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요셉의 생애 (4).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하나님의 시간표

창세기 40:1~41:5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3-09

말씀내용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하나님에게 잊혀졌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보다 힘든 것은 없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육체적으로 힘든 것 보다 더 힘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잊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되기 전까지 보냈던 13년의 세월에서 가장 힘든 문제가 바로 이 문제가 아니었을까요?

1. 감옥에서 만난 두 사람: 술맡은 관원과 떡굽는 관원(40:1~23)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들어간 요셉은 비록 감옥이었지만, 거기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통해서 진정한 형통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셉의 성실한 성품은 감옥의 관리가 더 이상 요셉에게 책임을 맡기고는 아무 것도 확인해야 할 일이 없을만큼 철저하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하게 성경이 설명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요셉이 감옥에 들어온 후에(‘그후에’, 40:1) 바로왕의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이 바로의 노여움을 사서 요셉이 있는 감옥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요셉의 실력을 알고 여전히 요셉을 신뢰하고 있는 보디발은 요셉으로 하여금 이 거물급 죄인 두 사람의 시중을 들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요셉이 그들의 시중을 들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서 그들 두 사람은 같은 밤에 각각 꿈을 꾸게 됩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꿈인데, 이야기에서 꿈은 단지 인간의 잠재의식에서 나오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무언가를 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계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A. 두 사람의 두 가지 꿈(40:5~19)
i. 내게 고하소서(40:5~8)
요셉은 그 날 아침 그들의 얼굴에서 근심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요셉에게 꿈을 꾸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내게 고하라고 요셉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술맡은 관원장이 먼저 요셉에게 자기의 꿈을 말합니다. 그는 꿈에서 세 포도나무를 보았고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 손에 있던 바로의 잔에 포도를 따서 즙을 짜 그 잔을 바로에게 드렸습니다. 요셉은 세 가지가 사흘을 의미하고 사흘 안에 바로가 술맡은 관원장을 복권시키는 뜻이라고 꿈을 해석해주었습니다. 떡굽는 관원장은 이 길조를 듣고는 자신의 꿈도 요셉에게 고합니다. 그는 꿈에서 흰 떡 세 광주리가 자기 머리 위에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윗광주리에 있는 바로를 위해 만든 떡을 새들이 먹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셉은 세 광주리 역시 사흘을 의미하며 바로가 사흘 안에 떡굽는 관원장을 처형하고 그 시체를 새들이 뜯을 것이라는 흉조를 보여줍니다.

ii. 요셉: 사람을 의지하다(40:14~15)
여기서 요셉은 이제 복권이 될 사람인 술맡은 관원장에게 특별한 부탁을 하게 됩니다. 자기의 해석대로 복권이 되면, 자기를 생각하고 은혜를 베풀어 감옥에서 건져달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사람의 꿈을 해석하면서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내기 위해서 사용할 인물이 아닌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찾아올 수 없을 기회를 그는 만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B. 잊혀진 요셉(40:20~23): 100년 같은 2년!
그러나 요셉은 그 사람의 기억에서 까맣게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안타까운 표현 가운데 하나가 이 구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40:23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이토록 인간을 의지한다는 것이 허망한 것입니다. 술맡은 관원장이 복권이 된 후, 요셉의 마음 속에는 이제나 저제나 자기를 기억하고 불러내줄지를 기다리는 것이 이전보다 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보내야했던 마지막 2년은 아마도 그가 이전에 보냈던 그 어떤 시간보다도 더 긴 시간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술맡은 관원장은 왜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을까요? 술맡은 관원장은 사실상 엄청난 권세를 가진 자였습니다. 그가 아무리 요셉이 죄없는 히브리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요셉이라는 존재가 그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요셉을 꺼내주려면 그는 바로에게 말을 해야하는데, 이런 별볼 일 없는 인간 하나를 건지기 위해서 그가 조금이라도 모험을 해야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2년의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서 인간을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배워야 했을 것입니다.

2. 바로의 두 꿈과 요셉의 해석(41:1~36)
성경은 ‘만 이년 후에’라고 말합니다(41:1). 이렇게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만 2년 후에’라는 말이지만, 요셉에게 이 시간은 20년 이상 처럼 길었던 시간이었음에 분명합니다. 2년 후의 어느 날 밤 바로가 두 개의 꿈을 꾸게 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계속 꿈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두 개의 꿈들로 이루어진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두 번의 꿈, 두 관원장의 두 개의 꿈, 그리고 이제 바로의 두 개의 꿈이 시작됩니다.

A. 그냥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꿈이다(아하수에로의 잠 못 이루던 밤, 에스더 6:1f).
바로의 꿈은 사실상 그냥 꿈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셉에게, 그리고 두 관원장에게 주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주도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에 따라서 당신의 때에 각 등장인물들을 움직이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결코 이 이야기 속에 우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에스더서에서 우리는 아하수에로 왕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어느 날 밤 잠이 오지를 않아서 역대 일기를 읽으라고 지시합니다(에스더 6장). 이 때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가 왕 모살 음모를 밝힘으로써 왕이 죽음을 면했던 사실과 모르드개에게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은 것을 알게 되고 이로 인하여 이야기 전체가 반전을 이루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시간표에 따라서 역사를 만들어가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셨는데, 그것은 술맡은 관원장이 감옥에서 나와 요셉을 잊은지 2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바로의 첫번째 꿈은 하숫가에 선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대 밭에서 뜯어먹고 있는데 뒤에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있다가 앞의 아름답고 살진 암소들을 잡아먹는 꿈이었습니다. 바로는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두번째 꿈을 꾸게 되는데, 거기서는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뒤에 가늘고 약하며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뒤에 나온 일곱 이삭이 앞에 있던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도 이 꿈을 해석할 자가 없었습니다.

B. 하나님이 요셉을 기억하시다(41:9~13).
이런 상황은 바로의 곁에서 수종들던 술맡은 관원장의 잊혀진 기억을 되살려 주었습니다. 그는 바로에게 2년 전의 일을 추억하여 고하게 되고 감옥에 있는 요셉이라는 인물을 소개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은 결코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했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읽어야 합니다. 그는 잊었습니다!(40:23) 그러나 지금 여기서 사람에게는 잊혀진 요셉을 기억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꿈을 주셨고 아무도 해석할 수 없는 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일과 상황으로 인하여 술맡은 관원장에게 요셉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술맡은 관원장이 이제 바로에게 요셉을 소개해올릴 수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는 요셉을 소개함으로써 바로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C. 요셉의 꿈 해석과 조언(41:14~36)
요셉은 드디어 감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요셉은 자신의 꿈 해석 능력을 크게 칭찬하는 바로 앞에서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리는 분명한 태도를 견지합니다(16). 바로는 자신이 꾸었던 꿈을 다시 한 번 요셉에게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요셉은 그 꿈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분명하게 말함으로써 자신의 꿈 해석을 시작합니다(41:25). 여기에 특별하게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라고 거듭 말하는 것은(41:28) 요셉의 생애에 있어 꿈이 무엇인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는 실마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과거에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 꾸었던 꿈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았겠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마는, 적어도 요셉이 그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언가를 하시고자 하시며 그 일을 하시고야 말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계시로서의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어려운 13년의 시간을 망가지지 않은 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모든 환난과 고통 속에서 망가지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인 것입니다.

요셉은 일곱 해의 풍년 후에 오게 될 일곱 해의 흉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임을 바로에게 고하고 이제 다가 올 일곱 해 흉년을 대비하여 일곱 해 풍년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너무나도 구체적으로 제안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세우고 전국에 관리들을 세워서 일곱 해 풍년 동안 토지 소산의 오분지 일을 거두어 일곱 해 흉년을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3. 높임을 받는 요셉(41:37~46)
바로가 이 꿈 해석과 요셉의 조언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바로 자신이 제안한 그 지혜로운 최고 관리로 임명을 받게 됩니다. 바로는 요셉 보다 더 지혜로운 자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비록 요셉이 강간범으로 형을 사는 죄수였고, 애굽인이 싫어하는 목축을 하는 히브리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46:34), 바로는 요셉을 총리로 임명을 하게 됩니다.
A. 삼십 세에 제국의 총리가 되다(41:46)
이 때 요셉의 나이가 30세였다고 성경은 특별히 그의 나이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관리로 중용될 수 있는 적합한 나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합당한 나이가 되기까지 술맡은 관원장의 기억 속에서 요셉을 사라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요셉이 그저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요셉은 적합한 나이가 차기까지 2년이라는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모든 영광과 영예를 다 주었습니다. 제국의 왕인 바로가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라는 말은(41:40) 어제까지만 해도 죄수였고, 종이었던 요셉에게 있어서 얼마나 감당할 수 없는 높아짐이겠습니까? 그는 전에는 바로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을 관리하는 자였지만, 이제 바로의 집, 제국 전체를 치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41:40). 바로는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서 요셉의 손에 끼워주고 그에게 죄수의 옷을 벗기고 세마포 옷을 입히고 신분을 상징하듯 금사슬을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버금 수레 즉 바로 외에는 제국의 제2인자만이 탈 수 있는 수레에 요셉을 태워 국민을 그 앞에 무릎꿇게 하였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준 전권은 그야말로 백성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세였습니다. 세계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 바로 요셉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이것을 누가 했다는 것입니까? 바로도 아니고 요셉을 기억해준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신 것입니다.

B. 총리 요셉이 통치하다(41:47~57)
총리로서 애굽을 통치하기 시작한 요셉은 7년의 풍년 동안에 거두어들여 각 성마다 저축을 한 식량이 바다 모래 같이 많아서 셀 수가 없어 세기를 그쳐야 할 만큼 다가올 흉년을 대비하였습니다. 드디어 7년 풍년이 끝나고 흉년이 시작되자, 주변의 각국이 다 곡식이 없어서 신음을 하지만, 애굽 온 땅에는 준비된 식물이 있었고 결국 기근이 심해지며서 각국 백성들도 식물을 얻기 위해서 애굽의 요셉 앞에 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 곧 요셉의 형제들도 요셉 앞에 서게 될 것에 대한 암시입니다.

C. 므낫세와 에브라임(41:50~52): 하나님을 기억하는 요셉
성경 본문은 이 가운데 요셉이 결혼을 하게 되고 두 아들을 낳았다는 기사를 전해줍니다. 이 두 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의도가 분명히 있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을 요셉이 지어주는 것을 통해서 요셉의 신앙이 어떠한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므낫세라고 이름을 주었습니다. ‘잊어버리다’라는 말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라고 므낫세란 이름을 준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41:51).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요셉이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자기가 받은 과거의 모든 고난을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받은 고난과 그 상처를 치유해주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일 그의 고난과 그 상처들을 치유하여 주지 않으셨다면 그는 결코 후에 형들을 그런 모습으로 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의 상한 것을 치유해주시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요셉은 에브라임이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두배로 풍성한’이란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역시 본문은 친절하게 그 이름을 준 배경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다는 것입니다(41:52). 요셉은 이전에 보디발의 집에서, 그리고 감옥에서 충성스럽게 일했지만, 아무런 풍성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이전의 것까지 합쳐서 풍성한 결과를 허락해주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두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요셉의 신앙에서 관찰할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주어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자기 과거를 잊게 하셨다,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주셨다는 고백과 함께 자기에게 이런 풍성한 결과를 주신 이도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요셉의 머리와 가슴 속에 살아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지난 세월을 바라보면서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희미하게나마 알고 깨닫게 된 것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어린 시절 나에게 그 두 개의 꿈을 꾸게 하셨던 것일까? 하나님께서 왜 나를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오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왜 나를 보디발의 집에서 높이시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왜 바로의 두 관원장을 내가 있는 감옥에 넣으셨다가 한 사람을 다시 복권하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왜 술맡은 관원장으로 2년 동안이나 나를 잊어버리게 허용하셨던 것일까? 이런 모든 질문들은 당시에는 말할 수 없는 괴로움으로 견뎌내야만 했던 것들이었지만, 이제 요셉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난 시간들은 암흑과도 같은 시간들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더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내온 과거의 모든 사건들을 요셉과 같이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행하신 사건들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으십니까? 주마등과 같이 지나가는 그 모든 여러분의 과거의 기억들을 살려보십시오. 그리고 고백하십시오. 그 모든 상처들을 주께서 치유해주셨고(잊게 해 주셨고), 이제 풍성한 은혜를 내게 베푸셨다고 말입니다.

4. 요셉과 그리스도
오늘 본문에서도 어김없이 요셉은 오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놀랍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몇 가지를 살펴봅니다.

A. 두 죄수(관원장) 사이에 있는 요셉과 두 강도 사이에 달리신 그리스도
요셉은 감옥에 갇힌 죄수로서 다른 두 죄수인 바로의 두 관원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죄수로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양쪽에는 다른 두 죄수가 달려있었습니다.

B. 한 사람에게는 축복, 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임하다.
요셉이 만났던 두 죄수 중 한 사람은 구원을 얻었고(복권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달린 강도들 가운데 한 사람은 구원을 얻었지만, 한 사람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C. 낮아진 후에 높임을 받다(빌 2:6~9; 행 5:31; 히 2:9).
요셉과 같이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 가장 존귀한 자리로 올리움을 받은 자가 성경에 또 누가 있습니까? 그는 그야말로 가장 비천한 인간의 모습,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으로서도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사형틀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 그 가장 비천한 자리에서 바로 하늘 영광의 보좌 위로 올리움을 받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인물인 것입니다.

D. 형제들에게 거절당한 요셉이 이방인의 구원자가 되다(41:57).
요셉은 형제들에게 거절당하고 팔려서 애굽으로 오게 되었지만, 종국에는 이방인의 구원자가 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형제들인 유대인의 손에 팔려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최고로 낮아지셨지만) 결국 이로써 유대인 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와 이방인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5. 교훈과 적용
하나님께서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A. 시간은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학교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시간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시간표를 만드는 일을 즐겨합니다. 자기의 계획표에는 이제쯤이면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초조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초조함이야말로 우리가 믿음으로 싸워야 하는 죄의 뿌리깊은 본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우리의 시간표가 들어있을 뿐, 하나님의 시간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자리잡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불신의 뿌리에서 흘러나오는 초조함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사용하여 우리를 가르치고 훈련시키십니다. 시간은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하나님의 학교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살면서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내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가게 될 것입니다. 요셉도 한 번은 술맡은 관원장을 의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결국 알게 됩니다. 자기가 의지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제껏 사신 인생의 시간을 통해서 이 사실을 얼마나 배우셨습니까?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말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은 얼마나 많은 곳에서 이 동일한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요셉은 술맡은 관원장이 자기를 잊어버리고 지내는 2년의 기다림의 세월 동안, 배운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에 대한 그의 환멸이 있었다면 그 환멸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하심으로 우리의 방향을 전환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요셉이 그러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믿었던 사람에 대한 실망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i. ‘우연’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설명하는 인간의 언어이다.
사람들은 우연이라는 말을 참 많이 씁니다마는, 그리 신앙적인 표현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우연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무언가가 일어나게 되어 당황하게 될 때 설명하게 되는 인간의 언어일 뿐입니다. 요셉의 이야기에 우연은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본문에 있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보면 그 타이밍이 정말 놀랍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와서 지혜롭고 충성된 일군으로 인정을 받은 후에, ‘그후에’(40:1) 바로의 두 관원장이 그 감옥으로 들어왔습니다. 요셉이 나이가 찰 때까지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었지만 요셉이 3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주셨고 그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했습니다.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시간표지, 요셉의 시간표가 아니었습니다. 우연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ii. 믿음은 하나님의 타이밍을 기억하고 기다리게 하는 힘이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런 삶 속에서 믿음은 어떻게 일을 합니까? 요셉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타이밍을 기억하고, 즉 하나님의 시간표를 보게 하는 눈이었고, 그 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같지 않을까요?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의 시간에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높이신다(벧전 5:6).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높이시리라”라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했습니다(벧전 5:6). 우리에게도 동일한 진리입니다. 요셉에게도 그러했습니다. 사람을 높이고 낮추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보디발도, 여기 나오는 바로도, 혹은 술맡은 관원장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것을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보내는 시간은 결코 낭비된 시간이 아닙니다.

i. 감옥에서 하나님은 요셉의 성품을 훈련시키셨다(시 105:18~19).
감옥에 있었던 수년 동안, 특별히 요셉의 기대와는 달리 그가 잊혀져버린 2년의 시간은 정말 낭비된 시간처럼 느껴졌을런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성품을 여전히 감옥에서 훈련시키고 계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리는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ii. 요셉을 인내하게 한 힘은 장래의 은혜를 베푸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믿음)이다.
요셉을 인내하게 한 힘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요셉이 바라보았던 장래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꾸었던 꿈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계시임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래 어느 때엔가 하나님의 시간에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일을 이루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을 견디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모든 어려움에서 견디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사는 성도의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시간표를 내려놓고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시간표를 바라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