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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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생애 (7).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희생과 회복(2)

창세기 44:1-3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4-13

말씀내용
야곱이 베냐민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림으로써 야곱 집안의 회복은 가속도가 붙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22년 전의 죄의 문제였습니다. 비록 요셉의 형제들이 첫번째 애굽 방문을 통해서 그 죄와 관련하여 많은 깨달음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할지라도 그 문제 자체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죄의 문제를 인식 그 자체의 수준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성향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죄 문제는 ‘내가 잘못했구나’하는 인식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거짓된 회개는 거짓된 변화를 낳고 피상적 회개는 피상적 변화만을 가져오게 됩니다. 거짓된 변화 속에서 살아왔던 야곱 가족의 지난 날들을 하나님은 고치기를 원하셨고 또 고치셨듯이, 오늘 우리의 모습, 우리 가정의 모습도 하나님은 고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며 또 고치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교훈의 대략입니다.

1. 마지막 테스트(1~13)
형제들이 애굽의 총리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자신들이 정탐군이라는 오해를 풀고 시므온도 다시 보고, 이제 곡식을 사들고 돌아가는 발걸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지난 첫번 애굽 방문 때 집으로 내려가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즐거움과 기쁨이 그들을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기쁨을 성경은 거룩한 기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해결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이 피상적 기쁨 속에 대개 묻혀버리게 마련입니다.

A. 형제들의 귀향길
i. 시므온을 얻은 기쁨과 베냐민을 잃지 않은 기쁨
형제들의 기쁨은 제일 먼저 잃어버릴뻔 했던 형제 시므온을 다시 찾게 되었고 또 베냐민을 잃어버리지 않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깝고 친근하고 화목한 분위기에서 서로가 떠들며 노래하면서 귀향길을 가고 있었을 것이라고 쉽게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ii. 돈을 얻은 기쁨
이 형제들의 피상적 기쁨은 또한 돈을 얻은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전의 거래에서 가지고 왔던 돈을 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43:23). 뿐만 아니라 요셉의 지시는 이번에도 그들이 양식을 사러 가지고 온 돈을 다시 자루에 다 넣어주라는 것이었습니다(44:1). 아마도 지난 번의 거래를 경험 삼아 형제들은 이 두번째 거래에 대하여 영수증을 달라고(돈을 지불했다는) 요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지난 번의 경험에 비추어 출발 후 이내 한 번 자루를 열어보았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거기서 그들이 지난 번과 같이 양식 살 돈이 그대로 자루에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면 그들의 기쁨은 또한 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무상으로 양식을 얻은 것입니다. 시므온을 얻고 베냐민을 잃지 않았으며 그들은 돈까지도 두 배로 얻은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아버지 야곱을 당당하게 대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iii. 자기들의 진실성을 입증받은 기쁨
그러나 무엇보다도 형제들의 마음을 안심하게 해 준 기쁨은 자기들의 진실성을 입증받은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올 때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 두려움이 적어도 지난 애굽 방문 이후의 삶에서 지워지지를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애굽의 총리와 함께 식사를 했고 자신들이 그의 오해처럼 정탐군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모든 문제가 다 깨끗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염려와 걱정은 다 사라졌습니다.

iv. 표면적인 문제의 해결이 진정한 해결이 아니다.
종종 우리 인생에서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모든 두려움, 염려, 긴장이 다 사라지고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모든 문제의 해결일까요? 아니, 어쩌면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이제 진짜 문제를 다루시기 위해서 잠깐 한숨을 돌리는 순간이 아닐까요? 나를 두렵게 하던 일, 나를 염려케 하던 문제가 사라지면 다 해결되는 것일까요? 아니, 나를 두렵게 하고 나를 염려케 하던 그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 표면적인 문제를 통해서 나의 내면의 문제를 보게 하십니다. 내 영혼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표면상의 문제가 사라지면 내면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도 그치고 맙니다. 이제 내면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하는 시간이 시작되는데 말입니다.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 보겠습니다.

B. 깨어진 피상적 만족: 자신들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이 깨어지다.
이제 요셉의 마지막 시험이 형제들에게 주어집니다. 지난 주일에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마는, 요셉이 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가 그리고 마지막까지 이상한 음모를 꾸며서 형제들을 곤경에 빠뜨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편 이것은 요셉의 지나친 복수와 같이 보여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전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칼빈이 주석한 바와 같이, 요셉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지금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을 억제받고 있으며 성령의 지혜로 형제들의 문제를 다루고 테스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형제들의 즐거운 귀향 분위기는 한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요셉의 청지기가 그들을 쫓아온 것입니다. 그가 형제들을 만나서 한 첫 마디는 “너희가 어찌하여 악으로 선을 갚느냐”는 것이었습니다(4~6). 정탐군의 누명을 벗은 그들은 이제 도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푼 애굽의 총리의 소중한 은잔을 훔친 도적이 되고 만 것입니다. 형제들은 너무나 놀라고 당황합니다. 형제들은 자기들의 결백에 대해서 거의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합니다(7~9).
“우리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이런 일은 종들이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적질하리이까? 종들 중 뉘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우리 주의 종이 되리이다.”

형제들의 말은 은잔이 발견된 자는 죽을 것이고, 나머지는 다 종이 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백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C. ‘잔이 발견된 자만 종이 되고 나머지는 돌아가라’
그러나 총리의 청지기의 말은 ‘잔이 발견된 자만 종이 되고 나머지는 돌아가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10). 이제 형제들은 각각 자신들의 자루를 풀고 조사를 시작합니다. 역시 이번에도 청지기는 나이많은 자로부터 시작해서 나이 적은 자의 순서로 자루를 조사를 합니다. 르우벤으로 시작하여 시므온과 레위, 그리로 유다를 지나서 하나씩 하나씩 자루를 조사하면서 찾고 있는 은잔이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은 더욱 커져 갔을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 아홉번째인 잇사갈과 열번째 스불론을 지나지만, 은잔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형제들의 얼굴은 기고만장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베냐민의 자루를 풀 때, 양식과 돈 틈에 툭하고 튀어나오는 은잔을 보는 순간, 베냐민 만이 아니라 모든 형제들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변하고 마음은 얼어붙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경이 설명하는 그들의 반응은 옷을 찢은 것입니다(13).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들의 슬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도 아니고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도무지 그들의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가장 원치 않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순간 그들의 진실함에 대한 확신은 모두 무너져내렸습니다. 베냐민 만이 아니라 그들 모두는 짐을 다시 나귀에 싣고 요셉에게로 돌아옵니다.

형제들의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비록 자신들은 은잔이 아무에게서라도 발견되기만 한다면 그는 죽고 나머지는 모두 종이 되겠다고 공언했지만, 그래도 청지기는 잔이 발견된 자만 종이 되고 나머지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그냥 베냐민을 희생시키고 자신들만이라도 아버지 야곱에게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이미 이들에게는 전과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22년 전에 어쩔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발적인 계획과 의도에 따라서 요셉을 팔았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듯이, 베냐민을 애굽 총리의 손에 맡기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베냐민도 길에서 짐승에게 먹힌 것 같다고 혹은 그가 도둑질을 함으로써 애굽의 총리에게 붙잡히게 되었노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22년 전처럼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형제들의 모습은 마치 자기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형제들의 이런 변화된 태도입니다.

2. 하나님과 죄를 감각하는 형제들(16)

형제들은 모두 함께 총리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꼬여도 꼬일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들의 지도자는 유다입니다.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러 요셉의 앞 땅에 엎드렸습니다(14).

A.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16)
왜 이런 짓을 했느냐고 묻는 총리 앞에, 유다가 입을 엽니다. 유다가 하는 말을 주목하면, 그는 ‘하나님이 자신들의 죄악을 적발하셨다’고 말합니다. 지난 번 애굽의 첫번 방문 때 곤경 속에서 형제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것은 22년 전의 요셉을 판 사건이었습니다(42:21). 그들은 양심의 가책 수준으로 그 일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눈 앞에 있는 표면적인 어려움이 해결되면서 마치 언제 그런 적이 있었냐는 듯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다시 한 번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그 숨겨진 문제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 더욱 분명하게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물론 유다가 하는 말은 직접적으로 은잔을 하나님께서 찾아내셨다는 말이지만, 그러나 형제들은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자기들의 아버지의 하나님, 할아버지의 하나님 그리고 증조부의 하나님께서 계시며 개입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막연한 인식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중요한 각성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 혼자서 어떻게 하는 것인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찾아가셔서 그것은 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손 안에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실 때 느낄 수 있는 어떤 그런 장엄하고 거룩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습니까? 내 인생이 완전히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각성하는 순간 말입니다. 지금 유다가 이어서 하고 있는 말은 바로 그런 깨달음으로부터 나온 말입니다. 그는 “우리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B. “우리가 다 종이 되겠나이다”(16)
여전히 형제들을 대신하여 말을 하는 자는 유다입니다(16). 그는 요셉에게 말하기를,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곤경에 처한 것은 베냐민이지만, 그들은 베냐민을 정죄하거나 비난하는 대신(성경 본문에는 그들이 요셉에게로 돌아오는 길에서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업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베냐민과 함께 공동의 운명을 지고 노예가 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총리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오직 베냐민만 종으로 삼겠다고 하는 요셉의 마음은 여전히 형제들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17).

C. 실패나 깨어짐은 영광의 문이다: 자신감이 산산이 깨어졌을 때, 이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이다.
이 때 형제들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했을지 짐작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결코 지금 이 상태는 행복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총리의 집에서 식사를 잘 하고 이튿날 아침에 고향으로 떠나던 그 순간?바로 그날 오전?과 비교하면 지금 그들이 만난 상황은 빠져나갈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입니다. 사람이 피상적 만족과 즐거움에 빠져서 살아가는 것처럼 그의 영혼에 비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뭔가가 일어나는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 심한 불행과 불만족과 슬픔이나 고통과 함께 일 때가 참 많습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인색하신 의도라기 보다는 우리의 죄성이 그렇게 밖에는 깨닫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의 형제들의 경험을 설명하는 가운데,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는 “이 때가 형제들의 거듭남이 일어난 순간이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어려움을 통해서 그들은 자기들의 영혼을 보기 시작하였고 자기들의 인생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고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실패는 그들 인생에 바꿀 수 없는 축복된 시간이 된 것입니다. 실패 또는 깨어짐은 실로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자신들이 결백하다는 자신감이 산산이 부서졌을 때, 이 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잠시 찰스 콜슨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이미 많은 분들이 읽으셨을 줄 압니다. 제가 권장도서로 소개했던 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강단 뒤에 앉아 설교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내 마음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과거를 표류하였다. 내가 받은 학위들과 훈장들, 재판에서 변호하고 승소한 사건들, 높은 요직에 있으면서 내렸던 중요한 결정들. 내 삶은 한 편의 완벽한 성공 사례였고, 위대한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였다. 그러나 갑자기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이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사용해 오신 것은 나의 성공 때문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 자신의 성공이 이 아침을 이토록 영광스럽게 만드는 원인이 아니었다. 내가 그동안 성취한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니, 내 삶에서 진정한 재산은 전과 자라는 나 자신의 엄청난 실패, 바로 그것이었다. 교도소 복역 경험이라는 나의 커다란 치욕이 하나님께서 나의 생애를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시기 위한 시작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전혀 영광스럽지 못한 경험을 가진 자를 선택하신 것이다. 이 충격적인 진실을 인식함으로써 나는 교도소 예배당에서의 그 짧은 순간에 나의 전 세계가 완전히 뒤집혀졌음을 발견했다. 그동안 내가 삶을 거꾸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삶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내가 찰스 콜슨을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해 온 모든 것을 잃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진정한 자아와 삶의 진정한 목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 위해 무엇을 택하시느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을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바로 우리 자신을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업적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비참한 패배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이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는 역설의 왕국이다. 승리는 패배를 통해 오고, 치유는 상처를 통해 온다. 자아의 발견은 자아를 버림으로써 오는 것이다.”

자신감이 산산이 깨어졌을 때, 이 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는 때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3. 유다의 희생(18~34)
이야기의 절정은 이제 드러납니다. 유다는 총리인 요셉에게 자신들의 사정과 행동의 근거를 아주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A. 말에 대한 진실성을 드러내다(43:9; 44:32)
이것은 사실 당시 요셉의 위치를 감안하고 그들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매우 용감한 행동이었습니다. 유다의 긴 이야기의 호소력의 절정은 30절입니다.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하는 대목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생명은 베냐민의 생명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3). 형제들이 혹은 유다가 이토록 아버지 야곱을 위했던 적이 있었을까요?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유다는 이렇게 행동하고 말함으로써 아버지 야곱 앞에서 했던 말,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43:9)라고 했던 말에 대한 진실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다는 이제까지 아담 이래로 등장했던 창세기에 기록된 많은 남자들이 가지고 있던 비겁한 침묵을 깨뜨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남자의 모습으로 등장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십니까? 그는 두려운 상황 속에서,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리고 혼란 속에서 홀로 말합니다. 그리고 비겁하게 뒤로 숨는 대신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그는 사자처럼 담대합니다.

B. 형제 베냐민을 대신하는 유다의 희생(33)
그 책임을 지고자 하는 말이 바로 33절입니다. 앞서 유다는 은잔이 발견된 범인인 베냐민과 함께 모든 형제들이 공동의 책임을 지고 다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말했지만(16), 이제 유다는 홀로 용감하게 자신만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홀로 종이 되겠노라고 청합니다(33). 어떤 집안에서, 그리고 어떤 형제들이 이렇게 자기 형제를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야곱의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전에 야곱의 집안의 내력과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써 도무지 그렇게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때, 형제가 형제를 팔아넘기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 그들은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아버지 야곱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어놓습니다.

C. 유다의 변화(창 38)
우리가 이 유다라는 인물의 과거를 안다면 더욱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유다는 38장에서 특별하게 한 장에 걸쳐서 그의 인생의 일화가 소개된 바 있습니다. 마치 전체 이야기의 괄호와 같이 나타나는 본문이지만, 사실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37장부터 시작하는 창세기 후반부의 주인공은 요셉과 유다입니다. 요셉이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만큼, 유다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유다 역시 가나안의 죄악된 문화와 풍습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대인관계(친구관계)와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 그리고 그 아들들의 타락상, 며느리에 대한 마땅한 권리를 모르는 채 하는 비겁한 태도, 유다 자신이 창녀를 찾아가는 부끄러운 일, 그리고 결국은 며느리와의 사이에 자식을 낳게 되는 유다의 삶의 부끄러운 흔적들이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바로 창세기 38장입니다. 이 역시 20여년 전의 이야기, 혹은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 있던 동안에 일어난 일입니다. 한 마디로 유다라는 인물은 창세기 38장에 그려진 대로라면 아무 소망을 걸 수 없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런 유다가 지난 20여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하나님은 그 안에서도 일하셨습니다. 그 현저한 증거를 우리는 44장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을 회복시켜 가시는 가운데, 하나님은 그 가정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아무 것도 일어나는 것 같지 않았던 그 시간들도 사실상 하나님의 시간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변화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유다는 하루 아침에 이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서서히 변하고 있었고 어느새 이런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십니다. 천천히, 아무 일도 일어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큰 그림 속에서 작은 것들을 하찮게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셔서 그들을 고치고 계셨던 것입니다.

4. 희생이 가져오는 회복과 화해(reconciliation).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소중한 복음의 진리를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A. 희생 없이 화해와 회복은 없습니다.
희생이 없이는 화해와 회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진수에 해당하는 진술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없이는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가 살 길이 없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는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케 되었습니다. 댓가없이 이루어지는 화해와 회복은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의 관계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단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인간과 인간 사이에 원수되었던 것을 해결하고 서로 화목하도록 화해가 일어나게 하시는 일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써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유다의 희생의 이야기, 즉 자기 생명으로 베냐민의 생명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은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조상으로서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유다의 이런 희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를 이제 성경은 다음 장에서 밝혀줍니다. 이제 모든 테스트는 끝났습니다. 요셉은 유다의 이런 희생 앞에서 드디어 자신의 정체를 밝히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애굽 총리 요셉의 정체를 밝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짧게는 지나간 22년 동안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의 배후에 숨어서 어떻게 일해오셨는지, 한 번도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라는 거대한 그림을 맞추고 계셨는지를 보게 되는 자리로 인도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창조로부터 역사의 마지막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까지를 한 눈에 보게 하는 사건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드디어 우리는 구속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B. 피상적인 문제 해결로 실상을 덮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중요한 또 하나의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피상적인 문제의 해결로 실상을 덮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지식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는 종종 눈 앞의 문제가 해결되면 모든 게 다 됐다는 식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때가 바로 시작임을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이 지식입니다. 피상적인 문제해결로 인한 즐거움은 순간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눈 앞의 문제를 통해서 내면의 문제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감추어진 것,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부분, 그리고 영영 묻어두고 싶은 것을 파헤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해결되어야 진정한 회복,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눈 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여러분의 기도의 제목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문제를 인하여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깊은 곳에서 다루고 싶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 과정이 다소 고통스럽더라도 이 과정을 통해서 나를 온전히 보게 하시고 나를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은혜의 자리로 데려가 주시도록 구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문제를 주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을 이렇게 고치셨듯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 자신들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시는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C. 실패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낭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에서 나타난 형제들에게 그들의 자신감, 확신이 깨어지는 실패는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실패는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실패는 내 자존심이 깨지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이고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시간입니다.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없다면 그리고 영적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그 실패를 낭비하시는 것입니다. 실패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D.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오늘 이 말씀 속에 유다라는 인물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에게라면, 적어도 창세기 38장의 이야기를 읽어본 사람 중 누가 기대를 걸겠습니까? 유다라는 인물의 됨됨이를 자세히 보여주는 38장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이 애굽에서 고생하던 그 많은 날동안, 애굽에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헤브론에서 야곱의 집안에 계시면서 야곱을, 그리고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인물 유다를 만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향하여 한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을 변화시키시면서 그 일을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자신은 아무 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잖아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최상을 것을, 최상의 때에 주시고자 그 은혜를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비록 오늘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이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오늘 주께서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함께 하시며 또 여러분과 관련된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들의 삶 가운데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요셉의 이야기 혹 야곱 가정의 이야기는 우리가 읽듯이 금방 일어난 일이 아님을 기억합시다. 그것은 수십년에 걸친 변화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도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이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