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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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생애 (8).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창세기 45:1-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04-20

말씀내용
1. 무엇이 인생의 고난을 견디게 하는가?
삶에는 정답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는가를 묻고 싶을 때가 있지만, 거기에 딱 떨어지는 정답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이 이런 질문을 통해서 값비싸게 배우게 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수학 문제 풀듯이 인생을 풀어나갈 수는 없습니다. 종종 우리는 좋은 신앙을 이런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하지 않거나, 혹 질문에 대하여 딱 떨어지는 답을 주는 것이라고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믿음이 있으면 울면 안 되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지한 신앙은 없습니다.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정직하게 자신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을 볼 수 없게 한다면 그것은 신앙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정직하게 자신을 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관점을 끌어오는 힘입니다.
요셉의 생애를 오늘 8번째 설교로 마치려고 합니다. 요셉, 나중에야 소위 성공을 했다고 하지만, 정말 고생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그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상처들로 정상적인 심리적 상태를 유지하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요셉의 모습은 상처로 얼룩지고 삐뚤어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두드러지게 보여줄만큼 망가지지 않았고 믿음의 장성함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요즘의 심리학은 가능하면 모든 것을 어릴 때의 상처로 해석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치료해주지만, 심각한 문제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피해자로만 여기게 함으로써, 자신의 죄의 문제를 보도록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대치하는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정말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가 던져야 하는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는, 요셉으로 하여금 그 어려운 시절과 고난을 이겨내게 만든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인생의 고난을 견디게 합니까? 여기에 그냥 신앙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정답이긴 하지만, 그가 무엇을 신앙이라고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아주 다른 오답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셉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그 답은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바라보았기에, 또는 신뢰하고 믿었기에 그는 그 고난의 시절을 망가짐없이 지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의 삶 전체를 설명하기에 가장 합당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이 시리즈의 제목대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또는 오늘 제목인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는 말을 들으실 때, 어떤 느낌이 있으십니까? God’s sovereign grace! 오늘 이 말의 의미를 여러분의 가슴 속에 새길 수 있다면, 그것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2. “나는 요셉이라”(3~4)
A. 요셉의 생애의 클라이맥스
오늘 본문은 요셉의 생애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드라마로 이해한다면 요셉이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이 짧지 않은 대목에서 보는 이들은 다 답답해 했을 것입니다. 과연 요셉은 언제까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셈인가 물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요셉은 자기의 정체를 형제들에게 밝힙니다. “나는 요셉이라(3).” 이것이 바로 요셉의 생애의 절정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의 생명을 대신하고자 하는 유다의 말을 들었고, 둘러서 있는 형제들의 눈빛에서도 서로를 향한 형제애를 읽었습니다. 이제 요셉은 더 이상 테스트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테스트는 끝났습니다. 성령께서는 이제 더 이상 요셉의 감정을 억제하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요셉은 소리를 질러서 옆에 애굽의 시종들을 모두 물러가게 합니다(1). 이제 형제들과 자기의 사이에 통역도 필요없고 다른 사람들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12 형제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셉은 그저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방성대곡하였습니다(2) 그 울음은 애굽 사람들이 들었고 바로의 궁중에까지도 전해졌습니다. 22년 만에 처음으로 그는 소리내어 울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말로, 히브리 말로 그는 소리내어 울었을 것입니다.

“나는 요셉이라”라는 말을 우리 식으로 읽어야 한다면, 이 말은 “형님들, 나 요셉이예요, 요셉! 베냐민아, 나 형이다, 네 형!”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한참을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요셉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형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라는 인물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은 신앙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전에 먼저 이 본문에서 다룰 것이 있습니다.

B.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여러분과 저는 언젠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다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만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이 본문이 이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그저 수없이 지나쳤던 그런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거기서 어떤 반응을 하실 것 같습니까? 형제들은 자기의 정체를 밝히는 요셉 앞에서 그리고 자신들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요셉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여기 놀랐다는 표현은 두려움에 놀랐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했던 잘못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요셉이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라고 말했을 때에는 그들의 가슴이 무너져내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이 이제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여기서는 그 용감한 유다의 입도 막히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애굽에 팔아넘긴 나 요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 그리스도께 대하여 했던 모든 잘못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네가 믿는다고 교회를 다니면서 늘 하찮게 여겼던 예수다”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실까요? 심판대 앞에서 모든 자의 입은 막히게 될 것입니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를 붙들게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이 이 심판대 앞에서 나의 의로움이십니다’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자들은 그리스도의 손의 못자국을 보게 될 것이고, 알게 될 것입니다. 형제들은 결코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것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왔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모든 인간에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십시오.

3.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드러나다(4~8).
이제 우리는 요셉이 형제들에게 하는 말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요셉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진리가 드러나 있는 대목입니다. 요셉의 말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믿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A. “하나님이..하나님이..하나님이..”
여러분, 요셉의 형제들의 언어는 주로 하나님이 빠져있는 언어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그들이 애굽에 와서 정탐군으로 오해받고 감옥에 들어가서 3일을 지내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던 곤경 속에서였습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관에서 자루에 들어있는 돈을 발견하고 놀라서 떨며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하였습니다(42:28). 이것이 처음입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불신앙의 환경 속에서 나홀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요셉의 말들을 주목해서 살펴보십시오. 요셉의 언어는 하나님 중심의 언어, 하나님이 흠뻑 젖어있는 언어라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범죄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39:9). 그 일로 누명을 쓰고 들어간 감옥에서 요셉은 꿈을 꾸고 뜻을 몰라서 괴로와하는 바로의 관원장에게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꿈을 말하라고 했습니다(40:8). 그리고 나중에 바로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도 요셉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꿈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41:16). 그리고 요셉은 나중에 죽을 때에도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50:24). 요셉의 언어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주어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그의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가를 예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는 가끔 기분이 좋아질 때, 일이 잘 될 때만 그렇게 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그랬습니다. 가끔 우리는 기분이 좋고 일이 잘 될 때, ‘할렐루야’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아니 우리 자신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렐루야는 잘 아시다시피 ‘Praise the Lord!’ 라는 말입니다. 일이 잘 되도, 잘 안 되도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가가 중요하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요셉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도 역시 늘 하던대로 하나님이 중심이며, 하나님으로 푹 적셔져 있는 말을 합니다. 자기가 4절에서 한 말 때문에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애굽으로 보내신 분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뜻없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인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기를 형제들보다 먼저 애굽에 보내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5).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그 하나님의 큰 계획은 이스라엘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 함이라고 그는 덧붙여 설명합니다(7). 그는 거듭 강조합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8a).” 하나님께서 자기를 바로의 아비로 삼으셨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셨으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8b). 자기를 높인 것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그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것을 보십니까? 그는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간증이 아니라, 스스로가 정직하게 이 가슴 속의 고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에게서 하나님을 빼면 그는 아무 할 말도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하나님이….하나님이…..’ 이것이 요셉의 말의 특징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단순히 말이 아닙니다. 그의 신앙입니다.

살아있는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제로 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빼고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빼고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여러분의 삶의 한 영역, 시간의 한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 구원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성향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도무지 부인할 수 없을만큼 하나님을 내 생각 속에, 삶 속에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을 조심해서 들으십시오. 이 말은 내 삶이 참 신앙으로 거듭나게 되면, 완전하게 하나님께만 사로잡혀서 더 이상은 죄를 짓지 않고 죄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나의 옛 본성에는 이질적인 성향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성향이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정서입니다.

요셉은 자기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속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하나님이….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나를 해치려고 했던 형들이 주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여러분을 어렵게 했고, 잊을 수 없도록 힘들게 했던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주어는 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은 성도로 하여금 마침내 이 고백을 하게 합니다.

이것은 그냥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만이 아니라, 그 큰 그림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7; 47:27; 50:20)
인간의 악행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인간의 악행까지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을 향해서 사용하십니다. 형제들은 악한 의도로 요셉을 팔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은혜로우신 목적을 성취해가십니다. 이 주권과 섭리는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인간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에 상관없이, 그 인간의 행위를 통하여 그리고 그 행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성취되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쓰임을 받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요셉의 삶의 뒷부분에서와 같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그 뜻을 행하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갑니다. 그러나 다 이렇게 쓰임받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불행하게 쓰임을 받는 부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의 형들입니다. 그들은 요셉이 말하는대로, 요셉을 ‘애굽에 판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악한 의도와 생각으로 이 일을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 악행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뜻과 주권을 성취해가시는 일에 사용하십니다. 결국 그들도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은 정말 비참하게 쓰임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쓰임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뜻을 막을 자는, 막을 사건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셉은 후에 아버지 야곱이 죽고나서, 형들이 다시 불안에 떨게 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50:20입니다.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신앙은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형제들이 요셉을 해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의와 악행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야곱의 모든 자손들이 그 기근 속에서 애굽으로 오게 됨으로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번성하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나의 악 조차도, 나의 실수도, 나의 잘못된 선택도 다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이 내게 선을 베푸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자비와 선하심으로 역사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망가지지 않도록 지켜주었던 야곱의 신앙의 내용인 것입니다.

C.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방법(15:13,14): 400년 동안 객이 되게 하심
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는 마침내 하나님의 놀랍고도 거대한 그림을 완성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오래 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창 15:13~14입니다.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오래 전에 하셨던 약속을 이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성취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보존하십니다. 요셉이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알았기에 형제들에게 아버지와 모든 식구를 이끌고 애굽으로 와서 앞으로도 5년을 계속될 기근 속에서 생명을 보존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9~13). 요셉은 애굽이 자기와 자기의 후손들이 살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죽음의 침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증조부인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이 말씀을 기억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비록 애굽에서 자리를 잡아서 더 이상 성공할 수 없을만큼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여기는 하나님이 주시는 땅이 아님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임종의 순간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창 50: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우리가 어찌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거대한 그림을 다 들여다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까지는 믿음의 힘으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지금 이해할 수는 없어도 뭔가 큰 일을 하고 계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 하나’의 관점에서 벗어나십시오. 하나님은 단지 요셉 하나를 놓고 일하지 않으십니다. 야곱 하나가 아니고, 유다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만지시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게 하시면서 결국에는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가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로 그 은혜를 찬미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4. 용서와 화해, 기쁨(14~15; 46:28~30)
이 날은 야곱의 열 두 아들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축복의 날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만이 아니라, 사실상 야곱 가정을 향하신 하나님의 치유가 온전하게 드러나는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이토록 깨어진 가정, 그 뿌리가 아브라함 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할 만큼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뿌리깊은 문제를 안고 있던 가정을 하나님은 드디어 고쳐주셨습니다. 원수되었던 형제 관계가 용서와 화해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짓 평안이 주는 피상적 기쁨이 아니라,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기 시작합니다. 14절과 15절은 구체적으로 이 형제들 사이의 용서와 화해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먼저 한 배 동생인 베냐민을 끌어안고 웁니다. 그리고 일일이 형들과 입을 맞추고 안고 웁니다. 그제서야 형들은 요셉과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 용서와 화해가 일어난 것이 그들에게 비로소 경험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기서 요셉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요셉의 요청대로 집으로 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 모든 사실을 말합니다(45:26~27). 믿을 수 없어하던 야곱은 자기를 태우려고 아들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하여 믿고 말합니다(45:28).
창 45:28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이제 이야기는 어두움의 그림자가 걷히고 밝은 소망의 이야기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야곱에게도, 요셉에게도 그리고 모든 요셉의 형제들에게도 그렇습니다. 결국 야곱의 모든 식구가 다 애굽으로 내려오게 되고(창 46) 야곱은 22년 만에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46:29~30). 형제들과의 울음이 용서와 화해의 울음이었다면(45:14~15), 여기 아버지와의 만남에서 함께 울었던 것은 기쁨의 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이제 기쁨과 만족으로 죽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갑작스럽게 결부로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조상들이 될 열 두 아들들을 축복하고, 임종합니다(창 49). 언젠가 이 예언과 축복에 대한 말씀을 별도로 상고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창세기의 긴 이야기는 요셉의 죽음을 남겨놓고 있고, 요셉의 죽음과 함께 끝나게 됩니다.

5. 임종(50:15~26; 48:21)
요셉의 죽음에 대한 짧은 기록 역시 요셉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형들이 불안해 할 때(보통 형제들 사이에 원수 갚는 일은 부모가 죽은 후에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조 창 27:41),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50:19).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그는 더 나아가서 형들의 식구와 자손들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겠다고 말하면서 안심을 시킵니다.

A.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가 신앙을 증거한다.
여러분, 이처럼 요셉이 임종의 침상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심히 아름다운 신앙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가 그 사람의 신앙을 증거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평생을 경건하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경건의 실체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시간은 임종의 시간이 이르렀을 때입니다. 이 때는 우리 모두에게 한결같이 찾아옵니다. 임종을 준비하고 사십시오. 임종을 준비하고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육체 안에서 보고 믿고 사랑했던 주님을 우리는 육체 밖에서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B.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믿음으로 장래의 은혜를 바라보다.
요셉은 임종의 침상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믿음으로 장래의 은혜를 바라보았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고 권고하실 때가 있음을 바라보았고,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내시고 주시고자 약속하신 땅으로 데리고 가실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창 50: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그리고 그 때 자기의 유골을 약속의 땅으로 메고 가라고 한 유언은 먼 훗날 정확하게 모세에 의해서 지켜지게 됩니다(출 13:19).

6. 교훈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중요한 교훈을 정리하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A. 용서와 화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한 믿음이다.
요셉이 자기의 천추의 한이 될 법한 일을 가지고 용서와 화해로 나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한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어떤 다른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한 믿음이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의 해로 말미암아 내가 고생을 했다면, 그 고생한 것에 배나 갚아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나타남을 보고, 그것을 신뢰함으로 기다리는 자는 자기의 망가짐을 피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용서와 화해를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이 사실을 적용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났던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발견하십시오. 발견하려고 씨름하십시오. 그래야 비로소 우리의 이야기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하신 목적이 나와 너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다른, 전적으로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어떤 이야기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냥 ‘자기 혼 자 잘 살다가 죽었다’ 입니까? 아니면, 그는 요셉과도 같아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이루어졌으며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도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놀랍게 쓰임을 받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은 요셉의 형제들과 같이 부지중에 악한 의도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쓰임받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요셉처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순종하여 삶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의 성취를 이루고 쓰임받는 인생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B. 내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있음을 믿으십시오(갈 5:22~23).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분명하게 있음을 믿으시고, 그 주권적 은혜를 ㅤㅊㅏㅊ기 위해서 씨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바라보고 사십니까? 성경적 사랑, 기쁨, 평강, 소망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한 신앙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어느 한 장 어느 한 절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발견되지 않는 장이 없다면, 그 인생은 정말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인생의 장들 마다 도무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찾아보기 힘들다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세상에서 무엇을 성취하고 살아오셨든지 상관없이 영원한 실패자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놀라운 사실은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는 열쇠를 가지고 해석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렇게 하시는 만큼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실 것입니다. 그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착함과 성실 그리고 온유와 절제’입니다(갈 5:22~23). 신앙은 그냥 기도많이 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앙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요셉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하시는 분, 그리고 여러분의 삶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부터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발견하게 하는 분은 바로 모든 거듭난 자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C. 하나님 중심의 관점, 하나님 중심의 언어로 사십시오(롬 8:5~6).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발견하는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 중심의 관점, 하나님 중심의 언어로 살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롬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참 그리스도인의 생각은 영을 좇는 자이기에 영의 일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인 생각을 하는 자이고 생각 자체가 영적으로 돌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좇는 자, 세상 일을 추구하는 자, 거듭나지 않는 자는 육신의 일로 생각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생각이 육적으로 밖에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아갈까’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더 손해 보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삽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선언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그 믿음이 없기에 비록 교회다니는 행동과 교회 봉사의 행위는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 영혼이라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자의 결국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참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중심의 관점을 가지고 삽니다. 그는 요셉과 같이 하나님 중심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살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참된 신앙을 드러내는 자들은 언젠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서게 될 때에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을 뿐 아니라 친히 저주가 되셨던 죽임당하신 어린양의 품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있음을 신뢰하시고 그 선하신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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