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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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생애 (6).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희생과 회복(1)

창세기 43:1-3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4-06

말씀내용
지난 주 우리는 야곱 가정의 깨어지고 상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서서히 고치기 시작하시는 조짐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평안한 시절을 살아가던 동안에 일어난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깨어진 가정을 고치시기 위해서 대흉년을 사용하셨고, 야곱은 양식을 얻기 위해서 애굽으로 아들들을 보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고 이로써 하나님은 22년 전에 형들에게 팔려갔던 요셉 앞에 그 형들을 세우시는 놀라운 상황을 만들어가십니다. 그러나 깨어진 가정의 회복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22년 전의 죄를 찾아내시고 그것을 다루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에 걸쳐서 상고할 43장과 44장은 이제 하나님께서 야곱 가정을 회복시키시는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회복은 희생을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도무지 회복될 수 없다고 포기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형제와 형제 사이의 불화, 아비와 아들들 사이의 불화가 놀라운 회복과 화해의 국면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1. 불편한 배부름이 끝나갈 때(43:1): 우리는 치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과정이 결코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많은 경우, 회복이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하고 화해가 필요한 사람과 가정들이 자발적으로 그것을 필요로 하고 스스로 원해서 그 과정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경우는 매우 적습니다. 정말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가 아니면 고장나고 깨어지고 망가졌어도 ‘날 그냥 내버려둬’라고 하면서 살아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치려고 찾아오시는 과정이 대개가 고통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야곱은 이미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야곱이나 야곱의 아들들은 비록 애굽에 감금당해 있을 시므온에 대한 생각을 하곤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하루 하루를 ‘관망하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시는 애굽으로 가지 않아도 되겠지라고 생각을 하고 애굽에 대해서는 잊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편한 배부름을 끝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찾아옵니다. 그들의 기대처럼 흉년이 끝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다시 양식은 떨어졌고, 원튼 원치 않든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보십시오.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구원과 회복과 치유를 피하고 싶어하는가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닙니까? 야곱의 인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을 찾아야만 했던 급박한 상황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이 야곱을 찾으신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결코 막판까지 밀리기까지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만나시기 위해서 야곱의 인생을 막판까지 몰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든 사람들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번의 구원 사건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깨어진 형상을 회복시키시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이 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냥 나 구원받았다’하고 만족하고 그전에 살던 자리, 익숙한 자리에 그냥 머무르려고 하는 관성을 가지고 사는데 이것이 죄성입니다. 예수믿은 사람, 거듭난 사람 안에도 이런 성향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제 시작인데, 많은 사람들은 달음질을 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달음질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가 정말 시작은 한 사람인지를 확인할 길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과연 나는 시작은 된 사람인가? 내 안에 꺼지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과연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그 갈망에 나를 복종시키고 정말 하나님이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시는 역사를 하시도록 나를 드리고 있는가?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그 길이 좀 힘들고 어려워보여도 나는 그 길을 가고자 하는가? 그리고 그 길을 걸어왔는가? 이것이 우리가 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에서 뭔가를 막으시고, 꺽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만드시려고 찾아오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옳습니다. 불편한 배부름이 끝나가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흉년이 끝나서 양식을 얻게 되고 애굽으로 가야할 일이 없었다면, 야곱의 가정의 불편한 배부름은 그저 편안한 배부름으로 바뀌었을 것이고, 그들은 그냥 그렇게 깨어진 가정의 아픔을 안고서 살아가야만 했을 것이고, 시므온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시간과 함께 사라져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 그들의 인생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을 보는 것은 정말 숨막히도록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편애하는 아버지 야곱과 더불어, 요셉의 그 못된 형제들을 구원하시고 치유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만드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여러분 자신에게는 물론, 아무에게도 함부로 소망이 없다고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럴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2. 유다의 말(43:9)?유다의 말이 혼돈 속에 질서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다시 애굽으로 가라고 말합니다(43:2). 유다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한 번 아버지에게 자신들이 지금 왜 시므온이 감금되어 있음에도 애굽으로 가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베냐민을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지겨워 졌을 법한 대화가 또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야곱은 ‘왜 너희가 베냐민의 존재를 그에게 알려가지고…’하는 식으로 말합니다. 발끈한 형제들은 자기들이 쓸데없이 그 애굽의 총리에게 말을 많이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님을 항변합니다(43:7). 유다가 다시 말합니다. “아버지와 우리 아들들 그리고 그 자식들 이렇게 삼대가 이제 살 수 있는 길은 베냐민을 우리와 함께 보내는 것입니다. 내가 베냐민의 몸을 담보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43:8,9). 우리는 어느새 장자인 르우벤이 아니라 유다가 형제들 모두를 대신하여 나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분명히 43장부터 유다의 리더십과 장자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유다의 말은 르우벤과는 달리 설득력이 있었고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도 더 이상은 말하기를 원치 않았고 더우기 아무런 책임도 지기를 원치 않았던 상황 속에서 네번째 아들인 유다는 형제들 앞에 나서서 자기가 베냐민을 담보하겠다고 아버지 야곱에게 말합니다. 유다는 자기 생명으로 베냐민의 생명을 대신하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합니다. 이것은 자기 생명으로 베냐민의 생명을 대신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는 여기서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이 말은 놀랍게도 아버지 야곱의 마음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연명해오던 이 야곱의 집안에 유다가 던진 말은 질서를 가져오기 시작했고, 아버지 야곱의 마음의 결단을 가져오는 어떤 계기가 됩니다.

유다의 말 하나를 더 주목해보면, 유다는 43:10에서 지체하지 않았더라면 두 번은 더 다녀왔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애굽의 수도가 멤피스(Memphis)였고, 야곱 집안이 가나안의 헤브론에 살고 있었다면, 거리는 약 250 miles 이고 당시의 여행으로는 약 3주 정도 걸리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유다가 두 번은 더 다녀왔겠다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왕복으로 계산해서 보면 적어도 그들이 첫 방문에서 애굽을 떠난지 15주 이상 그러니까 4개월 이상이 지난 것으로 보입니다.

3. 야곱의 순종적 희생(43:11~14)
야곱은 유다의 말에 대해서 놀라운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단 가나안의 소산을 그 총리에게 줄 예물로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그것들은 유향, 꿀, 향품, 몰약, 비자(피스타치오) 그리고 파단행(아몬드)입니다. 돈은 그전에 가지고 온 것을 그대로 가지고 가고, 또 곡식을 살 돈을 더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베냐민도 자기 품에서 내려놓습니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43:13,14).

단지 유다의 말 한 마디에 야곱의 마음이 갑작스럽게 변했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야곱은 지난 4개월 이상을 결코 마음 편히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그랬을 것입니다. 아들들과 모든 가족들은 자기만 쳐다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했고 그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시는 아마도 마지막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도 주셨던 것인데, 바로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것,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내 손에 맡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보낸 지난 4개월은 하나님과 계속 씨름해야 했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그가 불편한 배부름 속에서 살아가는 것 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어찌 우리 속을 다 알겠습니까? 문제는 누가 아느냐가 아니라, 내가 진짜 씨름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내게 바라시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놓치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부분 아닙니까?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던 상황처럼 당장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야곱도 할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분명히 들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자식을 포기하는 것, 아니 자기의 손에서 하나님의 손에로 옮겨드리는 것이 그토록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거기로 몰아 오셨습니다. 적어도 지난 4개월 동안은 늙은 야곱에게 있어서 인생에 가장 어려운 시간이 되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때는 왔고, 야곱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런 과정을 주십니다. 무턱대고 어느 순간 확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시고 또 생각하게 하시고 씨름하게 하시는 시간을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4개월이 그냥 4개월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적으로 불편한 양심을 안고 사는 것은 위험한 시간이라고 말씀드립니다. 거듭난 사람에게 불편한 양심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던 대로,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자하는 나의 성향과 본성에 나를 맡기고 살아갈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이것이 매우 위험한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 불편함이 여러분에게 적응이 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래서 더 이상 불편함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망의 길로 들어선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필경 그 길은 교회를 다니고 있으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하고 안심할 수 있는 길이 아니며 결국은 천국을 유업으로 얻을 보장이 없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거듭남과 구원의 확신을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순종을 통해서 가장 잘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결국은 여러분은 자신을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분명하게 드러난 뜻 앞에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 본문에서 야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베냐민은 누구입니까, 무엇입니까? 자식입니까? 배우자입니까? 대우받고 인정받는 것입니까? 성공하는 것입니까? 자존심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지 마십시오. 거듭난 사람은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압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불편한 양심을 느끼는 부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상태로 시간을 지체하면서 살지 마십시오.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양식이 다하게 하심으로 결국은 그 결정의 시간을 정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정말 주의 은혜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 마지막 남은 그 하나를 주 앞에 내려놓습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한 가지 야곱의 말 속에 있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세겜의 사건으로 인하여 자기와 모든 식구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있을 때, 벧엘로 올라가서 만났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다급해진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그 하나님, 자기의 생명과 모든 식구의 생명을 보전해주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의 생명을 맡기는 것이다. 베냐민이 살아돌아오기를 바라지만, 그는 하나님께 그의 생명의 처분을 완전하게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 서기를 바라는 야곱의 신앙은 어느 새 놀라운 정상으로 올라와 있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마치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닌 야곱이 말입니다.

사실 여기서 우리가 희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자기 아들, 그것도 독생자를 하나님께 희생해서 드린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독생성자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희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런 희생도 드린 것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릴 뿐입니다. 다시 한 번 인용하고 싶습니다. C.T.스터드의 말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분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어떤 희생도 희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욥이 말했듯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내 가진 것 중 아무 것도 없는 것이고, 또 하나님께 내가 드린다, 희생한다고 하는 것은 실상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히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4. 22년 만의 만찬(43:16~34)
A. 두려움이 물러가고(16~25)
요셉의 형제들은 이제 애굽으로 다시 내려가서 요셉에게 오게 됩니다. 베냐민과 함께 온 형제들의 모습을 아마도 멀리서 알아본 요셉은 청지기에게 지시하여 그들을 자기의 집으로 들이고 짐승을 잡고 오찬을 함께 할 수 있도록 잔치를 준비하게 합니다. 그래서 청지기는 멀리 서 있는 요셉의 형제들을 요셉의 집으로 오도록 안내합니다. 안내를 받아 총리의 집 문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형제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43:18).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지난 번 돈의 일로 노예로 잡히는 모양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집 문 앞에서 기다리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두려움에 땀을 쥔 긴 시간었겠습니까? 요셉의 형제들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요셉의 청지기가 보이자, 그 문 앞에 청지기에게 다가가 지난 번 자기들의 자루에서 발견된 돈의 일에 대하여 말을 꺼냅니다(43:20~22). 청지기는 그 돈으로 인하여 두려워 말고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시므온을 그들에게 이끌어냅니다. 이어서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해들이고 발씻을 물을 주고 나귀에게 먹이를 줍니다. 그리고는 총리와 함께 오찬을 같이 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일련의 행동들은 비록 영문을 알 수는 없었어도 요셉의 형제들의 두려움을 완전하게 씻어내 주었을 것입니다. 이제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기다리면서 예물을 정돈합니다.

B. 계시의 성취(26)
이제 요셉이 나타나자 그 형제 11명은 모두 요셉의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이것은 요셉이 22년 전에 꾸었던 꿈, 곧 하나님의 계시의 완전한 성취였습니다. 첫번째 꿈은 형들의 곡식단이 일어서서 절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미 이전의 만남에서 이루어졌지만, 이제 열 한 별의 절하는 것은 이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상 해와 달이 절했다는 것은 아버지 야곱의 온 집이 후에 애굽으로 내려와서 총리인 요셉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C. 의미를 모르고 즐거워하는 형제들의 만찬(27~34)
요셉은 형제들에게 아비의 안부를 묻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한 배 동생인 베냐민을 보고 요셉은 그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는 요셉은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웁니다. 아마도 많이 운 것 같습니다. 그는 얼굴을 씻고 다시 나와서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게 합니다.

요셉은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는 보통의 애굽인들이 그렇게 하듯이 자신의 식탁을 형제들과 구별하고 형제들의 상을 베푸는데, 그 장유의 순서대로 앉힙니다. 형제들은 이런 놀라운 일을 그저 놀라서 바라만 보고 이상히 여길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요셉은 형제들을 한 번 더 테스트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베냐민에게 다른 형제들의 다섯 배의 음식을 줍니다. 이것은 아마도 형제들의 시기에 대한 테스트였을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오기 전, 아버지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아들이었습니다. 그 편애는 형들의 시기를 사게 되었고 결국 형들은 요셉을 죽이고자 하였으며 애굽으로 팔게 되었습니다. 이제 요셉은 아마도 아버지 야곱에게 자기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을 베냐민을 향해서 그런 애정을 보임으로써 형제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분명하게 요셉이 이 일로 형제들을 시험하고 있었다라고 밝히고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렇게 단언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전체적인 맥락이 요셉이 자신을 아직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형들의 온전한 회개와 온전한 관계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이런 해석이 무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베냐민에게 특별한 시기의 안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 만찬은 무려 22년 만에 처음으로 모든 형제들이 앉아서 먹는 식사자리입니다. 그러나 요셉을 제외한 모든 형제들은 이것이 그런 의미인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앞에 앉은 총리가 누구인지 그 정체를 전혀 알지 못하고 누리는 잔치의 기쁨은 마치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아직도 요셉의 원수된 관계가 참된 형제요,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회복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베푸는 이 친절과 환대 그리고 잔치상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그들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관계없이 베푸시는 일반적인 은혜(common grace)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마치 요셉의 식탁에 앉아 즐거워하는 형제들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하나님께 감사치도 않지만, 그들은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의 식탁에 앉아서 그 혜택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5. 교훈
물론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말 중요한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께서 야곱의 깨어진 가정과 깨어진 사람들 하나 하나를 회복시키고 그 관계를 화목케 하시기 위해서 다루셔야 할 중요한 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명한 교훈이 있습니다.

A. 우리에게도 요셉의 형제들의 만찬이 있었음을 기억하라.
우리가 다 요셉의 형제들이 누렸던 만찬을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자들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온갖 은혜를 베풀어주셨기에 우리는 인생을 누릴 수 있었고 주님을 만나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죄인들을 잔치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없었던들 우리는 이 자리까지 결코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은혜를 감사치도 아니하고 자기가 잘난 줄 알고 누리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두려움에 떨던 요셉의 형제들은 어느새 긴장이 풀어지고 즐겁게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모든 축복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형제들에게 그랬듯이 말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그들이 총리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그들에게 임할 수 있는 것이고, 진정한 용서가 일어나야만 있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B. 말을 하십시오.
유다의 말이 오늘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우리는 보았습니다. 사실 이 아들 많은 집의 모든 남자들은 참 말이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창조적인 말은 그 집안의 모든 무책임함과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태도, 그런 분위기로 인하여 도무지 어떤 질서를 발견할 수 없는 혼돈 속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내 생명으로 베냐민의 생명을 대신하겠다’는 유다의 말은 이전에 베냐민이 돌아오지 못하면 자기 두 아들을 죽이라고 말했던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르우벤의 말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유다의 말은 책임을 지는 말이었습니다.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데 네째 아들인 유다는 책임을 지겠다고 합니다. 유다의 말은 그렇기에 힘이 있었습니다. 그의 희생적 각오의 말은 아버지 야곱의 마음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동안 이 문제를 안고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던 야곱의 마음에 결단적 영향을 준 것은 아마도 유다의 희생적 각오의 말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습니다.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말과 같이 혼돈 속에 창조적 질서를 가져오고, 무책임한 분위기 속에서 책임을 감당하는 영향력있는 말은 적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같이 말하는 은혜를 주시도록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말 한 마디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로 사람을 살리십시오. 사람을 격려하십시오. 축복하십시오. 위로하십시오.

C. 야곱의 희생은 깨어진 가정의 회복의 도화선이 되다.
야곱의 희생은 깨어진 가정을 회복하는데 중요한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가정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개개인의 삶을 다루지 않으시면서 하지 않으십니다. 야곱 한 사람을 오래도록 빚어오셨던 하나님은 이제 그에게서 그의 가장 연약한 한 부분, 어쩌면 남아있는 마지막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을 다루십니다. 베냐민입니다. 결국 야곱은 베냐민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야곱의 믿음의 절정입니다. 여러분이 여전히 붙잡고 있는 것,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못하는 것, 하나님께 맡기면 어떻게 하실까봐 겁이 나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여러분의 손에 있는 것 보다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편이 더 안전하고 더 복되며 더 보장된 길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여러분의 신뢰는 지금 혹시 어디에 걸려있는 것 아닙니까? 언제까지 붙잡고 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사람의 편안함에 대해서 아십니까? 하나님의 야곱의 희생을 통해서 4개월 여 동안 지체되던 그 가정의 회복의 여정에 속도를 더하셨습니다.

D. 막판으로 가기 전에 영혼의 여정을 시작하라.
여러분, 우리는 결코 자발적으로 우리의 영적 여정을 정직하게 시작하려고 하지 않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판까지 밀리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의 영적 여정을 미루지 마십시오. 불편한 양심으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마십시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을 고치시고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선한 형상을 이루시는 은혜를 기대하고 경험하십시오. 경건한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은혜를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