 있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셨는지를 설명해줍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풍부한 표현들만큼이나 그가 일생에 경험한 하나님은 그의 삶 전부를 차지하셨던 분임을 보여줍니다. 이 고백을 담은 시편이 다윗 생애의 마지막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사울의 손에서 벗어나고 많은 전쟁을 이기고 나라를 확립하게 된 시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들의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께 대한 고백은 어떤 것일까를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의 하나님을 말할 수 있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아마 이 고백은 다윗에게 처럼 여러분의 살아온 삶에서 하나님이 차지하신 비중, 하나님을 실재로 경험한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2. 고백이 만들어지는 환경은 대적의 손, 사울의 손이다(1,5~7a).
이런 다윗의 고백들이 어떤 환경에서 나온 것입니까? 이런 고백이 만들어진 다윗의 환경은 한 마디로 대적의 손이었고 사울의 손이었습니다. 아니, 그런 것들로 대표될 수 있는 고난, 환난이었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1절에서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7절에서 자기가 당한 환난의 상황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의 물결’이었고, ‘불의의 창수’였으며, ‘음부의 줄’이고 ‘사망의 올무’였습니다. 다윗 자신이 스나미와 같은 현상을 알았으리고 생각이 되지는 않지만, 그가 여기서 고백하고 있는 환난의 상황 중에, 사망의 물결과 불의의 창수는 오늘 저로 하여금 그런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멈출 수 없는 엄청난 물결이 생각지도 않은 때에 자기를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죽음의 덫에 걸려서 빠져나올 수 없도록 죽음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들을 그는 아마 적지 않이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의 인생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어린 시절 여덟째 아들이었지만, 그가 고백하듯이 그리고 성경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그는 막내로서 그다지 사랑과 주목을 받는 아들은 아니었으며,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것과 같은 느낌을 가졌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의 기름부음이 있은 후에도 사울에게 쫓기는 삶을 청소년기 이후 적어도 그가 왕이 되기까지 십 수년에서 이십년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그 젊은 시절이 그에게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삶의 연속으로 이어져갔습니다. 그의 결혼 생활은 비극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나중에 왕이 되지만, 이후에도 그의 삶은 자식들 사이의 강간과 살인, 그리고 자식의 반역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세바의 반란과 같은 이스라엘 10 지파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인생 자체로 놓고 본다면 조금도 따라가고 싶지 않은 삶입니다. 환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런 다윗의 인생을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바로 이 다윗의 노래 속에서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환난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수많은 다윗의 시편들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대한 이런 고백은 결코 온실 속에서 혹은 아무 걱정 없는 왕궁에서의 화려한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연약을 철저하게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그는 원수들이 자기보다 강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사울은 다윗 보다 강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높이셨고 그를 건지셨습니다. 그가 싸웠던 수많은 전쟁의 대적들은 강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그 모든 전쟁에서 구원해내셨습니다. 다윗이 분명한 목소리로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내가 원수들 보다 강했다”라고 말하는 대신,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건지심과 구원의 역사가 없었다면 자기 자신은 도무지 설명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백은 이런 환경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3. 기도로 고백되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곧 썩고 만다.
그런데 여기 다윗의 삶을 이해하는데 성경이 가르쳐주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그가 이 모든 환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단순히 환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환난이 온다고 해서, 환난을 겪는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환난이 올 때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 자들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다윗은 3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주시는가? 바로 ‘하나님께 피하는 모든 자에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며 도우시고 건지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겠습니까? 다윗의 삶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교훈이라고 한 것은 단지 그가 환난에서 기도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훈은 이것입니다. “기도로 고백되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곧 썩고 만다”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말인데 아무리 봐도 잘 표현된 진리입니다. 다윗은 환난 속에서 기도했고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만난 하나님, 그가 알게 된 하나님, 그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들이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를 보십시오. 그는 평생에 자기가 알게 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자신의 노래와 시로 표현된 기도에 담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삶에서 배워야 하는 너무나 중요한 교훈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아가시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배워갑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우리는 인생을 통하여 다시 경험하고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여러분의 삶의 환난을 통해서 얻은 것이든지, 아니면 설교를 통해서 성경공부를 통해서 얻게 된 지식이든지 그 지식,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는 여러분의 지식이 여러분의 엎드림 속에서, 기도로 고백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지식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속에서 썩어서 냄새를 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기도로 고백되어야만, 기도로 고백될 때에만 향기로운,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윤택하게 하는 지식이 됩니다.

열심히 말씀을 공부할 수 있고,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뭔가를 이루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절대로 기도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든 성경공부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뭔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여러분을 어떻게 변화시켰습니까? 만일 그 깨달음이 여러분으로 기도하게 만들었다면 그 깨달음은 기도와 함께 여러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없는 깨달음은 그 자체로는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알게 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여러분의 기도 속에서 고백되고 표현되어야 합니다.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실 때 그 말씀이 여러분의 일주일 동안의 기도의 삶을 지배하도록 해보십시오. 현저하게 그 말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만일 이런 과정이 없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말씀의 능력에 대해서 의심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어떤 결정을 하게 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안 되더라” 하면서 결국은 하나님 없는 종교 생활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저 인간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교회 생활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아, 내 삶에 전적으로 기도가 없구나. 그리고 기도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말씀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구나.”를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저의 기도를 통해서 고백되게 하옵소서”하고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 삶
오늘 다윗의 고백이 담겨진 이 노래와 시를 통해서 우리가 인정하게 되는 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 없이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A. 생애에 겪은 환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4~5, 16~18)
여기서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의 삶이 문제 없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있었던 많은 환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의 삶을 성경이 소개하는대로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환난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환난에서 건지신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주신 이야기입니다.

B.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는 것은 지겹지 않다!
이런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말해도 지겹지 않습니다. 군대 갔다 온 분들이 군대 이야기 하는 것을 보십시오. 모이면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지요? 군대가 그렇게 달콤한 경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도리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군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힘든 시간이 있었는데 내가 거기서 살아남았다 하는 것입니다. 신자 역시 인생의 환난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그 험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을 나타내셨고 나를 건져내셨다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살게 하셨고, 살게 하실 뿐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복을 부어주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환난과 고통이 알고 보니까, 시간이 지나서 보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신 변장한 축복이요, 은혜더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도무지 지겹지 않고 지겹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결코 성도에게는 지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평생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그는 말하고 또 말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

5. 나의 강함의 비결은 하나님이었다(35, 30, 36; 고후 12:9~10).
다윗의 삶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이라는 인물을 조명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하나는 다윗이 오늘 이 고백시에서 언급했듯이, “나의 강함의 비결은 바로 하나님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35절입니다.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 그는 그저 물맷돌로 싸울 수 있었던 소년이었습니다. 사울의 갑옷을 입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놋활을 당기며 싸우는 자로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셨다고 말합니다. 놋쇠로 만든 활을 어떻게 구부려서 화살을 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놋활은 힘이 장사인 사람들이 팔로만은 안 되고 발을 사용해서 누워서 쏘는 활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다윗은 자기 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훈련시키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셨다! 이게 백전의 용사 다윗이 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는 이어 36절에서 “주의 온유함이 자기를 크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온유함을 스펄전은 주의 선하심, 주의 섭리, 주의 겸손이라고 옳게 설명했습니다. 주님의 온유하심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고 죽었어야 하는 사람인 것은 다윗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신의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참아주셨고, 주의 스스로 낮추시는 겸손이 자신을 여기 이 자리, 놋활을 당기는 자리까지 오게 하였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배우셨습니까? 하나님의 온유하심이 오늘 우리를 이 자리까지 오게 했다고 여러분도 고백하십니까? 그는 이미 30절에서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그는 적군을 향해서 달리고, 성벽을 뛰어넘는 자신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노력의 산물도, 의지의 결과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한 결과라고 그는 이야기합니다. 지금의 나는, 사람들이 강한 용사라고 하는 나의 그 강함은 결코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그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일평생 살고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말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이게 바로 다윗이 오늘 본문에서 하는 고백입니다. 바울 사도가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지만 그의 하나님은 그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이걸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하나님께서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도 이것을 배웠고 바울도 이것을 배웠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무엇을 배우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풍성하고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 주님이 여러분을 오라고 부르실 때에는 오늘 본문과도 같은 여러분 생애를 가장 잘 드러내고 보여주는 노래와 시로 여러분의 고백을 주 앞에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