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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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생애 (2).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실패같은 성공 (1)

창세기 39:1-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2-24

말씀내용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아마 성공이 실패처럼 보일 때가 아닐까요? 결국 그리스도인은 두 개의 시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현실의 눈과 믿음의 눈입니다. 성공이면 성공이고, 실패면 실패지 실패 같은 성공이 어디 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믿음의 눈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질문입니다. 요셉의 삶은 바로 이 문제를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요셉이 족장이었던 아버지 야곱의 특별히 사랑받는 아들의 자리에서 형들의 미움을 받아 결국 애굽으로 팔려가 보디발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로의 시위대장의 집의 노예로 다시 팔렸다는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자고 했던 것은 ‘낮아짐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놀라운 시작을 예고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저 낮아짐, 한 번의 낮아짐 자체가 이제 바로 뭔가가 시작되겠구나 라고 기대를 하게 만들고 또 즉각적으로 뭔가 신분 상승이나 연봉의 증가나 하는 식으로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꼭 그렇게 우리의 시간표를 따라서 우리의 기대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어렵게 하는 것이 이런 문제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때가 우리의 때와 다르고,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의 방법과 다른 것 말입니다. 우리가 배운 원리 하나를 가지고 대입하고 맞춰보면 꼭 그렇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 할텐데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하나님의 두려울 정도로 자유로우신 주권과 선택을 우리의 얄팍한 신학적 지식이나 논리 속에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모릅니다. 요셉은 이것을 참 놀랍게 보여주는 한 인물입니다.

1. 낮아짐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놀라운 시작을 예고한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의 명제를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낮아짐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놀라운 시작을 예고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줄거리를 전체적으로 잠깐 살펴보지요.

A. 족장 야곱의 사랑받는 아들에서 애굽인의 노예가 팔리다(1).
요셉은 사랑받는 왕자 같은 자리에서 애굽인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엄청난 변화인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은 더 이상은 내려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어느 정도 그의 예상은 맞아들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보디발은 그를 인정하여 집의 모든 일을 책임맡는 집사와 같은 자리로 그를 임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자체도 놀라운 성공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애굽 사람의 노예였지, 결코 이전의 영광을 누릴 수는 없었습니다. 결코 우리는 이것을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B. 누명을 쓰고 죄수로 감옥에 들어가다(19,20).
인생이란 것이 이렇게 한동안 잘 나가는 듯 하지만 곧 암초를 만나게 되고는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계속 젊은 요셉에게 추파를 던졌고 결국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처음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왔던 상황보다도 더 악화되었고 요셉은 더 낮아졌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꼬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누가 보아도, 요셉의 삶은 정말 비참한 삶이었고, 정말 안 풀리는 삶이지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이 이렇다고 느끼신 적은 없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때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본문을 통해서 하고 계십니다.

2.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형통함’(성공)의 의미
많은 사람은 인생을 형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집들에는 ‘가화만사성’같은 액자가 걸려있는 것을 쉽게 봅니다. 집은 화목하고 만사를 성취하고 싶다는 말이지요. 만사형통이란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마 저의 할아버지도 그런 뜻에서 제게 ‘형통할 형’자를 주신 것 같습니다. 게다가 ‘더할 익’이니까, 말하자면 제 이름 뜻이 ‘만사형통’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서도 만사형통을 원하지 않는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에서, 또는 하나님께서 형통함 또는 성공이라고 말씀하실 때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A. 형통함은 세상적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다(2,3,23,21; 신 29:9; 수 1:7).
본문은 유독 형통함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합니다. 2절, 3절, 그리고 23절에 그 단어를 쓰고 있는데 거기마다 형통함을 설명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형통함이 내가 내 실력으로 이루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형통케 하신다는 개념입니다(3,23). 그러나 세상적 형통함의 개념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형통했다고 한다면 요셉이 종의 자리에서 풀려나고 애굽에서 자수성가하여 성공했다고 할 때 세상은 형통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가 앞서 간단하게 39장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았듯이, 요셉이 종이 되고 또 누명을 쓰고 감옥을 들어가는 모든 상황에서 형통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적 관점으로 보자면 나중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요셉이 형통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장면에서는 형통함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고 여기 요셉이 한참 낮아지고 억울함을 당하는 장면에서 성경은 그가 형통했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성경에서 형통하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형통함이란 개념을 사용하시는 의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개념으로 보자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삶을 사는 부자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유명한 자와 힘있는 자는 다 형통하지 못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형통함의 기준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2)라는 표현을 성경이 사용할 때 단순히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집에 거할 때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보다 인격적이고 친밀한 함께 하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모든 거듭난 신자들과 함께 하시고 결코 그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고 모든 불이익과 손해를 감당하면서도 그분을 마음 중심으로 사랑하고 살아가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함께 하신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아버지 집에 있을 때 미숙함을 드러내는 사람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놓치면 안 될 것은 그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을 하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인데, 이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우리가 추측하기로는 바로 거듭남으로부터 나오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옳고 그름의 도덕적 잣대가 아니라 선과 악, 죄인식을 그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잠시 후에 살펴볼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신명기 29:9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이 구절은 어떤 의미에서 형통함을 말하고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있는 그 일을 형통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이 말의 뜻은 ‘어떤 형편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형통함의 의미가 아니라, 형통함의 의미는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내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이것을 교회 역사 속에서 순교를 당했고 혹은 신앙으로 말미암아 많은 고난을 당하고 혹 고문을 당한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형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함께 하셨기 때문에 절망을 소망으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어디로 가든지’ 형통했던 것입니다.

저는 최근 새벽기도에서 욥기를 설교하기 위해서 묵상하는 가운데,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에 대해서 많이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목사가 된 분인데, 루마니아가 공산화된 후 14년간 옥고를 치루면서 말로 할 수 없는 고문을 견딘 살아있는 순교자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혹독한 고문의 자리에서 그리고 홀로 독방에서 보낸 그 많은 시간 동안에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셨던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요셉이 당하고 있던 이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표현은 이런 특별한 의미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형통함을 이런 방식으로 주시는가? 그냥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으로 하시면 좋겠는데, 그 상황에 그대로 머물게 하시면서 형통함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데에는 목적과 계획이 있으시기 때문인데, 이로써 먼저 그 사람 자신을 훈련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장과 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깊은 하나님의 목적을알았습니다.
시 105: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언제까지 연단을 하십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공연히 우리를 고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고생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십니다.
애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애굽의 문화를 배웠고, 왕실 가까이에서 귀족의 문화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었던 기간은 상당한 기간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열 일곱 살에 팔려와서 바로 보디발의 집으로 왔고 그가 감옥에 가서 보낸 시간은 약 2년 이상이라고 볼 때, 그리고 그가 바로 앞에 섰을 때의 나이가 30세였으니까 아마 그는 보디발의 집에 10년 정도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서 뿐 아니라 감옥 그것도 특별히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서도 관리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요셉이 어찌 꿈만 가지고 애굽이라는 큰 제국의 총리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비록 고생스러운 과정이기는 하였지만, 거기서 애굽의 문화를 익히고 특히 귀족 문화를 배우게 하셨고 관리 능력을 길러주셨던 것입니다. 실로 요셉이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보낸 13년의 시간은 낭비된 시간이 아니었고, 오히려 형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가 105:19에서 여기에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는 하였을 때에 요셉 자신을 위한 것 말고 다른 하나님의 계획도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시면서 상황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웅대한 목적을 이루어가십니다. 요셉이 팔려와서 지내는 기간동안에 하나님은 야곱의 온 가정을 다루시는데 특별히 유다의 이야기가 38장에 실려있습니다. 그야말로 실패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팔렸지만 형통했고 유다는 그를 팔았지만 형통하지 못했습니다. 야곱의 가정 전체가 거짓음모를 안고 살아가면서 형통할 수 없었습니다. 늘 죽음의 그림자가 그 집안을 덮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상황에도 개입하셨습니다. 이것도 우리는 차차 보게 될 것입니다.

B. 형통함은 눈에 띄는 어떤 것이다(3,5,21~23)
우리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형통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인데, 그것은 또한 사람의 눈에 띄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3절에 보면 보디발(주인)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또 여호와께서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요셉을 주관적으로 보면서 느낀 것일 수도 있지만 성경은 더 나아가서 설명합니다. 5절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책임을 맡으면서부터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현저하게 요셉이 그 집의 책임을 맡기 전과 후가 차이가 나는 것을 보디발은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보디발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의 증조부인 아브라함 부터 시작해서 그의 조부 이삭과 부친 야곱에게 약속하신 언약입니다. ‘너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비록 요셉은 종에 불과했지만, 어디로 가든지 그의 삶은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미치는 삶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이었습니다. 지금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요셉이 훌륭하게 해서 이렇게 되었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증조부 때부터 약속하신 것은 얼마나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요셉의 형통함은 눈에 띄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감옥에서도 반복되게 됩니다. 감옥에서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셨다고 21절은 말합니다. 감옥의 관리책임자는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겠지만, 요셉이 특별한 신의 도움을 받는 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것은 요셉이 훌륭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올라서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란 것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얼마나 세속적 성공의 개념에 속는 것인지 모릅니다. 요셉은 죄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냥 죄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죄수였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통함이었고 이 형통함은 그가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주목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입니다. 그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살든지 그것이 도둑질이요, 악한 일이 아니라면 그의 존재,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의 존재는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목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의 형통함은 감옥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그는 감옥에서조차 모든 책임을 맡는 자가 되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계시든지, 그리고 무엇을 하시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형통하게 하시는 일에는 제한이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C. 순결을 지킨 결과는 억울한 누명과 감옥행이었다.
요셉이 순결을 지킨 결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다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믿음을 지키고 살려고 하다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악한 자들에게 똑같이 악으로 대하지 않음으로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는 하나님이 아시고, 또 아는 사람은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실패가 아니라 ‘실패처럼 보이는 성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겉으로 볼 때 요셉의 인생은 점점 더 내리막길로 치닫는 것 같지만, 믿음으로 살면 살수록 더 그렇게 되는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상처이고 실패의 옷을 입은 영광스러운 승리인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이런 승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이런 실패 같은 성공 속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 비밀을 아십니까?

3. 요셉과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빌 2:1~11)
오늘 본문에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입니다.
A. 아들이 종이 되다(1).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의 자리에서 종의 형체를 가져 인간으로 오신 그 모습이 요셉의 삶 속에 깊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B. 형통한 종이 되어 온 집이 축복을 누리게 하다(5).
그는 비록 종이 되지만, 형통한 종,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종으로서 보디발의 온 집에 축복을 베푸는 통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구주로서, 온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누리도록 오셨습니다.

C. 범죄자로 여김을 받았다(20).
요셉은 죄가 없었지만 범죄자로 여김을 받은 것과 같이, 복되신 구주께서도 죄가 없으셨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내어 주었습니다.

D.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23).
요셉이 비록 종으로 팔려왔고, 감옥까지 가게 되지만, 겉의 모습은 실패자의 모습이었지만, 그는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신 인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지만, 나사렛의 목수로 이 땅에 사셨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형통한 종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그 손으로 성취하는 종이었습니다.

이처럼, 요셉의 삶의 한 장면 한 장면, 한 모습 한 모습은 얼마나 우리 구주의 모습을 드러내는 그림자인지 모릅니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놀라운 그림자를 요셉이란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4. 적용과 교훈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A. 당신의 성공과 실패의 관점을 조정하라.
먼저, 여러분 참 성공이 무엇인가 하는 성경적 관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적 성공의 잣대로 우리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비관하거나 자만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상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적 성공의 잣대로 여러분의 삶을 평가하고 비록 세상적으로는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진정한 성공을 추구하고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세상적으로는 실패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영생하도록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하여 살아가십시오. 순간 순간을 만족하고 그저 한 평생을 위한 것만을 위해서 여러분의 소중한 인생을 다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성공처럼 보이는 실패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도의 소명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 같든지 실패하는 것 같든지, 자녀들이 여러분의 눈에 자랑스럽든지 그렇지 않든지, 여러분이 건강하든지 건강하지 않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은 형통한 삶을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떤 상황에 데려다 놓으시든지 여러분은 형통한 삶을 추구하십시오. 성도의 인생이 복되다고 하는 것은 그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B.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 참으라(히 12:1~3).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에게 실패처럼 보이는 성공의 가장 극적인 예를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의해서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실패 같은 성공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가장 비참한 자요, 우리의 믿음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지키려고 하다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극심한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던 초대교회의 흩어진 신자들을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우리의 평생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살아간다면, 이기지 못할 시험은 없을 것이며, 견디지 못할 실패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바로 실패처럼 보이는 성공의 삶이며, 영광스러운 승리인 것을 영원히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