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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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생애 (5).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치유의 고통

창세기 42:1-3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3-30

말씀내용
1. 회복의 여정이 시작되다.
이제 본문은 오래도록 망가져있는 야곱의 집안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치유하시는지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깨어진 가정이 이제 서서히 치유와 회복의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눈치챌 수 있는 방식으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본문은 하나님께서 등장인물들 모두를 각각 다루시면서 야곱의 온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그 등장인물들은 요셉과 형제들 그리고 그들의 아비 야곱입니다.

2. 무책임한 남자들의 이야기(1)
애굽과 주변의 국가들에 드디어 7년간의 대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흉년으로 인한 고난은 가나안에 살던 야곱의 집안에도 고통을 안겨주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전체 이야기에서 야곱과 그의 열 한 아들 즉 야곱 집안과 20여년 전에 잃어버린 아들 요셉과의 만남은 이 거대한 흉년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대사건들을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길러가시는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이 너무나 광대한 그림을 어떻게 요셉과 야곱 그리고 그 형제들이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남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요셉을 제외한 남자들 즉 야곱과 그의 열 한 아들은 모두 비겁하고 무책임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온 집안이 굶주리게 되었지만, 누구 하나 먼저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특징은 모두가 수동적이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아버지 야곱이 입을 엽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1) 그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관망하는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남자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아담도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현장에서 침묵을 지키며 관망만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자기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이고 왕이 자기 아내를 데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비겁하게 관망만 했습니다. 야곱도 자기 딸이 겁탈을 당한 상황에서 관망했습니다. 이제 그의 아들들이 똑같이 행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후손들인 많은 남자들이 물려받은 무책임하고 비겁하며 수동적인 죄성의 단면입니다.

3. 야곱의 집을 떠나지 않는 두려움1(4)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에 곡식이 있다고 하니 가서 곡식을 사오라고 지시합니다(2). 그러나 야곱은 요셉의 아우 베냐민만은 형들과 함께 애굽에 가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밝히는 이유는 야곱이 베냐민을 잃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4). 우리는 이미 지난 야곱의 생애 시리즈에서 살펴본 바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 야곱에게 있어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이 때까지도 있었습니다. 그는 베냐민에게 집착하고 살았습니다. 베냐민은 잃어버린(죽은) 요셉의 대신이었고, 또 자기가 집착하고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혈육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서 그가 사랑하고 집착하는 이들을 빼앗아가셨습니다. 그는 빼앗길 때마다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에게 집착해 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아가실 것이 두려웠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혹시 이런 두려움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다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로부터 풀려나기 까지는 이런 두려움이 믿음과 함께 동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그 문제를 다루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의 그 문제도 다루시고야 마십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야곱의 열 아들(요셉의 형들)에게도 떠나지 않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공모한 은폐한 죄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며 견뎌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것들을 드러내시고 다루실 것입니다. 심판하고 벌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4. 계시의 성취(6,9)
요셉의 형들은 드디어 애굽에 도착해서 특별히 총리인 요셉의 앞에 오게 되고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6). 요셉은 이미 옛일들 즉, 자기의 모든 고난과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었었는데, 와서 땅에 엎드려 절하는 이들이 형들임을 알아보는 순간 옛 꿈을 기억해냅니다(9). 여러분, 자기 앞에 엎드려 절하는 형들을 대하면서 요셉이 옛날에 꾼 꿈을 기억했을 때 요셉의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꿈을 통해서 자기에게 계시하셨던 하나님, 인간은 잊어버려도 결코 일점 일획의 계시도 그냥 무위로 돌리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반드시 당신의 뜻을 성취하고야 마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율과 같은 것이 요셉의 뼈 속에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잠 16:4). 심지어 악한 일 조차도 말입니다. 우리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야 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하는 일이 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하시고 목적하시는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참 성도들의 삶에 얼마나 큰 위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비록 지금 내가 처해있는 모습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그리고 내 안에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내려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5. 진실성 테스트(15-16,19-20): 도덕 규범과 그 방법에 대한 집착, 신실성 및 정직성 따위의 가치에 대한 비타협적인 집착, 그리고 속임수나 인위적인 것을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웹스터). 진실성은 인격(character)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요셉이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요셉이 정직하지 않게 행한 것이라고 비난을 할 수 있습니다마는, 요셉이 이렇게 행동을 하는 이면에는 사실상 하나님의 행동이 숨겨져 있다고 읽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당장 요셉이 자신을 드러내고 형들은 두려워떨고 그 권위 앞에서 자기들의 옛 잘못을 뉘우치고 그렇게 가는 것이 야곱의 온 집안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셉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대로 일일이 그렇게 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단지, 요셉은 그 때 자기의 지혜를 따라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고생의 떡을 먹게 합니다.

요셉은 자기의 옛 꿈을 기억함과 동시에(이것은 하나님께서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형들을 ‘애굽을 탐지하러 온 스파이들’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회복의 여정에, 또는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가시는 여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진실성 테스트(integrity check)였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하는 형들의 가족 이야기를 들은 요셉은 진실함을 증명하라고 엄히 말합니다(15). 물론 형들의 설명은 옳은 것이었습니다(10~11, 13). 그러나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 있다는 것을 요셉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없어진 열 한 번째 아들’ 그들의 형제 요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13). 요셉은 형들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을 따라오지 않은 열 두번째 아들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명합니다(15). 처음에 요셉이 제시한 것은 형제들 중 한 명이 돌아가서 말째 아들 베냐민을 데리고 오고 나머지는 갇혀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16). 그래서 진실을 확인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제들은 삼일을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오래 가둘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양식이 없어서 주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다시 제안하기를, 한 사람이 남고 나머지는 양식을 가지고 돌아가 일단 주림을 면하고나서 말째 아우를 데리고 와 진실함을 보이라고 말합니다(18~20).

여러분, 저는 여기서 잠깐만 본문의 옆으로 나가보려고 합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직접적으로는아니지만,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생각할 때 이 진실성 테스트와 관련하여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때이든지 꼭 한 번은 하시는게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실성 테스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지도자를 세우실 때 반드시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도들을 만들어가실 때 반드시 하시는 일입니다. 이 테스트를 낙방하게 되면 비록 지도자처럼 행세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고, 또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 그는 이 진실성 테스트를 통과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웹스터 사전은 ‘진실성’(integrity)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도덕 규범과 그 방법에 대한 집착, 신실성 및 정직성 따위의 가치에 대한 비타협적인 집착, 그리고 속임수나 인위적인 것을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성은 인격(character)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진실성 테스트는 하나님의 사람의 내적 확신이 얼마나 지속적일 수 있는가를 도전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피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는 내적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일 수 없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도전이 올 때 그 도전을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실성을 테스트하고자 하실 때, 많은 방편들이 사용됩니다. 때로는 가치관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사단을 통해서 돈이나 기타 여러가지 빠질 수 있는 유혹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또는 사역에 대한 갈등으로 오기도 하고, 열려진 두 개의 기회, 혹은 두 갈래 길을 통해서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리는지를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핍박과 사역의 어려움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과정 속에서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성을 유지하고 자신의 신앙에 따르는 원칙과 가치관과 철학을 소중히 지켜내는지를 보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관성있게 지켜내는 자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일관성있는 분이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우리에게 동일하신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A. 기억 그리고 갈등(21-22): 회개하지 않은 죄와 죄책의 문제
드디어 형제들은 자기들 안에 숨겨진 진실을 기억하고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지난 20여년 동안 아마 아무도 그 때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위기 속에서 그들은 그 때 일을 기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서 뭔가를 시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자기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죄였지만, 그 20년 전의 죄가 범인들을 찾아낸 것입니다. 지금 요셉은 그들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습니다. 비록 형제들은 자기들의 말을 애굽의 총리가 알아들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B. 르우벤의 비난
장자인 르우벤은 나머지 형제들을 비난합니다(22).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하면서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죄의 값을 치르게 되었다고 형제들을 비난합니다. 비록 르우벤은 사건 현장에서 그렇게 말을 했었지만, 자기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르우벤은 야곱가의 사람으로서 비겁하고 책임질 줄 모르는 남자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6. 요셉의 괴로움(24): 시험하는 요셉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요셉의 마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하는 모든 말들을 들을 때, 감정을 다스리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교차했겠습니까? 혼자서 보낸 수많은 세월을 생각했을 것이고, 또 형들이 자기들의 옛 죄를 기억하고 그들 스스로 고백하는 것을 보면서 요셉은 자기의 감정을 가눌 수가 없어 방으로 들어가 울어야 했습니다.
잠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그러나 요셉은 마음이 약해지지 않고 형제들을 엄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7. 2차 테스트(24-25): 형제 사랑
형들에게 돌아온 요셉은 시므온을 그들 앞에서 지목하여 결박하고 형들에게 구입한 곡물을 가지고 돌아가게 합니다. 아마도 요셉이 시므온을 지목한 것은 르우벤이 자기를 살리려고 애쓴 것에 대한 고려 그리고 둘째 아들인 시므온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요셉은 형제들을 보내면서 자기의 종에게 형제들이 가져온 돈을 다시 자루에 넣어주라고 명합니다. 거기에 길 양식까지도 더 주라고 합니다. 요셉이 어떤 의도에서 이렇게 했던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성경이 분명하게 그 이유를 써주지 않았기 때문에 학자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마는, 일차적으로 요셉이 형제들에게 가진 긍휼한 마음은 너그러움으로 나타났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돈 외에도 길 양식까지 제공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었겠습니까? 요셉은 여전히 아직도 완전하게 다루어지지 않은 그들의 진실성 테스트의 일환으로써 두번째 테스트를 주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은 은 이십 개에 자기를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형제의 생명보다 은 이십 개가 더 나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시므온을 결박하면서 요셉은 형제들이 서로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시험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 단지 말째 아우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오는 길은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말째 아우를 데리고 와야 한다면 그리고 인질로 잡혀있는 시므온을 찾으러 와야 한다면, 그들은 자칫 돈을 훔친 범죄자로서 와야 하는 부담을 안아야만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서 형제들은 위험을 무릅쓸 것인가가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고자 하는 핵심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성경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은 이 일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8. 야곱의 집을 떠나지 않는 두려움2(35): 르우벤의 극단(37)
결국 돌아가는 길에서 이 사실을 발견한 형제들은 두려워서 떨며 말합니다(28).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이것은 매우 놀라운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형제들이 처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위기 속에서 예민해진 그들의 양심은 이제 숨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조금씩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의 깨어진 가정 가운데 서서히 등장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하나님의 회복하시는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한편 하나님이 가까이 와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가운 징조였습니다.

가나안에 돌아온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상세히 고합니다(29~35). 이제 두려움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도 임합니다(35). 그렇잖아도 베냐민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야곱에게는 너무나도 힘겨운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온 것입니다. 베냐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므온을 포기할 것인가? 혹시 시므온을 찾으려다가 자식들을 다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을 것인가? 하나님은 포기하지 못하고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야곱을 조금 더 압박해오십니다. 드디어 야곱은 자식들을 비난하면서 말합니다.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36)

야곱은 아직까지도 요셉을 잃어버리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열 아들들에게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야곱이 알고 있는 바, 아들들의 거짓말대로라면 요셉을 잃어버린 것은 결코 그 아들들의 잘못일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야곱은 그 아들들이 요셉으로 부족해서 시므온과 베냐민까지 빼앗아가려 한다고 비난합니다. 야곱은 비록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살아왔지만, 그 안에 정리되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남아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야곱의 이 부분을 다루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야곱은 여전히 아담의 후손으로서 그 비겁함과 무책임함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장자인 르우벤이 다시 말합니다(37).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37)
르우벤의 만용에 가까운 이런 극단적인 제안은 아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야곱은 마음을 정했습니다.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38).
그는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서 베냐민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열 아들도 필요없고 오직 한 아들 베냐민만이 그에게는 위로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9. 그리스도의 그림자, 요셉
오늘 이 본문에서도 요셉은 놀라울 정도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A. 죄를 찾아내시는 그리스도: 22년 전의 죄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원과 평강과 은혜를 베푸시기 전에 그리스도는 죄를 먼저 찾아내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신 주님은 그녀가 바라는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 그녀의 죄를 먼저 다루셔야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형들의 죄를 찾아내십니다. 죄를 찾아내서 다루지 않고서는 그들에게 참된 회복과 치유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요셉은 그런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요셉은 그래서 형들을 엄한 태도로(7) 대하는 것입니다. 20여년 전, 정확하게는 22년 전(45:11에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남았다고 할 때와 이 시점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볼 때)의 죄악을 찾아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본문에는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시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죄를 찾아내시는 분이십니다.

B. 죄책을 제거하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찾아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도 바로 그리스도십니다. 단지 우리를 고발하기 위해서,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찾아내시고 그 죄를 스스로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의 죄와 죄책을 다 제거해주시기 위해서 우리 죄를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지금 형제들의 죄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형제들을 정죄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진정한 용서를 위해서, 그리고 깨어진 가정의 회복과 치유를 위해서 그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죄인됨을 깨달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자마다 하나님은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를 자기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0.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A. 죄책이 제거되지 않는 평안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깨어진 자아와 가정과 교회들을 치유해주시고 회복하게 해주시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물론 오늘 이 짧은 본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의 깨어진 가정이 그리고 깨어진 개개인들의 모습들이 회복되고 치유되는 결말을 보지는 못합니다마는, 그 치유와 회복의 긴 여정이 여기서 뭔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그 여정의 시작에는 반드시 치유의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이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면 된다는 회복의 지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망가짐과 깨어짐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죄의 문제를 다루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고통인 것입니다.

오늘날 싸구려 심리학과 신학은 저마다 행복한 가정의 회복, 부부관계의 회복 또는 자아의 회복에 대해서 각종 세미나와 프로그램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마는, 정말 그렇게 해서 회복이 되는 것입니까? 그런 세미나에 등록하면 해결이 될까요? 저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무익하다고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유익한 원리들을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프로그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해입니다. 세미나에 등록한다고 문제를 해결하고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그야말로 긴 여정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의 죄를 다루시는 것이 없이는 결코 진행될 수 없는 과정이라는 점을 과소평가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프로그램들이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자신의 더러움을 인식하게 만듦으로써 치유의 고통을 통하지 않은 채, 그저 몇 가지 적용할 원리들만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한 마디로 싸구려 심리학과 신학에 불과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 가운데 혹시 묻어놓고 살아온 죄는 없습니까? 아무리 나 혼자 밖에는 아는 이 없는 죄악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오래되서 내 기억 속에서 조차 잊어버린 죄악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눈에서 피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 죄를 찾아내고야 마신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성 어거스틴이 예수님을 만난 후, 참회록을 쓸 때에 그가 어린 시절 심지어는 자기 어머니의 젖을 물던 때의 죄까지도 찾아내고 기억해서 회개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이 진리를 가슴으로 알았던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하나님을 알았던 만큼 그리고 자기를 아는 만큼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죄는 죄책감을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죄책감을 가진 상태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바르게 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남겨진 죄들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없게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도의 구원을 이렇게 놀랍게 선언한 것입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죄책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마음에 믿는 자마다 하나님은 정죄치 않으십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의 추악한 죄악들과 그 모든 죄책을 짊어지고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참된 치유와 회복의 여정은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서는 시작될 수 없습니다.

B.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이 그리시는 큰 그림을 보는 것이 믿음이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요셉의 생애 전체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리고 계시는 큰 그림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인생과 우리와 엮여지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다른 인생들을 바라보면서, 나의 좁은 안목으로 그리고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이 큰 그림 속에서 하고 계시는 일을 보도록 우리를 인도해줍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여러분 인생에서 일어났고 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여전히 자기 중심적으로 이해하고 바라보고 해석하면서 살아가고 계시다면 아직도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을 포함하여 그 복잡하고 쉽지 않은 관계들 속에서 그리고 사건들 속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구하십시오. 물론 우리는 모든 것을 마치 요셉의 이야기의 결론을 알고 보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문제들을 다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스토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주변을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그리고 절망할 상황 속에서도 소망 가운데 기뻐하며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와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가정 혹은 자녀들, 여러분의 교회 그리고 여러분이 속해 계시는 모든 관계와 환경들을 다루시고자 하시며, 치유와 회복의 여정으로 이끌어가시고 싶어하신다고 느끼십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지금 어떤 어려움을 느끼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전에 없이 여러분의 내면을 바라보는 고통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안에 죄의 뿌리를 가지고 나타나는 어떤 것을 다루라고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마치 요셉이 형들을 압박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요즘에 여러분을 압박하시는 것처럼 느끼시는 부분은 없으십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은 혹시 전에 없이 어떤 두려움 같은 것에 몰리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모든 상황을 다 한 가지로 볼 수는 없지만, 그 상황이 혹시 하나님이 내게 더 가까이 찾아오시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내려놓아야 할 어떤 것을, 내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 없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놓지 못하는 베냐민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신다면 여러분이 집착하고 살아가는 그 베냐민의 정체를 발견하고 내려놓으십시오. 이것은 참된 치유와 회복의 여정으로 가는 고통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지금도 내 인생 가운데, 내 가정 가운데, 그리고 교회와 여러분이 속한 모든 주변의 환경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이해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여러분의 주변 그리고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믿음을 구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을 절망으로부터,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조급함으로부터 지켜줄 것이고 여러분을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