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요셉의 생애 (3).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실패같은 성공 (2)

창세기 39:6-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3-02

말씀내용
지난 주에 우리가 상고한 말씀은 ‘성경적 형통함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실패 같은 성공은 결코 그냥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명백히 실패라고 보이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은혜의 증거를 보게되고 자신을 굴복시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결국 형통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 그 자체가 형통함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다 실패냐?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인생 가운데 세상 사람들이 가진 기준으로 볼 때 실패가 다 실패는 아니다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관점, 성경의 관점을 취하여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여호와께서 특별하게 함께 하셨던 요셉
그리고 한 가지 제가 이 본문을 묵상하는 가운데 꼭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어떻게 그 젊은 시절을 혼자서 보낼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열 일곱 살에 팔려와서 애굽의 총리가 되기 전까지 노예가 되어 보낸 10여년과 감옥에서 보낸 2년 여 모두 13년 동안 그가 어떻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그 어린 나이에, 젊은 시절에 그는 오기와 복수의 칼날을 하루 하루 갈면서 보냈었다면 이해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가 어떻게 그 긴 시간을 쓴 뿌리 없이 보낼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대로 이해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는 것 밖에는 찾을 수 있는 열쇠가 없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방식으로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을까요? 얼마나 그 은혜가 실제적이고 컸으면 그는 복수심을 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이해하면서 자기의 인생에 주셨던 계시로서의 그 꿈을 성취해 주실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신앙은 우리의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깨닫는 것?다 아는 것이 아니라?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복수심과 쓴 마음과 모든 오기를 다 녹여내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우리를 고생하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었던 어떤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그 사람을 향한 우리의 적개심과 복수심을 우리 속에 쓴 마음으로 품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사건이 결코 ‘실패같은 성공’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듯이 우리와 그 상황 속에서도 함께 해주셨다면,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면 우리 역시 요셉처럼 복수심과 오기를 내려놓고 갈 수 있을 것이고 또 우리의 그 고생과 실패는 실로 ‘실패같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여러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구하십시오.

오늘 이제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실패 같은 성공’의 두번째 특징입니다. 첫째가 하나님과 함께 함이었다면 둘째는 부정적 의미로 죄와 함께 하지 않는 것임을 성경은 같은 본문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2. 형통함은 ‘죄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10).
신자의 삶이 순탄하고 죄가 멀리서 그를 보고 피해가는 삶이 아니듯이, 요셉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보디발이 요셉에게 집안의 전권을 다 맡기고 다만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6). 이때 본문이 덧붙이고 있는 것은 요셉이 정말 잘 생긴 미남 청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음에 하려는 이야기가 연결되는 고리가 있습니다.

A. Mrs. 보디발 스캔들(6~18)
바로 이 때 터지게 된 사건이 Mrs. 보디발 스캔들이었습니다. 요셉은 나름대로 성실하고 지혜롭게 일을 해서 보디발의 집에서는 안정적 위치를 확보하기에 이르렀고 시간도 꽤 많이 흘러서 10여년 가까이 되었을 때입니다. 요셉은 이제 20대 후반의 청년이 된 것입니다. 오랫동안 요셉을 지켜보던 보디발 부인은 드디어 어느 날 요셉을 유혹하였습니다. 요셉은 분명하게 그녀에게 말합니다.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8,9).

여러분, 여기서 이 요셉의 말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요셉에게 주인이 분명하게 금한 것은 그의 아내였다는 것입니다. 앞에 6절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했는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식료는 바로 자기 아내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공유할 수 있는 것이거나, 관리를 맡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보디발 한 사람과만 관계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i. 죄의 끈질김(10a)
비록 요셉이 이처럼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지만 보디발 부인의 유혹은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10절에는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결코 한 번의 실패로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단호해도 죄는 계속해서 끈질기게 성도의 삶의 주변을 결코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다가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매일 매일을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 매 순간 순간을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사단에게는 방학도 없고, 불철주야 성도들을 넘어뜨리고자 부단히 애를 쓰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그렇고 교회를 향해서도 그런 것입니다. 요셉은 매일 이 문제를 다루어야 했고 싸워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매일 죄와 싸우고 사십니까?

ii. 요셉의 영(적 감)각(9,10b,12)?하나님과 죄에 대한 감각
요셉이 만난 것은 결코 쉬운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혈기왕성한 젊은이였고, 그집의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말입니다. 부인의 청을 거절하는 것이 요셉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요셉이 모를리가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런 상황을 만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이 내 인생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저 사람이 내 인생의 최소한 앞으로 몇년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느낄 때, 여러분은 약해지지 않습니까? 요셉이 만난 상황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결코 어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직장 보스나 어떤 사람이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의 악한 결정을 당신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분, 우리 미래를 좌우하는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밖에는 안 계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 믿음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 앞에서 모든 믿음을 다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자기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왕 앞에서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권세를 기억했습니다. 그의 세 친구들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들 역시 자기들의 영혼을 책임지시는 하나님께 자기들의 생사를 맡겼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이런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믿음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요셉은 자기 주인인 보디발에게 득죄하리이까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명한 영적 감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살아있는 감각이고, 둘째는 죄에 대한 감각이었습니다. 비록 그는 미숙한 소년으로 처음에 등장하지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었습니다(37:2). 앞서 말씀드린대로 그의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은 바로 영적 감각, 거듭난 사람에게 주시는 영적 감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녀들을 대학으로 보내게 될 때,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문란한 이 세대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순결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적 타락이 심각해진 이 시대로부터 자녀들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프로그램 가운데 ‘순결서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그 프로그램을 한 아이들 가운데 결혼하기까지 순결을 지키는 비율은 그 프로그램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비율과 거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바로 요셉에게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감각과 죄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본성에 속한 감각입니다. 죄인식과 죄를 이기는 능력은 결코 프로그램으로 주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물론 거듭난 사람은 절대로 범죄치 않는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汰?하나님과 죄에 대한 감각으로 인하여 죄와 싸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이길 수 있으며, 또 실패하더라도 주께로 돌아가 사죄의 은총을 얻음으로 회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결코 이런 순결서약 같은 프로그램을 받은 청년이 아니었지만, 그는 영적 감각으로 이 싸움을 대하였고 또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늦어도 중고등학교 때까지 분명한 거듭남의 은혜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자녀들을 기르면서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기도의 제목이요, 영적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이 일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죄와의 싸움의 문제는 비단 자녀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혈기왕성한 청소년이나 청년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이 늘 경험하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늘 매일 매순간 죄와 싸우고 살아가신다는 사실을 의식하십니까? 우리들 역시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을 늘 죄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으며, 특히 오늘날과 같은 시대는 과거에 비하여 더욱 더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의 도구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식의 약화이고, 그것은 죄와의 타협 때문입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버리게 되면 교회는 동시에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교회가 타락하기도 하지만, 성도들의 삶이 죄와 타협해서 살아가기에 교회가 타락하기도 합니다. 사실상, 이 둘은 함께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를 잃고 강단에서 바르게 증거되지 않는다면 성도들의 삶은 힘을 잃고 죄와 싸우지 않으며 타협하고 공생관계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원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대로,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우고 사십니까?” 요셉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피흘리도록 죄와 싸우는 모습입니다. 그는 감옥에 가도록 죄와 싸웠습니다. 여러분이 죄와 싸우는 것은 어쩌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쌓아올린 모든 경건이 범죄하는 사건 하나로 다 물거품과 같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큰 죄가 아니라 작은 죄 하나로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단 한 번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종종 보아와서 이런 이야기가 결코 낯선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죄의 무서움, 죄의 비참함을 기억하십시오.

iii. 상황을 만들지 않음.
요셉은 이런 영적 감각이 있었기에 첫째로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10절 하반절의 표현입니다.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 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합니까? 그래도 부인의 생각이 좀 바뀌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들어봐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요셉은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는 자리와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죄와 유혹을 상대할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첫번째 지침입니다. 대개 유혹에 굴복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은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요셉은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았고, 그녀와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형통함이라면 ‘그 여인과 함께 있지 않는 것’이 또한 형통함이었습니다. 죄와 함께 하는 성공이 있다면, 거짓 위에 세워진 성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공처럼 보이는 실패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성공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여러분을 유혹하는 상황은 어떤 것입니까? 그 상황 자체를 떠나시고 만들지를 마십시오.

iv. 도망함.
요셉이 그 다음으로 보여준 행동은 도망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요셉이 그런 상황을 피하였지만 불가피하게 자기도 모르게 그 상황이 오고 말았습니다. 요셉이 일을 하기 위해서 그 집에 들어갔을 때 마침 보디발 부인 외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보디발 부인이 만들어낸 상황이었을지 모릅니다. 그 부인은 요셉의 옷을 잡고 늘어졌습니다. 요셉은 이러지 말라고 앉아서 사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도망했습니다. 어쩌면 요셉 자신도 버려둔 옷이 거짓 증거의 물증이 될 것이란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마는,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피했습니다. 죄를 이렇게 두려워하는 감각이야말로 오늘날 이 세상의 기준과 감각에 익숙해져서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거듭난 성도들에게 영적 감각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B. 순종이 시련을 가져오다.
결국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요셉은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유혹에 실패한 보디발 부인의 요셉을 향한 애정은 증오로 둔갑합니다. 보디발 부인은 집의 사람들을 다 불러서 인종간의 감정을 부채질하는 말로 요셉에게 누명을 씌웁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남편이 오기까지 그 증거물을 옆에 두고 있다가 남편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왔었다”고 말합니다. 그 여인은 남편에게도 일말을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유혹을 피하고 죄와 싸워서 이긴 결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형통함일 수 있습니까? 이것이 성공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결과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유혹을 피하고 죄와 싸워서 이기는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신앙이 나에게 불이익을 주고 손해를 끼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신앙을 지키는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그렇게 살아오셨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그렇게 산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C. 보디발의 태도와 조치(19~20): 사람도 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더 보게 되는 것은 이 스캔들에 대한 보디발의 태도와 조치입니다. 아내의 이야기를 들은 보디발은 ‘심히 노하였다’고 본문은 전합니다(19).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가 요셉에게 노하였다고 쓰지 않은 것입니다. 대개 노하는 것이 어떤 인물에 대한 것일 경우에는 ‘요셉에게 노하였다’고 쓰는 법인데, 보디발은 요셉에게 노하였다고 하지 않고 그냥 ‘심히 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 조치를 보십시오. 그는 자기 아내를 희롱한 자가 있다면 그를 누구이든지 죽일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진 자였습니다. 게다가 요셉은 그 집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이 자기 아내를 범하려고 한 요셉에게 내린 벌은 그냥 자기 집에 있는 궁중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집어넣는 일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비록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입니다. 보디발은 자기 아내를 알았고 요셉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비록 자신의 체면과 아내를 위해서 요셉을 감옥으로 보내지만, 그는 적어도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Mrs. 보디발 스캔들의 진상을 어느 정도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3. 요셉과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빌 2:1~11)
오늘 본문에서도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입니다.

A. 유혹을 받지만 죄를 범하지 않았다(6~12).
요셉은 유혹을 받지만 죄를 범치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시험(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를 범치 않으셨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B. 거짓고소를 당하고 누명을 쓰지만 변명하지 않았다(13~18).
요셉은 죄를 범치 않았지만 거짓 고소를 당하고 누명을 쓰게 되지만, 한 마디도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거짓 증거를 받아 십자가를 지셨지만, 털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C. 보디발은 요셉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19~20).
보디발은 요셉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보디발은 요셉이 죄를 짓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을 정죄하여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로부터 빌라도는 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요 19:4,6).

4. 교훈과 적용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교훈을 정리합니다.

A.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십시오’(히 12:4).
오늘날 죄와 싸우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적습니다. 죄인식이 없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늘 마귀의 관찰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외가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 만큼 우리는 혼자 있을 때에도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셔야 할 것은 죄와 싸우는 일입니다. 피흘리기까지 싸울 각오로 싸우십시오. 피흘리기까지 싸우라는 말은 전쟁터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라는 말씀입니다. 전쟁터는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죄와 싸우다가 죽으면 그는 영생을 얻는 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죄와 싸워서 죽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해서 그 죄의 값은 다 치루시기 위해서 죽으셨고 이로써 죄 자체를 정복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싸우시면서 피를 흘리셨고, 조롱을 견디셔야 했으며, 죄와 싸우시면서 수치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싸우셨고 이기셨습니다.

여러분, 성도는 죄와 싸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죄와 싸우지 않습니다. 그는 죄의 친구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순간 여러분은 죄의 원수가 됩니다.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는 이렇게 죄와 싸우는 것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고 속으로 정직하게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께 나오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분의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서 죄와 싸우셨고 십자가 죽음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B. 죄와 싸워 이겨서 얻게 되는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실패같은 성공’이다.
요셉이 죄와 싸워서 이긴 결과는 억울한 누명과 감옥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이런 일을 얼마든지 겪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내가 죄와 싸우는 것을 못 보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내 인생의 최선을 위해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죄와 싸워 이겨서 얻게 되는 실패는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패같은 성공이며, 주 안의 형통함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