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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4). 인간의 실패, 하나님의 구원

사도행전 7:1-53, 사도행전 2:3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12-11

말씀내용
오늘 우리는 교회역사상 최고의 설교 한 편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 설교는 탁월한 사도들인 베드로나 바울의 설교가 아니라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이 설교는 성경에 기록된 가장 긴 설교이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괄하는 설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한 예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 사도가 전한 설교가 있는데 나중에 살펴볼 것입니다(행 13:16-33). 이 긴 설교의 본문을 어떤 방식으로 전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 고민했습니다. 로이드존스는 스데반의 설교 본문인 사도행전 7장으로 38번 설교를 하였고 우리말 번역본으로는 900여 페이지에 달합니다. 그러나 저는 스데반의 설교를 거의 그대로 다시 여러분에게 들려드리는 것이 이 본문을 다루는 최적의 방법 중 하나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만 이 놀라운 설교를 약화시키지 않을지 두려울 뿐입니다. 주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1. 여러분, 들으십시오! (1-2a; 6:3,10)
많은 사람들이 스데반의 설교에 대하여 상반되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스데반을 ‘무척이나 참기 힘든 젊은 설교자'이며, '서툴고 자만에 빠진 따분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가 ‘산헤드린 공회에 아마도 그 자신만큼이나 그들도 잘 알고 있었을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장황한 개요를 연설했다’고 말합니다. 또 그의 설교는 흥미롭지 않을 뿐 아니라 요점도 없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실교에 대한 이런 부정적 평가는 결코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윌리암 닐은 그의 설교를 ‘정교하고 능란한 복음의 선포’라고 말하고 로이드존스는 가장 탁월한 복음 설교라고 칭합니다.
이 설교는 본래 법정 진술이었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하였고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혐의로 산헤드린 공회에 기소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 가야바는 “이것이(기소 내용이) 사실이냐(1)”고 물었고 스데반은 피고인의 진술로 대답한 것이 이 설교입니다. 그의 청중은 은혜를 받으려고 앉아있는 성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정죄하기 위한 빌미를 찾으려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이 설교의 청중이었습니다. 그들 중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에 정통한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데반이 구약성경을 개괄한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6:3)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6:10).
이 설교는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2b-8) 요셉을 거쳐(9-16) 모세로 이어지며(17-43) 결론으로 성전의 이야기로 마칩니다(44-50).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훑어가면서 스데반은 자신의 청중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하나님의 구원자를 거부했던 그들의 조상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인 설교에서는 보기 어려운 담대한 도전입니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실패했고 하나님의 구원자들을 거절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인 이스라엘의 조상 족장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요셉을 거부하여 팔아 넘겼고(9-10), 광야의 조상들은 모세를 대적하고 거부했으며(35-41), 또한 왕국 치하에 살던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죽인 자들이었습니다(52). 그리고 최근에는 그들의 조상들이 했던 그대로,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작당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52). 인간 편에서는 반역과 거부가 반복되는 실패의 이야기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그들에게 구원자를 보내고 또 보내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의 이야기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한 번도 주어로 등장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어로 10번 소개됩니다. 요셉 이야기에서는 3회, 모세 이야기에서는 30회, 하나님이 주어로 소개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 가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스데반은 놀랍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구원 역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루어 내십니다. 그 정점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인간의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 속에서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점은 인간의 실패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모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스데반은 이 긴 설교에서 자신이 기소를 당한 문제를 변호합니다. 그는 거룩한 곳 성전을 거슬러 말했다고 기소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는 특정 장소나 땅 혹은 성전 같은 물리적 건물에 제한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 점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스데반은 “이것이 사실이냐”고 묻는 대제사장과 공회원들 앞에서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설교—증언을 시작했습니다(2a). 여러분도 이제 이 설교를 들으십시오. 스데반의 설교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들려져야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입니다.


2. 아브라함 이야기(2b-8, 51; 시 29:3; 창 12:1; 15:7; 느 9:7; 창 17:4-5)
먼저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2b-8). 스데반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2b)”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려고 ‘영광의 하나님(시 29:3)’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은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곧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였습니다! 창세가 12:1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와 가나안 사이, 하란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하지만,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다는 창세기 15:7과 느헤미야 9:7에 근거합니다. 가나안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이방 땅에서 영광의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얻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것은 땅이 아니라 약속이었습니다. 5절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5).” 그는 살아 생전에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매장지를 얻기 위해서 헷 족속으로부터 막벨라 굴을 매입해야 했고, 이것이 그가 소유한 땅의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이 대목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에크하르트 슈나벨).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400년의 종살이 후에야 그 땅을 후손들이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6-7),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치는 언약의 표인 할례를 주셨습니다(8). 스데반이 여기서 말하는 언약의 표로서 할례는, 뒤에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써(51)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을 대조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할례 언약을 통해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인쳐 주셨습니다(창 17:4-5).
아브라함을 가나안이 아닌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영광의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과 거룩한 곳 성전에 매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며, 조상 아브라함은 언약의 표인 할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믿어지지 않는 약속을 믿어 순종하였다는 사실을 스데반은 강조합니다.


3. 요셉 이야기(9-16; 2:36; 창 23:1-20; 33:18-20; 수 24:32)
이야기는 이삭과 야곱 그리고 열 두 아들의 출생 이야기를 건너뛰고 요셉으로 이어집니다(9-16). 요셉 이야기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장소로서의 애굽입니다. 여덟 절에서 여섯 번 애굽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9) 요셉을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고 은총과 지혜를 주셔서 애굽 온 집의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10). 이 일을 행하신 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과 거룩한 성전에 매여 계시는 분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스데반은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인간의 실패를 딛고, 인간의 실패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열두 족장인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형제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아 넘김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족장들의 시기하는 모습은 스데반의 청중들인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유대인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스데반은 완곡하게 그들을 고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에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를 환난에서 건져 내셨으며 그를 높이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 방식과 유사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사도행전 2:36).” 또한 요셉은 지금 고난을 받는 스데반 자신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요셉 당시, 애굽과 가나안에 찾아온 흉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섭리적 방편인 변장한 축복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양식이 없다’고 말할 때(11) 가축의 사료를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기근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기근은 요셉을 팔아 넘겼던 족장들이 다시 형제 요셉과 조우하게 하였고, 결국 야곱과 온 친족 75명이 애굽으로 가서 생명을 보존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을 곤경에서 건져내는 구원자 요셉의 역할은, 이어지는 모세의 역할과 참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75명에 불과한 조상들로 하나님의 큰 구원 역사를 이루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으로 팔아 넘긴 악행이라는 실패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후일 족장들이 장사된 곳인 세겜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예루살렘이나 유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이라고 한 것은, 스데반이 구약의 사건을 혼동한 것이라기 보다는 망원경적 시각의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헷 사람들로부터 막벨라 굴을 산 것과(창 23:1-20) 야곱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땅을 매입한 일을(창 33:18-20)을 묶어서 함께 말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사마리아에 있는 세겜의 그곳에 매장되었다는 사실은(수 24:32) 산헤드린 공회원들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영광의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성전 건물에 제한되지 않으시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스데반은 그 하나님은 족장들의 실패와 반역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들의 반역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4. 모세 이야기(17-43; 2:36; 신 18:15)
이야기는 가장 긴 모세에게로 이어집니다(17-43). 모세 이야기의 초점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부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사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은 모세의 생애를 40년씩 세 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17-29, 30-34, 35-43).
첫번째 시기는 바로의 궁에서 보낸 40세까지입니다(17-29). 스데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라고 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합니다(1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75명에 불과했던 그 백성이 번성하여 많아지게 하셨습니다. 그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임금이 이스라엘 민족을 교활하게 핍박하기 시작했고, 모세는 이때에 태어났습니다. 스데반은 모세의 출생부터 버려짐, 바로의 딸의 입양과 바로의 궁에서의 교육 등, 모세의 간략한 전기적 스케치를 제공합니다(20-22). 여기서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40세가 된 모세는 자신의 신분과 힘을 통해 동족 이스라엘을 돌볼 자각을 하게 되지만, 결국 그를 애굽에서 미디안 땅으로 도주하게 만든 것은 애굽 사람이 아니라 동족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슬프게도 그들은 깨닫지 못했기에(25), 모세를 향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고 하면서(27) 모세를 밀쳐냈습니다. 결국 모세는 애굽 왕궁의 왕자 신분에서 미디안 광야의 무명의 목자로 살게 됩니다.
두번째 시기는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입니다(30-34). 이 40년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 광야의 한 가시나무떨기의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만나셨습니다(30).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일어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곳이 유대 땅이나 성전이 아닌 시내산 광야였다고 말합니다. 스데반은 거룩한 곳을 거슬러 말했다고 자신을 기소한 사람들에 대해(행 6:13) 그 긴장을 야기하는 발언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서 있던 시내 산 광야의 그곳은 ‘거룩한 땅’이었습니다(33). 거룩한 나라 바깥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땅이 이미 있었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세번째 시기(35-43)가 시작될 때,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애굽에 보내십니다(34).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35).” 스데반은 여기서 자신이 모세를 모독했다는 기소를(행 6:11) 무너뜨리면서, 다시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전했던 방식을 따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사도행전 2:36).”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인간의 실패 속에서, 그 실패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간 행한 기사와 표적은 그가 하나님의 구원자임을 증거하며(36), 이것은 예수님께도 적용됩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고 했던 모세의 말을 인용하면서(신 18:15),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합니다. 또한 율법의 중재자로서의 모세를 말함으로써, 스데반은 자신이 모세를 모독하는 자가 결코 아님을 소명합니다(38).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 모세를 모독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고 그를 거절하여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며 금송아지와 일월성신과 온갖 우상을 섬겼던 이스라엘의 조상들이었습니다(39-43). 결국 그 우상숭배는 왕정시대까지 이어져서 조상들은 바벨론 밖으로 쫓겨가는 결과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야기는 하나님은 가나안과 예루살렘과 성전을 넘어 애굽에서 모세를 기르셨고 시내산 광야의 거룩한 땅에서 모세를 불러 구원자로 세우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비록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그 모세를 거절하였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셨다고 스데반은 말합니다. 모세 이야기에서 스데반의 청중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심장박동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5. 성전—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 (44-50; 출 25:16,21; 사 66:1-2)
모세의 이야기에서 스데반은 자연스럽게 성전에 대한 주제로 전환하여 결론으로 향합니다(44-50). 자신이 성전을 거슬러 말했다는 기소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입니다. 먼저 광야에서 세워진 성막으로 시작합니다. 성막은 그 안에 증거의 돌판(출 25:16,21)을 간직해 두었기 때문에 ‘증거의 장막’이라 불렸습니다(44). 여호수아는 성막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왔고 다윗의 때에 이르러 다윗이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을 건축할 마음을 아뢰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통해 건축을 허락하셨다고 성전 건축의 과정을 간략하게 말합니다(46-47).
이제 스데반의 긴 설교의 결론의 핵심입니다. 그 결론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48-50).” 스데반은 이사야 선지자를 인용함으로써(사 66:1-2) 자신의 주장이 구약 선지자의 말씀임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성전에만 국한하는 위험과 여호와께 제사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다 드렸다고 생각하는 오류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을 경고했습니다. 조상들은 성전을 우상으로 만들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사 66:2b). 스데반은 그 조상들과 똑같이, 산헤드린의 공회원들과 유대인들이 행하고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한 잘못을 저지릅니다. 특정한 경건의 형식과 교리를 아는 지식과 특정한 예배 형식과 신앙 체험에 하나님을 제한함으로써, 그 모든 선한 것들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섰던 그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입니다. 이제 스데반의 설교는 직접적인 도전과 적용으로 나아갑니다.


6. 도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51-53)
스데반은 ‘우리’ 대신 ‘너희’라는 말로 전환하면서 청중인 공회원들을 저격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51).” 너희는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언약의 표인 할례를 받음으로써 믿음의 순종을 보였던 조상 아브라함과는 다르게 행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스데반은 더 몰아 부칩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52-53).” 이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요셉을 시기하여 팔아 넘겼고 하나님이 구원자로 세운 모세를 거절하였고 도리어 우상을 숭배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한 조상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율법을 거슬러 말하는 자라고 기소한 그들이야말로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은 불법한 살인자들이라고 그들을 기소함으로써 스데반은 자신의 긴 설교이자 변론을 마칩니다.


7. 교훈과 적용
우리가 오늘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함께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라는 지적을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요셉을 시기하여 팔아 넘긴 형제들, 모세를 거절하고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자기 판단과 뜻 대로 행하여, 하나님이 주신 성전 조차 우상으로 만들어버린 자들과 너희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지적을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강력하게 찌르는 설교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스데반은 우리도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실패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렇게 반복되는 우리의 반역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구원자들과 말씀의 종들을 보내사 우리의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일에 지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자손,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주로 보내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구원이 이런 것이라면, 누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자신이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자신이 구원받기에 합당한 자격을 조금이라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구원에서 멀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스데반의 설교에서 이 사실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역을 일삼은 실패자들이 아닙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실패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약속대로 구원자를 보내 당신의 크신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절망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한 일로 자기는 구원 받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가 거절했던 분이며, 그분은 정확하게 우리가 자신을 거절한 그 사실을 통해 자신을 거절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스데반이 이 설교로서 말하고자 했던 요점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가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게 될 사도행전의 주요 주제입니다. 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