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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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생애 (1).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하나님의 기막힌 섭리

창세기 37:1-3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2-17

말씀내용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우리는 요셉의 생애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셉의 생애는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 중 아브라함의 생애 만큼 분량에 있어서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고 성경 전체를 보더라도 매우 상세하게 생애가 기록되어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요셉의 생애를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1. 요셉의 이야기가 성경에서 중요한 이유
A.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연결
첫번째는 요셉의 생애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기록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종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 아브라함의 후예들이 애굽으로 갔으며 거기서 종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없다면 우리는 그 배경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B. 교리
두번째로 요셉의 생애는 성경에 기록된 다른 사람들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아더 핑크(A. Pink)는 창세기 인물들이 전하는 교리적 강조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선택의 교리를, 이삭은 아들됨의 교리를,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징계의 교리를 가르친다면 요셉은 고난을 통해서 얻어지는 상속의 교리를 가르친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 M. Boice)는 좀 더 넓게 창세기에 나오는 주요 등장 인물 여덟 사람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교리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담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의 본질을 가르치고, 아벨은 장차 오실 구속자의 죽으심과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베푸실 것을 보여주는 믿음의 기초를 가르치며, 에녹은 당대에 그렇게 사는 자가 없음에도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보여주며, 노아는 오랜 세월을 말씀에 의지하여 배를 짓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믿음의 인내를 보여주며,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믿음의 순종을 보여주고, 이삭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 뜻을 복종시켜 제물이 되는 믿음의 능력을 보여주고, 야곱은 오랜 세월 자기 원하는대로 살면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운 징계를 나타내고, 요셉은 종에서 권세의 자리로 오름으로써 믿음의 승리를 보여준다.”
이들이 말하는 것 처럼 요셉의 생애는 특별히 고난을 통해서 마침내 하나님의 유업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고, 믿음의 승리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요셉의 생애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통하여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님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한 인생과 그를 둘러싼 가족들 가운데 어떻게 나타나며 그리고 한 가정을 넘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요셉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이런 교훈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리즈의 제목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라고 붙였습니다.

C. 그리스도의 모형
그러나 사실 요셉의 생애에 있어서 어떤 것 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의 생애가 놀라울 정도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림자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점에서 요셉의 삶의 장면 장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해주시는 마치 탁월한 연출가이신 하나님께서 요셉의 생애를 연출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될 정도입니다. 아더 핑크는 요셉의 생애를 강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부분을 무려 101가지나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생애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낮아지심 그리고 다시 높이 올리우심, 온 세상의 구원자가 되심과 반목과 질시가 있는 곳에 화평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되심 등이 놀랍게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바로 이런 점들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D. 이야기의 주인공: 요셉과 유다
이제 창세기 37장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부분까지의 이야기에서 중심 역할을 차지하는 사람은 물론 요셉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적 조상이 될 유다가 또한 주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르우벤은 비록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장자였지만, 그 역할을 점점 상실하게 되는 모습도 우리가 보게 될 것입니다.

2.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는 아들 요셉(2~4)
오늘 본문은 야곱이 가나안 땅에 살게 된 이후의 이야기라고 설명하면서 시작됩니다.

A. 여전히 미숙한 아버지 야곱
요셉은 17세의 소년이었습니다. 요셉의 어린 시절에 대한 하나의 설명은 그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양을 치고 지내면서 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결코 형제들로부터 사랑을 받을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성숙한 아이였다면, 좀 더 지혜롭게 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여간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요셉은 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셉이 형제들의 사랑을 받았을리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가정의 열 두 아들이 네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자식들이라는 사실에서 이들이 사이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요셉이 이렇게 행동을 한 것은 미움을 받을만한 행동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한 가지는 어린 요셉에게 있어서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이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형제들은 가나안의 문화 속에 깊이 빠져들어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옳고 그른 것,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구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버지 야곱에게도 있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다른 형제들보다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고, 또한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편애는 눈에 띄게 드러났습니다. 요셉을 위해서만 특별하게 지은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특별히 물감을 들인 옷은 보통 사람들이 입을 수 없는 옷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지만, 야곱에게 남아있었던 여전한 미숙함이 아버지로서의 모습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참 놀랍지요. 야곱 자신이 어린 시절 에서를 편애하던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었는데, 그 자신이 지금 똑같은 편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미숙한 모습입니까? 야곱의 요셉에 대한 편애는 형제들로 하여금 요셉을 미워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아버지들의 편애는 결국 미성숙함에서 비롯되고 그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으며 형제 간의 불화를 만들어내는 주요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B. 하늘 보좌에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는 성자 하나님
이렇게 연약하고 미숙한 아버지 야곱 그리고 그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요셉을 통해서 성경이 엿보게 하는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시는 성자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단 한 가지,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받는 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기에 편애라든가, 형제들이 많다든가 하는 것들과 상관없이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계셨던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3. 꿈꾸는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받다(5~11)
A. 하나님이 주신 꿈, 꿈꾸는 자의 미숙함
요셉을 향한 형제들의 미움은 요셉이 꾼 두 개의 꿈 이야기 때문에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렇잖아도 미움을 받고 있던 요셉은 자기가 꾼 꿈을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첫번째 꿈은 요셉이 형들과 함께 밭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는데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형제들의 단들이 둘러서 자기의 곡식단에 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에게라도 이 꿈의 의미는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형제들은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요셉을 더욱 미워하였습니다(8). 그 꿈만이 아니라 그 말을 인하여 미워했다는 말은 참 중요합니다. 웬만하면,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꿈을 꾸더라도 형제들에게 말을 하지는 않을텐데 요셉은 말을 했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요셉이 후에 또 꿈을 꾸는데, 그것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요셉이 형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버지 야곱에게도 이 꿈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부모와 형제들이 다 요셉에게 절을 한다는 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들은 더욱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서 읽을 대목은 그래도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하는 것입니다(10).

B. 하나님의 꿈을 미워하는 사람들?영적 지각이 있는가, 없는가?
긴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이야기는 단지 요셉의 미숙함으로 말미암아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미움과 화를 자초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셉은 물론 미숙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모습이 칭찬받을 만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꿈은 하나님께서 성경이 씌여지기 전에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는 주요한 수단이었습니다. 결국 이 꿈을 가지고 우리는 꿈을 크게 가져라 하는 이야기를 할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이 꿈을 주시고 그 꿈을 형제들에게 말하게 하신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실 것이며 그 일이 이루어진 후에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자 하심인 것입니다. 형제들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 꿈을 싫어했고,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반대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꿈은 요셉의 꿈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인데, 그것을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20절에서 형제들의 반응은 그 꿈의 내용에 대한 그들의 반감과 증오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드러내줍니다. “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그러나 야곱은 비록 아버지로서는 부족한 모습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그래도 영적 지각이 있는 족장이어서 그 꿈을 예사로운 것으로 그냥 넘기지 않았고 마음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지를 늘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태도는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가정을 통해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내 자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늘 주의깊게 살피는 영적 지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지각이 있고 없는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그 지각이 없어서 형들은 그냥 요셉을 더욱 미워하게만 되었고 결국에는 그를 죽일 생각까지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지각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분명하지는 않아도 그런 영적 지각을 가지고 이 일을 생각해보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적 지각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4. 아버지의 보냄을 받는 아들 요셉(12~17)
이것이 야곱의 가정의 상황이었습니다. 식구는 많았지만, 정말 외로운 가정이었을 것이고, 결코 행복하지 않은 불행한 가정이었습니다. 하루는 요셉의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칠 때에 야곱이 요셉을 형들에게 보내어 안부를 알아오도록 보내게 됩니다. 여기서도 역시 사랑받는 아들 요셉은 양치는 일에서 제외된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곱이 살던 헤브론에서 세겜까지의 거리가 약 40~50마일 정도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게다가 요셉이 세겜에 가서 형들을 찾지 못하고 도단까지 올라가야 했는데 도단은 세겜에서 또 10마일 이상 떨어진 거리에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아버지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그 멀리 있는 형들, 그것도 요셉을 증오하는 형들에게로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정상적이고 좀 생각을 한다면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법한데, 야곱은 요셉을 형들에게로 보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요셉의 태도입니다. “내가 그리하겠나이다(13하).” 놀라운 순종입니다.

A. 적대적인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으시는 성자 하나님
여기에 또한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적대적인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한 순종으로 성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셨습니다. 요셉의 순종은 그런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에 너무나 충분합니다. 요셉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아들이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한 순종을 성부께 드리셨습니다.

5. 형들에게 팔려가는 요셉(18~36)
결국 요셉은 도단에 이르기까지 50마일 이상의 거리를 찾아가서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멀리서 요셉이 오는 모습을 발견한 형들의 반응은 너무나 즉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꾀하였습니다(18). 이미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서의 대학살극을 저지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형제들 역시 시체로 가득한 성을 노략질할만큼 도덕적 불감증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그들이 증오하는 형제 요셉 하나를 죽이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요셉의 꿈을 죽이려고 꾀합니다(20).

A. 유다와 르우벤의 역할(35:22)
여기서 르우벤과 유다가 하는 제안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르우벤이 장자로서 요셉을 살려보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21).” 아마 르우벤의 속셈은 ‘어떻게’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을 돌아가게 할 작정이었던 것 같습니다(22). 이러던 중에 요셉이 드디어 형들에게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강도가 하듯이, 요셉의 채색옷을 벗기고 물이 없는 구덩이에 던져넣었습니다. 동생은 옷이 벗겨져 구덩이에 던져져 있지만, 형들은 태연하게 밥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 마침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스마엘 상인들의 떼가 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셉을 죽이기를 원치 않았던 유다는 요셉을 그들에게 팔아넘기자고 제안합니다(26,27). 형제들은 유다의 말을 청종했다고 했습니다(27). 은 이십 개를 받아 요셉을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후, 르우벤이 돌아옵니다. 르우벤이 그 중요한 순간에 어디에 다녀왔는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요셉은 이미 팔려갔습니다. 르우벤은 옷을 찢으며 탄식합니다(30).

여기서 어떤 모습을 보게 됩니까? 르우벤이 장자였지만, 형제들은 르우벤보다는 유다의 말을 청종합니다. 르우벤은 그 중요한 순간에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그저 탄식만 하는 무기력한 장자입니다. 사실, 성경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르우벤이 아버지 야곱으로부터뿐 아니라 형제들 안에서도 이미 장자의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것이 그가 서모 빌하를 범하였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입니다(35:22). 그의 부도덕함은 장자권을 스스로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 자리를 시므온과 레위도 세겜 학살극의 책임을 물어 빼앗기게 되고, 네째인 유다가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다의 혈통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시간표: 마침 찾아오는 이스마엘 상인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놓고 밥을 먹다 눈을 들어 보았을 때 한 떼의 이스마엘 족속 상인들이 지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선지는 애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하는 큰 그림을 보자면,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은 정말 이상하게도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그 멀리 떨어져 있는 형들에게로 보냈고,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 하다가 마침 그들의 눈 앞에 등장한 이스마엘 상인들을 보고서 그들에게 팔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연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정확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는 시간표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건들이었습니다. 애굽으로 가는 길은 여럿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C. 끊이지 않는 거짓과 하나님의 소품: 염소와 옷(27:15~16)
이제 형제들은 수염소를 잡아서 요셉이 입고 있던 채색옷을 그 피에 적십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그 피에 젖은 옷을 들이댑니다.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32).” 얼마나 잔인한 아들들입니까? 야곱의 이야기는 속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거짓된 음모는 결국 드러나게 될 것이지만, 적어도 야곱의 가정에서 20년 이상을 드러나지 않고 묻혀진 음모로 숨게 됩니다. 아이러니는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자기가 형 에서라고 속일 때 사용했던 것이 염소와 형 에서의 옷이었는데, 그가 지금 아들들에게 속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소품도 역시 수염소와 아들 요셉의 옷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죽음의 소식 앞에서 늙은 야곱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날이 지나고 달이 지나도록 애통하였습니다. 거짓된 아들들의 위로는 결코 야곱에게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당신의 거대한 계획을 이루어가시면서도 동시에 아직도 야곱이라는 인물을 훈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D. 보디발의 집으로 들어가다
오늘 본문은 그 상인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이란 인물에게 요셉을 팔았다는 말로 마무리됩니다(38).

6. 숨어계시는 하나님의 기막힌 섭리: 깨어진 가정, 악한 의도들과 행동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간다.
오늘 전체 본문에는 마치 에스더서가 그렇듯이 한 번도 ‘하나님’이 등장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숨어계십니다. 야곱의 깨어진 가정에서 일어나는 편애와 증오, 악의와 살해음모, 인신매매 그리고 거짓말….이 속에 하나님은 등장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는 오늘 본문에서도 놀랍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의 기막힌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A.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환경을 보라: 아버지의 편애; 형들의 미움과 시기; 요셉의 꿈과 그의 미숙함.
그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환경을 보십시오. 아버지 야곱의 지나친 편애가 있습니다. 요셉에 대한 형들의 증오와 시기가 있습니다. 요셉 자신은 비록 어렸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이 있었고 순종하는 아들이기는 하였지만, 형들과의 관계에서 너무도 미숙하게 처신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이런 가정에서, 이런 상황에서 뭔가 선한 계획을 이루어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열악하고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계획을 주권적으로 이루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B. 낮아짐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놀라운 시작을 예고한다.
요셉은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에게서 특별한 사랑을 받는 왕자와 같은 자리에서 애굽의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것도 열 일곱 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입니다. 한 인생을 놓고 볼 때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하늘이 꺼지고 아무 소망이 없이 그저 망가져버린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낮아짐이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놀라운 시작을 예고해준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그분의 섭리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네가 지금 어디에 처해있든지 너의 인생은 나의 주권적 계획과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 제 인생이 주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 있음을 압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오늘 여러분이 처해있는 자리에서 여러분은 낙심하지 않을 수 있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으며, 오히려 이제 하나님께서 뭔가를 하시겠구나 하는 생각과 기대를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의 미숙함과 여러분 자신의 실수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 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거스릴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위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 보장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야곱과 그 아들들의 미숙함과 완악함들이 결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거스릴 수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는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지 않았습니까? 지금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궁궐이든지, 감옥이든지, 혹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편안한 가정이든지, 혹은 어려움이 가득한 상황이든지 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행하실 일들을 인하여 기대함으로 나아가십시오.

오늘 말씀에 대한 바울 사도의 주석입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