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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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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3). 이 거룩한 사람!

사도행전 6:8-15, 누가복음 21:15, 예레미야 7: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11-20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주일, 구제의 사역을 맡기기 위해 교회가 스데반과 빌립 등 일곱 일꾼을 택하여 세운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들을 세움으로써 사도들은 말씀 사역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6:7). 이제 이야기는 일곱 사람 중 스데반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6:8-8:3).
오늘 우리가 주목할 본문은 6:8-15이지만, 큰 문맥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데반은 초대 교회의 첫 순교자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첫 순교자는 사도들 중에서가 아니라 일곱 일꾼들 중에서 나왔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말씀과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신약 교회의 첫번째 순교자입니다(계 6:9).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은 이번에는 채찍질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거룩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에서 이어진 대박해는 예루살렘 교회를 풍비박산내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은 이 대박해를 통해 당신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와 그 너머로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증인의 한 사람인 사울의 회심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낭비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죽음을 통해 사도 바울을 낳으셨습니다. 사탄은 결코 교회를 침묵시킬 수 없습니다. 이 큰 문맥을 놓치지 않으면서 우리는 스데반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 지금까지 이런 사람은 없었다 (계 6:9; 행 6:3,5,8,10,15; 1:8; 눅 21:15)
이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정말 특별한 인물입니다. 그가 신약교회의 첫 순교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행한 그 탁월한 설교 때문에라도 우리는 그를 정말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이런 사람은 없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에 대한 성경의 묘사들 때문입니다. 첫번째 묘사는 사도들이 일곱 일꾼을 선택하는 조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6:3). 두번째는 예루살렘 교회 회중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선택했다고 한 묘사입니다(6:5).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다는 말과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말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른 분별력인 지혜는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이며, 믿음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성령과 지혜’, ‘믿음과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스데반은 성령님으로 인하여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거룩한 능력을 받은 성숙한 신자였으며, 회중에게 검증된, 인정받는 일꾼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8절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라고 말합니다. 은혜 역시 성령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도우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권능은 성령 충만의 결과입니다. 주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8). 첫번째와 두번째 묘사가 일곱 일꾼들에 대한 일반적 묘사였다면 8절은 스데반을 특정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네번째로,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다’고 말씀합니다(6:8). 기사와 표적을 행한 것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지금까지는 사도들만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제 사도가 아닌 사람에 의해서 기사와 표적이 행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더 보편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시사합니다.
다섯번째로 그는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6:10).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누가복음 21:15).”고 하신 말씀이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이 사람 스데반을 통해서도 성취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워드 마샬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들을 변명하도록 요구되었을 때, 그들에게 성령(눅 12:12)과 지혜(눅 21:15)의 도움을 약속하셨다. 초기 교회는 이 약속의 진실성을 증명하였다.”(하워드 마샬 지음. (2016). 사도행전 (백승현, Ed. & Trans.; 초판, Vol. 5, p. 209). 기독교문서선교회.). 그러니 스데반과 논쟁하던 사람들이 어찌 그를 능히 당해낼 수 있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공회원들이 심문을 받기 위해 공회에 선 스데반의 얼굴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습니다. 이 표현은 신약에서 유일하게 스데반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공회에서 증언하는 스데반과 특별한 방식으로 함께 계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간단하지만, 이 짧은 본문 안에서 누가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 묘사하는 스데반이라는 인물을 주목합니다. 신약과 구약을 통틀어 이렇게 강렬하고도 압축적으로 그 경건이 묘사된 인물이 있습니까?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욥이나 다니엘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잠깐 등장하고 사라지는 한 인물에 대해서 이토록 인정과 칭찬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이런 사람은 없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이 스데반이라는 인물을 이렇게 극찬하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스데반에 대한 유난히 강조되는 표현들은 그와 교회에 미칠 반대와 적대가 얼마나 클지를 미리 보여주는 복선(伏線)입니다. 칼빈은 이런 말을 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강하게 나타날수록 사탄의 광분함도 동시에 맹렬해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스데반과 같은 거룩한 사람의 존재는 다가올 맹렬한 사탄의 역사를 예상하게 합니다.
스데반은 사도 중에 더해진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후일 집사 제도의 근거가 된 일곱 일꾼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그가 특정하여 부름 받은 일은 말씀 사역이 아니라 구제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여섯 일꾼과 함께, 교회 안의 구제의 사역을 맡도록 세움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도록 음식을 공정하게 나눠주는 일입니다. 그는 이 일을 하는 중에 병자들을 만나거나 귀신들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큰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치유되거나 귀신들이 쫓겨났던 것 같습니다.
또한 그는 성경에 기록된 가장 길고, 가장 탁월한 설교를 한 인물입니다. 우리는 7장에서 그의 설교를 볼 것입니다. 그 설교를 보면, 그는 지적으로도 상당한 훈련을 받은 인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물론 그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으로써(6:10) 말과 논리로써 그를 당할 자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의 설교는 논리적으로 매우 탁월한 설교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2. 맹렬한 적대의 시작 (행 6:9-10; 눅 23:26; 행 18:24)
이제 우리는 이 거룩한 사람의 등장과 함께 사탄이 어떻게 이런 사람을 향해 맹렬하게 타오르는 분노를 표출하는지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는 그 단초가 되는 사건, 어떻게 사탄의 맹렬한 적대가 시작되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그 일은 디아스포라(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9절입니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일곱 일꾼들은 유대교로 입교한 니골라를 제외하면, 스데반을 포함하여 모두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당시 헬라파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을 중심으로 사역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던 사도들과 달리, 헬라파 유대인들이 교회의 지도자들로 세워짐에 따른 결과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등장하게 되는 주요한 인물, 사도 바울의 사역에 대한 예고이자 무대를 준비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디아스포라 유대인 소위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스데반과 논쟁을 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회당, 소위 ‘‘자유민들의 회당’(Synagogue of the Freedmen)’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9절에서 ‘이른 바 자유민들’이라고 한 사람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주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에, 예루살렘의 많은 주민들이 로마로 끌려가 노예로 살다가 해방되어고 그 후에는 로마 전역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자유민들은 이들 혹은 그 후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 중에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살게 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출신 지역별로 회당을 형성하여 모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고 한 것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의 이북 지역에 공산 정권이 들어섰을 때, 많은 이북의 그리스도인들이 재산을 포기하고 월남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때, 고향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들이 교회를 세우고 함께 모였던 것과 비슷합니다. ‘자유민들의 회당’은 이런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들 중에 구레네는 북부 아프리카 지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졌던 시몬의 출신지였습니다(눅 23:26). 알렉산드리아는 애굽의 도시로 당시 50만 인구 중 10만명이 유대인이라고 할 만큼 유대인이 많은 지역이었을 뿐 아니라, 탁월한 성경 교사 아볼로가 이 도시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행 18:24). 그리고 길리기아는 사도 바울의 출신지 다소가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된 데에는 각기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주된 이유는 성전을 가까이 하고 가능하다면 죽어서 성전 가까이에 묻히고 싶은 소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성전의 존재는 남달랐고, 성전에 대한 이들의 헌신은 특별했습니다. 이 배경을 이해해야 우리는 스데반의 이야기와 그의 설교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들의 회당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회당에서 일어난 어떤 사람들은 스데반과 논쟁을 하려고 했고 이 논쟁은 한동안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데반을 능히 이길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10). 논쟁의 패배는 교회를 향해 불어닥치게 될 맹렬한 분노의 단초가 됩니다.


3. 거짓 증인이 아니면 이길 수 없다 (행 6:11-15; 레 24:11-16; 행 7:58; 렘 7:4; 요 2:19; 3:19-20; 출 34:29)
논쟁에서 패한 사람들은 스데반에 대한 거짓 증언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람들을 매수하기 시작했습니다. 11절입니다.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11).” 스데반이 신성모독 발언을 했다고 증거하는 거짓 증인들을 매수한 그들은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스데반을 공회에 세우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났던 일이 재연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스데반을 논쟁으로 이길 수 없었던 사람들은 결국 거짓 증인을 세워 스데반에게 신성모독의 죄를 씌워 그를 죽일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신성모독의 죄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 가장 크고 무거운 죄였습니다(레 24:11-16).
예수님의 이름 외에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사도들과 교회의 주장은 성전과 율법을 연결하는 제사의 무용성을 함축하는 주장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거슬리는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죄인은 오직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에 근거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율법에 명시된 의식인 동물 제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스데반을 논쟁으로 이길 수 없어서 거짓 증인들을 세웠던 사람들 중에는 회심하기 전의 바울 사도, 즉 사울도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길리기아 다소 출신인 사울은 길리기아 출신 사람들의 회당에 속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스데반의 처형에서 적극적인 것이든 소극적인 것이든 일정한 역할을 감당했다고 누가는 말합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후에 그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고 함으로써 누가는 처음으로 사울이라는 인물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58).
거짓 증인들이 말한 증거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이 거룩한 곳’인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3절입니다.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13).” 우리는 그들의 거짓 증거에 대한 스데반 자신의 증언을 7장에서 자세히 보게 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간단하게만 정리하겠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성전이라는 건축물에 묶어 두려는 유대인들의 거짓된 열심을 공격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증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선포했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예레미야 7:4).” 이것은 얼마나 도발적인 메시지였겠습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은 여기 이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성전에 제한 시켜 둠으로써 유대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삶을 살든지, 성전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현대 기독교에서도, 그리고 어느 시대에나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믿음의 근거를 일정한 형식과 전통 속에 묶어 두려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짓 증거하여 죽이려고 했을 때에 했던 말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육체가 바로 하나님의 현존이며 임재인 성전이며, 구원은 성전이라는 건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지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매수하여 주님이 성전을 모독했다고 말하게 했습니다(마 26:60-61; 막 14:57-58; 눅 21:5-6). 그리고 스데반을 죽이려고 작정한 이들은 똑같은 말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거짓 증인들은 나사렛 예수가 이 곳, 성전을 헐겠다고 한 말은 스데반이 다시 했노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14).”
둘째로 거짓 증인들이 공격한 것은 스데반이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스데반은 사도들이 이 가르침을 강조했던 것 보다 더 나아갔을 개연성이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곧 모세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거짓 증인들은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14).
그러나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F.F.브루스가 지적하는 대로, 성전을 통해서 수입을 얻고 있었던 대제사장 그룹과 사두개인들의 이해관계가 작용하고 있었을 것을 합리적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모세 율법과 성전이 무너지면, 그들의 권력과 재력이 유지되고 있는 모든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많은 경우,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이와 다르지 않은 인간 탐욕의 문제가 신앙을 일정한 형식과 제도 속에 묶어 두려는 태도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일반적인 종교에서도 물론이고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쨌든 이 본문을 통해서 누가가 우리에게 증언해 주는 것은, 이 악한 자들이 거짓 증인을 매수하여 거짓 증거를 하지 않는 한, 스데반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일을 예수님에게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이런 태도를 한 마디로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한복음 3:19–20).”
누가는 15절에서 스데반에 대한 놀라운 증거를 기록합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 지금 스데반은 유대인의 최고 법정인 공회에 잡혀와서 공식적인 거짓 증거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얼마 전에 사도들이 붙잡혀 왔던 상황과는 다른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그가 들었던 바 예수님에게서 일어났던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런 거짓 증거의 결과는 사형선고 밖에 없다는 사실도 감지했을 것입니다. 거짓 증거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했다거나, 분노에 몸을 떨었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공회에 앉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주목했을 때, 그들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눈으로 보니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 행악자들이 볼 때에 그렇게 보였다는 말입니다. 아마 사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후일 사울이 그 이야기를 누가에게 들려주었거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후일 회심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누가가 이렇게 기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 처럼 빛났다고 해서 그들이 그를 죽이려는 악행을 멈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이 거룩한 사람을 더 죽여야만 한다고 느꼈습니다. 이런 거룩한 사람을 남겨두었다가는 그들의 악한 행위가 악한 것으로 더욱 드러나기만 할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천사처럼 빛나는 스데반의 얼굴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스데반과 지금 함께 계시다는 사실과, 친히 당신의 종을 변호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이 이 모든 거짓 증거에 대하여 무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스데반은 모세를 거슬러 말했다고 거짓 증거를 받고 있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나왔을 때 그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였던 것처럼(출 34;29) 스데반의 얼굴이 모세의 그 얼굴 처럼 빛났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얼굴에서는 두려움을 볼 수 없었습니다.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님께서 그 안에 충만하게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미혹을 받은 행악자들은 거짓 증인을 세우지 않으면 스데반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이 거룩한 사람 스데반을 잠잠하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4. 교훈과 적용 (행 6:7)
저는 성경에서 이 사람 스데반 처럼 그의 경건과 신앙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선한 증거를 받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이었고(3),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으며(5),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고(8),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으로써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으며(10), 거짓 증거를 받는 중에도 그 얼굴이 천사 같이 빛난 사람이었습니다(15).
저는 이전의 본문에서 교회가 일곱 일꾼들을 세우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졌다”는 말씀을 다시 주목하려고 합니다(6:7). 이것은 사도들이 이제 사역의 우선순위를 확정함으로써 말씀 사역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주어진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6;7은 “사도들의 설교가 점점 더 왕성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스데반과 같은 거룩한 사람들이 비록 사도는 아니었지만,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졌고 그들이 자신들의 고유 업무인 구제 사역을 감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일에도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더 왕성하게 전파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이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위 평신도라는 말 뒤에 숨으려는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나는 목사가 아니니까” 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분이 다 목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는 말씀의 사람이며, 그는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까? 스데반은 평신도의 이름 뒤에 숨으려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목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복음의 진리를 알아야 하며, 그 진리를 전파해야 하는 예수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 세상이 거짓 증인을 세우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는 거룩한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빛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이 어두워도 너무나 어둡습니다. 정치계나 재계나 사회 모든 영역에 빛으로 살아가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저는 19세기 탁월한 복음전도자였던 드와이트 무디(1837-1899)의 말을 소개함으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가 받은 학교 교육이라고는 초등학교 5학년이 전부였고 그는 안수 받은 목사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직업은 구두 판매원이었습니다. 그러나 10대 후반에 회심한 무디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결심문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께 철두철미 완전히 바쳐진 사람과 함께 그런 사람을 위해, 그런 사람을 통해, 그런 사람 안에서, 그런 사람 곁에서 어떻게 역사하실 수 있는지 세상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최선을 다할 것이다.”